#187화
저들이 먼저 제국 땅에 잠입해왔으니, 이번엔 반대로 이쪽에서 잠입한다. 얼핏 들으면 단순한 보복성 판단으로 들렸지만, 아르테가 그런 이유로 한 말은 아니었다.
“만약 전하께서 제게 대군을 빌려주신다 해도, 그들을 데리고 교국의 국경에서 대치할 수는 없겠죠. 그랬다간, 양국의 병사들로 피의 강을 이룰 테니.”
“어째, 이쪽의 사정을 봐 주시는 듯해 민망하군요. 아르테 주교께선 이미 그 상황까지 각오한 것 아니었습니까?”
“제가 로이터 주교를 대주교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대주교로 있는 한 언제고 수많은 목숨을 담보 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그런 그를 몰아내기 위해 대량의 희생을 각오한다니, 어불성설이죠.”
아르테의 입장은 잘 알았다. 그녀로선 제국과 교국 간의 전면전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도 피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건 아렌도 동감이었다.
아렌이 물었다.
“하지만, 그래서 생각한 다른 방법이 교국 가장 깊숙한 곳에 잠입하는 건가? 너무 무모해.”
“과연 그럴까? 교국의 수하들이 제국 최북단까지 뻗어있었다는 건, 반대로 이미 내가 교국 안에 있지 않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다는 뜻이야. 지금이라면 교국 안의 경계는 충분히 느슨하겠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을 테니.”
아르테의 강한 확신에, 아렌의 마음도 조금 흔들렸다. 여전히 지나치게 상황을 낙관하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아렌은 아르테가 아니다.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다는 건, 저런 허술해 보이는 계획으로도 적당히 상황을 타개하게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음, 그럴 거였다면, 저 광신병들과 같이 움직여도 됐을 텐데. 의심도 쉽게 피하고, 겸사겸사 감시할 수도 있으니.”
“아니. 동행했던 기사들을 모두 잃은 자들이야. 돌아가봤자 오히려 의심만 사겠지. 오히려 그들에게 이목이 쏠린 틈을 타 잠입하는 게 나을 거야.”
“…흠.”
아렌은 지금의 목표를 정리했다.
레온나토스와 아르테 동맹의 최종 목표는, 교국 내 아르테의 귀환과 대주교를 사로잡는 것.
“지금도 교국 안에는, 대주교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아요. 저를 지지해주시는 주교분들도 모두 다 축출되신 것은 아니죠. 로이터 주교를 축출하고 새로이 대주교를 뽑기만 하면, 교국을 다시 되살릴 수 있어요.”
“믿겠소. 하면, 교국을 정상화하는데 필요한 인원은?”
“너무 많은 인원은 오히려 걸리적거릴 뿐이에요. 가장 강한 기사 두 명과 아렌만 있으면 어떻게 될 거예요.”
이 대목에서 레온나토스는 눈을 찌푸리고 물었다.
“…기사들이야 이해가 가지만, 아렌을?”
“네. 이번 임무야 말로 아렌의 힘이 필요하니까요.”
레온나토스는 곧바로 이해했다. 아렌의 실제 무력보다, 그의 점술 능력을 더욱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하지만 아렌의 점술은 이제 예전처럼 자주 쓸 수 없었다.
“주교께서 조금 오해를 하고 계신 듯하군요. 지금 아렌은 예전만큼-”
“네. 저도 가죠.”
레온나토스가 만류하기도 전에, 아렌이 먼저 답했다.
“하지만, 아렌.”
“어쩌면 황자가 되시는데 필요한 마지막 관문일지 모릅니다. 여기서 머뭇거릴 순 없습니다.”
아르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리고 전하. 아렌공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으니까요.”
“알다니, 어느새… 아.”
이미 아르테는 레온나토스의 마음을 읽은 뒤였다.
“그럼에도 그가 필요합니다. 불확실함을 극복하기 위해선 아렌보다 나은 사람이 없죠.”
본인의 일이기는 하지만, 아르테 본인 또한 그곳에 동행한다. 위험을 무릅쓰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
애써 도망쳐 나온 나라로 곧바로 다시 들어간다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아렌조차도 아르테가 제국으로 망명한 뒤 제국의 병력으로 전쟁을 일으킬 줄로만 알았다.
심지어 그녀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이라도 군사적 도움을 구한다면 현재 교국 대주교를 압박할 수 있을 터.
말로만 평화를 위하기보다, 저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레온나토스 황자의 가신들 사이에서도 제법 반향이 있었다.
‘어어, 저러다 아트마 교라도 믿는 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아트마 교를 믿는 가신들이라도 나오면, 두고두고 골치 아플 수도 있었다.
아르테의 행동에 일순 감화될뻔한 자들의 면면을 살핀 아렌.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놓는 것으로 대비는 마칠 생각이었다.
“…평화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아르테 주교의 심려에는 깊이 감탄하게 되는군요. 우리 제국의 황권 경쟁도 부디 그렇게 끝난다면 좋을 것을.”
아르테의 대답은 황자에게 들릴 듯 말 듯, 덧없이 작은 목소리였다.
“글쎄요. 제 노력이 실제로 이뤄질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
가장 강한 기사 두 명은, 볼 것 없이 더글라스와 발커스가 뽑혔다.
둘 다 이름을 댄다면 교국 안에서도 제법 알려진 자들이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으로 퍼진 명성일 뿐.
대외 활동이 그리 활발하진 않았기에, 얼굴만 보고 그들의 정체가 발각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럼 아르테 주교. 아렌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따금 무모한 짓을 하는 녀석인지라 손이 많이 갈 겁니다.”
“…그간 전하께서 심적으로 고생이 많으셨군요. 전하의 말씀 긴히 기억하겠습니다.”
‘…황자가 마음고생은 무슨. 고생은 내가 했지.’
아렌이 속으로 이죽거렸지만 아르테는 아렌의 마음은 읽지 못한다.
대신 아렌은 황자에게 고했다.
“그럼 전하, 다녀오겠습니다.”
아렌과 아르테가 운전하는 마차 한 대와 더글라스와 발커스가 운전하는 마차 한대. 각각 두대의 마차가 아트마 교국을 향해 내려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앉은 거야?”
“응? 설명 못 들었어?”
“듣기는 했지. 그런데, 이게 정말 맞아?”
아렌은 한숨을 쉬었다.
구성이 애매한 네 명의 사람이 각기 말을 타고 내려가는 것보다는, 짐마차로 위장하는 것이 훨씬 눈에 덜 띈다는 의견이 있었다.
“만약의 경우 수레를 버려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은 최소한 네 마리는 되는 게 좋지. 한 마차를 네마리나 끄는 건, 어지간한 부자 아닌 한 보기 힘들고.”
“그거야 그렇다 치자고. 왜 너랑 내가 한 마차인 거냐고.”
아르테는 고삐를 쥔 아렌의 팔을 일부러 더 껴안으며 말했다.
“나야 누군가의 부인으로 위장하면 그만이지. 뒤의 기사분들은 나이나 체격이나 상인이든 농민이든 마음대로 취할 수 있고. 그런데 넌 어느 쪽으로든 어색하잖아? 차라리 어린 신랑인 편이 낫지.”
“저 둘은 호위 아니야? 아예 다른 마차에 타고 있으면 반응이 못해도 10초는 느릴 텐데.”
“일반적인 남편이, 아내를 외간 남자와 같은 마차에 태울까? 그냥 받아들여.”
“…….”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아렌이 중얼거렸지만 이번 작전의 핵심은 아르테다.
그리고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아르테에게 불시의 기습을 가하긴 정말 쉽지 않다. 그녀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아렌은 한숨을 쉬며 고삐를 고쳐잡았다.
“그런데 아렌. 이제 점괘를 잘 보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야? 레온나토스 황자는 그렇게 알고 있던데.”
“…그래. 언제부턴가 몸에 무리가 가더군.”
마침 아렌이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었다. 뒤따르는 마차는 충분히 떨어져 있고, 어지간히 큰 소리가 아닌 한 모두 마차의 바퀴 소리에 묻혀버린다.
아렌은 물었다.
“넌 어때? 운명석으로 얻은 능력을 사용하다 몸에 무리가 간 경우가 있나?”
“글쎄.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거든?”
아르테는 단 한번도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역시, 내가 이상한 건가?’
“영문은 모르겠지만, 네 점술을 쓰지 못하는 건 아쉽네. 내 독심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더 유용할 것 같았는데.”
“정 급박하다 싶으면, 한두 번은 써줄 수 있어.”
사실은 언령이 아니라, 말하는대로 이뤄지는 언령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라이안 황자도 운명석 계약자였지. 어때 아렌. 북부에서 단서를 찾았어?”
“운명석에 관한 것이라면 조금은. 하지만 라이안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전혀?”
이번 작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로이터 주교를 사로잡아, 정당한 절차로 대주교를 선출하기 위함이었다.
로이터가 모든 병사들의 지지를 받지는 않을 테니, 로이터만 손에 넣으면 어떻게든 된다.
진짜 문제는, 그 로이터를 비호하는 제1 황자 라이안과 그 세력들.
로이터를 노리는 과정 중에 어떻게든 라이안 황자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미지의 능력을 지닌 운명석 계약자와.
‘나나 아르테에게 쓸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은 아니야. 우리가 운명석 계약자인 것을 결국 못 알아챘으니까.’
교국의 성지인 비원궁에서 아르테가 운명석 계약자가 아닌가 의혹을 제기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르테에게 신비한 힘이 있다기에 넘겨짚은 것.
아르테 만큼은 아니라도 사람의 속내를 유추할 수 있는 아렌이었다.
적어도 라이안은, 아렌이 운명석 계약자인 것을 줄곧 모르고 있었다.
‘하다못해 황자의 운명석이 어디 있는지만 알았어도…’
아쉽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이안의 위험성은 항상 머리 한편에 간직하고 있지만, 너무 의식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아렌이 물었다.
“그럼, 우선 이만한 인원이 어떻게 잠입할 거지? 네 명이라도 적지 않은 숫자인데. 게다가 여자는 훨씬 감시가 심할 거고.”
“비원궁의 입구는 좁고 가팔라. 경사있는 줄다리가 백 미터 남짓 이어져 있으니까. 그만큼, 한번 짐이 들어가면 행렬이 길어지지. 등짐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으니까.”
“…줄다리? 그러나 끊어지거나 하지는 않아?”
“아, 그런 일은 없어. 적어도 수백 년 간은 한 번도 끊어진 적 없으니까.”
“…….”
줄을 자주 간다, 는 의미는 아닌 듯했다. 줄이 끊어지지 않고 수백 년 동안이나 유지되다니, 건축공학 밖의 이야기다.
“비원궁도, 운명석 계약자가 지은 건가?”
“그런 모양이야. 그 술자는 벌써 오래전에 죽었겠지만, 죽은 뒤에도 유지되는 종류의 소원이었겠지.”
“…그래. 그러고 보니 태양교의 대사원에서도 비슷한 게 있었어.”
남부에 줄다리를 포함해 절대 무너지지 않는 비원궁이 있다면, 북부에는 결코 추락할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 태양흔이 있다.
‘…죽어도 유지되는 능력이라.’
“흐음…”
“뭐야, 뭘 그렇게 생각해?”
아르테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원궁은 무슨 짓을 하든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이용해볼 수 없나 머리를 굴려봤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별로.”
“아까 황자가 말한 거 들었지? 너 막 나가지 않게 잘 붙잡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거. 뒷 마차의 두 기사한테도 같은 말을 했을 걸?”
“참 나. 내가 막 나간 덕분에 지금 이 위치에 올랐으면서.”
아렌이 툴툴대자 아르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렌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오올, 역시? 꽤 하나 봐? 비서관 아렌 나리?”
“시끄러, 아르테. 고삐 헝클어지니까 앞이나 봐.”
“…그런데, 언제부터 말을 놓은 거야?”
어라?
정말 그러네?
언제부터였는지, 아렌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이제 와서 내숭 떨 필요도 없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말 놓는다?”
“…옛날이 더 귀여웠는데.”
마차는 덜컹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남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