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86화 (186/227)

#186화

광신병들은 창문 없이 꽉 막힌 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사실상 치료를 가장한 구금이었고, 오늘 이들이 한데 모인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아르테가 들어왔다. 주위에는 여섯 명의 낮안개 기사단이 서 있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까지 완벽히 차단하기 위해.

미리 그들의 손을 묶어 뒀음에도 광신병들의 몸은 들썩거렸다.

“이년이!”

“저를 만나러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군요.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유일신 아트마의 은덕이겠죠.”

“입 닥쳐! 배교자 주제에 감히 아트마를 입에 올리다니!”

“배교라니, 제가요?”

광신병의 외침에, 아르테는 천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무엇을 했죠? 모든 일의 시작은 제가 아니라, 로이터 주교였는데요?”

“주교가 아니라 대주교 님이다!”

“네가 전대 대주교님을 해하지 않았냐!”

“됐어, 더이상 상대하지 마! 저년은 마음을 읽는다고! 상대해줘봤자 우리 마음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올 뿐이야!”

아르테 역시 그 의견에 수긍했다.

“그야, 물론이죠. 당신들의 생각을 모두 훤히 들여다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제가 하는 말이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죠. 그렇지 않나요?”

손가락이 잘려 손에 붕대를 두른 광신병은 그녀를 보면서 사납게 웃었다.

“우리에게서 뭔가를 건지고 싶은가 본데, 미안하지만 우린 어차피 말단 중에서도 가장 말단이야. 네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딱히 없을 거다.”

“네, 그렇네요.”

이미 마음속을 엿보고, 견적까지 내린 아르테였다.

“하지만 같은 동도끼리 먼 타지에서 만났는데, 쌓인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야기는 무슨!”

“가령, 진정 적법한 교국의 통치자가 누구인가, 라든지요.”

광신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아르테와, 그 옆에 도열해있는 기사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들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아르테에게 덤벼들 태세였다.

“설마 그게 너라는 거냐?”

“물론 저도 아니죠. 정당한 절차를 거쳐, 주교들 간의 투표로 정해져야만 모두 인정하겠죠. 지금의 형태는 문제가 있어요.”

“로이터 대주교께서도 투표로 그 자리에 올라 계시다!”

“아, 제국 라이안 황자의 병사들로 겁박해서 치른 선거 말입니까?”

“…….”

광신병은 입을 다물었다.

그 찰나의 순간, 아르테는 광신병들의 마음속 더 깊은 곳을 엿봤다.

“…당신들 마음에도 미혹이 남아있군요.”

아르테의 말에 놀라 화들짝 고개를 든 광신병들.

옆 누군가가 그리 생각했는지, 혹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들은 쩔쩔 맨다.

그 사이 아르테는 말했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그 동안, 시간 죽이기로 생각하고 조금만 어울려주시죠. 그러니 기사 분들, 저들의 수갑을 풀어주시겠어요?”

아르테의 말에 광신병보다 기사들이 더 놀랐다.

자신을 척살하라는 임무를 받은 자들을 앞에 두고, 그들의 수갑을 풀어주라니.

하지만 기사들은 아렌이 한 명령을 곧이곧대로 받들었다.

‘저라고 생각하고 아르테 주교를 호위해주세요. 그녀가 한 명령은 곧 제가 한 명령이라고 생각해주시고요.’

병사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아르테였다.

아르테가 광신병의 수갑을 풀라고 한 건, 그들이 실제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아르테는 알고 있다.

언제나, 행동보다 생각이 선행한다는 사실을.

광신병들의 마음 안에 적개심이 없는 한, 아르테는 안전하다. 설령 그들이 빠르게 다른 마음을 품더라도, 아르테가 기사들의 뒤에 숨는 것이 더 빠르다.

광신병들은 얼결에 자유가 된 양 손목을 어루만졌고, 아르테는 느긋하게 말했다.

“자, 그럼 이야기해볼까요?”

*****

아르테와 광신병이 들어간 방.

널찍한 복도 끝에서, 레온나토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아르테가 들어있는 방문을 바라봤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 또한 운명석의 능력인가?”

“글쎄요.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만.”

“아아, 미안하군. 하긴. 자네가 모든 걸 알 순 없지.”

“…….”

“전이라면 모를까, 운명석을 알고 나니, 세상에 있는 모든 신묘한 일들은 죄다 운명석의 힘이라 해석하게 되는 것 같군.”

아렌은 적당히 맞장구쳤다.

“라이안 황자가 말했던, 세상을 어지럽히는 힘이라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될지도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뻔히 실존하는 것을 언제까지고 은폐할 수는 없어.”

레온나토스는 운명석의 원산지인 북부를 손에 넣었다. 아직은 레온나토스의 손안에 운명석 원산지가 있다는 걸 모를 테지만,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차피 광신병들이 교국에 닿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북부의 소식이 전해지겠죠. 레온나토스 황자가 망명한 교국의 주교와 손을 잡았고, 현 대주교를 몰아내기로 천명했다고.”

“…광신병들은, 정말 내려보낼 건가?”

“네. 마음을 고쳐먹으면요.”

다른 결정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레온나토스로서는 광신병들을 굳이 남부로 내려보내려는 이유만큼은 끝까지 이해되지 않았다.

“마음을 고쳐먹다니, 그럴 수 있을까? 이미 오래전부터 신앙이라는 이름의 세뇌를 당한 자들이야. 설령 바꾼다 해도, 그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점점 레온나토스의 말소리가 줄어들었고.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르테가 있습니다. 그녀라면 그들의 마음이 정말 바뀌었는지, 지금 어떤 식으로 말하는 게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지까지 훤히 알 수 있죠. 아마 방 안에 있는 내내 그들의 마음 약한 곳만 파고들 수 있죠. 저 능력은, 사람을 홀리는 데는 가히 최고입니다.”

레온나토스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와 동맹을 맺는다라. 로이터 대주교가 왜 그녀를 쳐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군.”

“꺼려지십니까?”

“그야, 사람이니 조금은.”

“하지만 전하께서는 미래고 뭐고 훤히 들여다보는 조차 등용하셨습니다만.”

그 말에 레온나토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는 이상한 사람만 꼬이는구나.”

‘…이상한 사람이라니, 말이 심하네.’

“아, 그래. 이제는 점괘를 좀 볼 수 있게 되었나?”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아렌은 더는 얼버무릴 수 없기에 결국 대답했다.

“…네. 서서히 돌아오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천기를 엿본 탓인지, 점괘를 볼 때마다 몸에 부담이 가더군요. 예전만큼 점괘를 보는 건 무리일 듯합니다.”

“몸에 무리가 간다니, 그럼에도 여전히 점괘를 볼 생각인가? 빈도를 줄이는 게 아니라, 이참에 점괘와는 결별해야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언제고 점괘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은 남겨둬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겁을 낼 테니까요.”

말을 마친 아렌은, 아르테가 들어간 방문을 바라봤다.

“아르테가 광신병들의 마음을 돌려 놓는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요.”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오래 걸릴 거라면 그 사이 온천 지대의 운명석이라도 캐내 볼까?”

“그거 괜찮네요. 차라리 믿을만한 가신을 운명석과 계약시키는 건 어떤가요? 더글라스나 발커스 정도면 능력이나 충성도 면이나 꽤나 믿음직한 인선이겠죠.”

거기서,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아렌, 자네 이름은 빼는가?”

‘-아차.’

“…그거야 제가 원체 속이 검으니까요. 전하께서도 알아서 조심하셔야죠.”

“아아, 하긴.”

아렌은 겨우 얼버무렸다.

자신은 이미 운명석 계약자이니, 또 다른 계약이 가능할 리 없었다.

‘만약 가신에게 운명석을 쓰게 한다면, 기를 쓰고 반대해야겠군.’

그때, 광신병이 잡혀있던 독방에서 아르테가 나왔다.

안의 내용을 엿듣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레온나토스와 아렌은 비로소 그녀 앞에 다가갔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어째, 이야기는 잘 끝내셨습니까.”

“네. 아마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씀은?”

“잘 될 거예요. 이대로라면.”

레온나토스는 무엇이 잘 될 것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다가, 비로소 방금 전까지 아렌과 나누던 이야기임을 알았다.

“그들이 아무리 생각이 굳어있어도, 그건 교에 대한 충성심일 뿐, 로이터를 섬기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죠.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구세자의 자리에서, 로이터를 몰아내고 대신 제가 들어가면 될 뿐이에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겁나는군요. 주교님 앞에선 마음가짐을 제대로 해야겠어요.”

“정말 그리 생각하고 계시진 않잖아요?”

“…….”

“실은 신기하게만 생각할 뿐, 말씀하신 것만큼 겁을 내진 않으시죠. 전하께선 제가 만난 이들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겉과 속이 일치하시는 분이죠.”

“칭찬이라 받아들이겠소.”

“물론 그렇습니다, 전하.”

레온나토스의 시선이 곁에 있는 아렌에게 향했다.

“그럼, 아렌은 어떻소. 아렌도 그런 자인가?”

아렌은 딴청을 피웠고, 아르테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아렌만큼 겉과 속이 다른 자는 없답니다?”

‘거짓말. 본 적도 없으면서.’

아렌은 속으로 이죽거렸다.

*****

“…그럼, 내려가겠소.”

“어차피 칼도 없으니. 제국 땅 안에서는 사고를 치지 않겠다 다짐하지.”

교국의 광신병 넷은 충분히 상처를 치료한 뒤 남쪽으로 내려갔다.

새벽녘의 마중에는 아르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앞까지 온 아르테를 보고도 광신병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 행동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들은, 아르테에게 완전히 감화되었다는 걸.

아렌은 아르테의 곁에 가 소곤거렸다.

“-대단한데? 고작 며칠 사이에 완전히 사로잡다니.”

“별말씀을.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바로 옆에 정답지가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르테의 겸양을 아렌은 웃어넘겼다.

“그럼, 저들은 교국으로 내려가 뭘 하지?”

“글쎄. 결국 기사들은 모두 잡혀 죽었고, 나는 찾지 못한 채 귀환했다.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부득이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

“그 정도 변명을 믿어줄까? 안 믿어준다면…”

교국에서 광신병을 쓰는 용도는, 전장의 믿음직한 소모품이었다.

타국의 정예병만큼 강하고, 징집병처럼 많았다. 그들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전선으로 갈아 넣는다.

애초에 광신병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바라보니,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광신병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독한 고문을 받아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뱉어낼 수도, 변명의 기회조차 없이 목이 잘릴 수도 있다.

“글쎄. 어느 쪽이건, 우리가 내 조국에 보내는 선전포고는 되지 않을까?”

아르테는 광신병 넷이 점점 멀어지는, 남으로 쭉 뻗은 왕의 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의 시조 건국왕이 북진했던 그 길을, 이제 레온나토스가 내려갈 차례였다.

레온나토스가 다가와 물었다.

“그럼, 힘을 보태겠다 말씀 드렸습니다만, 원하는 방식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그렇군요.”

아르테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실은, 이미 생각해둔 것이 있는 주제에.’

“아! 이러면 어떨까요? 교국은 광신병과 기사들을 몰래 잠입시켰죠. 이번엔 우리가 잠입하는 거에요.”

“…어디까지요?”

“그야, 비원궁 가장 깊은 곳까지.”

“…….”

아르테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레온나토스였다.

‘이거, 괜히 도와준다 말한 건가?’

하지만 이미 낙장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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