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85화 (185/227)

#185화

선페일 지역까지 올라온 다섯 명의 광신병을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은, 곧바로 이행되지 못했다.

광신병 중 세 명이 큰 부상을 입었고, 그중 한 명은 당장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중상이었기 때문이다.

약속대로 그들을 최선을 다해 치료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리 잘 풀리지는 않았다.

이미 배를 깊이 찔렸고, 겉의 상처만 나무의 수액으로 대충 덮어뒀을 뿐이다. 복강 안쪽에 고인 피는 퍼낼 수도, 그대로 덮어둘 수도 없었다.

아렌은 의원에게 다친 승병들의 치료에 최선을 다하라 지시했다.

다친 승병이 치료받는 동안은, 교국으로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디, 아트마의 가호가 있기를.”

큰 부상을 당한 승병은 결국 목숨을 잃었다. 손가락이 숭덩숭덩 잘려나갔던 승병도 감염은 막았지만, 평생 한쪽 팔로만 고삐를 잡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불구자가 되었음에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평생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고 광신병으로서의 자격 또한 박탈되겠지만, 이미 광신병은 자신의 안위 따위보다 신앙을 더 우선시하는 자들로 악명 높았다.

광신병들은 동료의 몸이 완전히 다 낫지 않았음에도 출발을 서두르려고 했다.

아렌이 그들을 만류했다.

“제국의 황자는 약속을 지켜라. 분명 몸 성히 교국으로 보내준다는 약속이었다.”

“그야 물론 지키지. 그때의 약속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 하지만,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잖아? 좀 더 휴양하는 게 어때?”

“이따위 상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약속이나 지켜라! 긴 말 하지 않겠다!”

“…보통 광신병을 묘사할 때 맹목적이라더니, 실은 먼 게 눈이 아니라 귀였나? 약속을 어길 생각은 전혀 없다니까?”

“그럼 약속이나 빨리-”

“하지만, 언제 보낸다고는 하지 않았지.”

“…뭐?!”

“아아. 또 시끄러울까 봐 미리 말하는 건데, 걱정하지는 말고. 억지를 부려 천년만년 가둔다는 뜻은 아니니까.”

속았다는 듯 눈을 뜨악하게 치켜든 그들을 달래듯 아렌은 천천히 말했다.

“곧, 너희 교국의 주교인 아르테가 이곳으로 올 거다. 모처럼이니 그녀를 만나게 해주지.”

“…하, 죽일 대상을 눈앞에서 보고도 얌전히 교국으로 물러나라는 거냐? 제국은 아트마의 종을 이딴 식으로 조롱하는 건가?!”

“조롱이라니. 서로의 이견을 좁히는 과정이라 생각해주겠어?”

“그년을 죽이는 것이 우리 임무다!”

“물론 너희 손발은 단단히 묶어둘 거야. 그녀 주변의 호위는 최고 수준일 거고. 너흰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을 거야.”

“죽이려던 여자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인가!”

“어차피 상처가 완전히 낫지도 않았잖아? 상처를 내버려 뒀다가 덧나기라도 하면 나중에 정말 위험해진다? 이참에 여기서 상처도 치료하고 만전을 기해. 네 동료의 무덤도 만들어줄 테니까.”

“교에 귀의할 때부터 아트마께 바친 몸이다. 죽은 육신은 한낱 고깃덩이일 뿐인데, 무덤 따위가 필요할 것 같나?”

“아트마는 죽은 자의 무덤 짓는 것을 금기시하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 굳이 만들어준다는데, 굳이 거절하는 이유라도?”

“…….”

광신병들은 비로소 입을 닫았다.

교국 출신의 광신병이 북쪽 끝에 묻히는 것이 썩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만. 들판에 던져져 흔적도 없이 썩어가는 것보다는 묻힌 곳의 흔적이나마 남아있는 편이 좋았다.

물론, 광신병들은 아렌의 다른 의도 역시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아르테, 그년이 우리 앞에 선다면, 머릿속을 발가벗긴 거나 마찬가지가 되겠군.’

아르테는 한때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테가 광신병들 앞에 선다면, 그들의 속마음 따위 간단하게 끄집어낼 수 있다.

본인들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는 기억의 파편조차도.

“…우리 생각을, 낱낱이 파헤칠 셈인가?”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다니까? 같은 나라 출신이고, 어쩌면 다시 못볼지도 모르니까. 자리를 마련한 것 뿐이야.”

저들이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해봤자, 지금의 이 입장차이는 변하지 않는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포로. 그들의 처우는 물론 생살여탈권조차 아렌에게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렌에겐 ‘상처를 치료할 동안까지’라는, 얼핏 그들을 위해 억류하는 듯 한 명분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르테는 언제쯤 도착하지?”

“아마 한 달 보다는 조금 덜 걸릴 거야. 어차피 교국까지는 먼 거리지. 편안한 침대에 진수성찬, 까지는 무리지만 여행길보다는 편하겠지. 그동안만 참으라고.”

“…한 달. 약조한 거다.”

어차피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었지만, 아렌은 형식상의 승낙을 받았다.

그들과 말을 섞어본 아렌은, 곧바로 견적을 냈다.

‘…말로 마음을 바꾸는 건 쉽지 않겠는데?’

간혹 저런 유형이 있다. 뿌리처럼 박힌 생각이 너무 확고해서, 외부의 자극으로는 절대 바꾸려 하지 않는 자들이.

‘그러니 광신병이 되었겠지. 아니, 광신병으로 만들어진 건가?’

저만큼 굳어진 맹신이 단순한 신앙생활로 만들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태양교가 처음 제국 황실에까지 촉수를 뻗쳤을 때는, 아트마 교보다 극성이라 여겼다.

하지만 실은,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자신들의 영토가 있으니, 그 안의 사람들에겐 몇 배로 더 가혹하다는 건가?’

아렌은 저 완고한 자들의 머릿속 금고를 열어줄 아르테가 얼른 도착하길 기다렸다.

*****

흑사자 기사단 세 명은, 협곡 가도를 넘어 설원으로 압송됐다.

구금 기한은 레온나토스, 혹은 라이안이 황태자가 될 때까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였다. 그곳에서 목숨을 잃지 않을 만큼의 대우를 해준다면, 흑사자 기사단은 기사로서 맹세한 대로 그곳을 탈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탈출하려 해도 협곡의 두 관문을 통과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설원 전체가 곧 거대한 감옥이니까. 그들이 관문 밖에 있으면,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도 좀 더 긴장하겠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늦가을이 지나가 초겨울에 접어들었고, 북부의 초겨울은 대륙 중부의 동지나 마찬가지였다.

겨울에 접어들어 왕의 가도를 지나는 마차가 더욱 뜸해질 때쯤,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한 여인이 북부의 땅을 밟았다.

그녀 하나를 호위하기 위해 40여 명의 병사들이 같이 움직였다. 일반 징집병이 아니라, 황궁에서 훈련받은 정예들이었다.

“흐음, 여기가 선페일 영지인가? 보고로 들었던 것보다는 괜찮은 곳인데?”

“그나마 최근에 급속도로 나아진 곳이지. 곧바로 동부로 향한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어. 북부로 왔으면 금방 잡혔을 테지.”

흰색 긴 머리를 석둑 자른 아르테를 아렌이 맞이했다.

아렌과는 구면이고 나눌 이야기도 많지만, 오늘 만남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아르테와 레온나토스였다.

“제국에 온 걸 환영합니다, 아르테 주교.”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레온나토스 전하. 사실 제국의 국경을 넘은 것은 꽤 이전이지만요.”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울러 교국에서 일어난 일은, 제국민으로서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모두 제 부덕한 형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둘 다, 고생이 많군요. 저는 루카스 주교, 전하께서는 라이안 황자로. 흔히 적의 적은 친구라고들 하죠. 그럼, ‘적의 친구의 적’ 역시 친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르테의 말은, 자신이 레온나토스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동등한 입장으로서 대해달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입장을 고려하면 큰 모험이었고, 자칫 레온나토스의 기분을 크게 상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아르테에 한해선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차피, 레온나토스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테니까.’

같은 운명석 계약자가 아닌 한, 아르테가 다른 이에게 말실수를 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제법 당당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물론 좋습니다.”

“힘들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죠. 무도한 루카스 주교를 몰아내고 아트마 교국의 원래 기치를 세울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새로 태어난 교국이 레온나토스 전하의 제국을 도울 겁니다. 약속드리죠.”

“굳이 그런 약속 없이도 도와드릴 생각이었는데, 이제 더욱 힘을 써야겠군요.”

현재 교국의 대주교와 손을 잡은 라이안에 이어, 그의 대항마와 손을 잡은 레온나토스의 소문은 제국 전역에 퍼져나갈 것이다.

황자들끼리의 은근한 견제를 넘어, 라이안 황자에 정식으로 대적하는 것을 택했다.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뀐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렌이 살아왔던 과거는 전혀 쓸모없게 되었다.

그간 자신의 점괘가 실은 언령술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실험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일.

아르테는 곧바로 광신병들을 만나보기 위해 이동했다. 말이 만나는 것이지, 사실상 질문 없는 심문이나 마찬가지.

‘그럼, 다른 황자들은 어떻게 나올까?’

*****

제국의 제4 황자 가웨인은 도국 연합의 거점도시 중 한 곳, 헬데움에 들어와 있었다.

레데와의 전쟁으로 배와 항구가 모두 불탄 것이 얼마 전이었지만, 기적적인 속도로 다시 항구를 재건한 헬데움은 항구를 통하는 막대한 양의 선박을 통해 다시금 세상 모든 정보를 모으는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다.

헬데움 시청의 응접실에서, 붉은 머리의 미녀 세밀 메렌치가 직접 차를 따르며 물었다.

“어떠신지요. 헬데움의 홍차가 입맛에 맞는지 궁금합니다.”

“나쁘지 않군, 헬데움의 공녀. 나야 워낙 투박한 입맛이니 차의 미묘한 맛 같은 건 모르지만 말야.”

“워낙 출중하신 재능이 있으니, 그 정도쯤은 허물도 아니시지요. 그간 여러 도국을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워낙 게으른지라, 꽤나 시간이 걸렸지.”

“가장 처음 들른 도시는 카르도나, 가장 마지막은 헬데움이군요. 혹시 이 순서에 무슨 의도라도 있으신지요?”

그 말에 가웨인이 피식 웃었다.

가웨인은 대국 셰오덴 제국의 차기 황제 후보, 세밀 메렌치는 그저 유력가문 메렌치 가의 장녀일 뿐이다.

하지만 이곳은 교국 안. 제국과의 외교관계를 도외시한다면 이곳에서의 주도권은 세밀에게 있었다.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경계를 정확히 가늠하고 있군. 어디서 얻어낸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군.’

그동안 모든 도국을 돌아다녔다.

제국 깊숙한 곳이나 남쪽 끝 교국도 아닌, 도국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니 헬데움이 정보를 수집하기엔 그보다 쉬웠을 수는 없다.

“의도라, 그런 것 따윈 없어. 처음엔 우피치 가의 여식에게 노골적으로 물었지. 지지하는 황자를 바꿔볼 수 있겠냐고 말이야. 하지만 쉽게 바꿔주지 않을 것을 느꼈지. 그순간 내게 남은 선택지가 무엇이겠나?”

“…글쎄요? 무엇이었죠?”

“셋이었던 도국 연합의 거점도시, 이제는 둘이군. 헬데움과 카르도나를 제외한 모든 도시를 손에 넣고, 다시금 전쟁을 부추기는 것. 그 뒤 제국, 정확히는 나에게 지지 선언을 보내도록 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세밀의 말대로였다.

어느 순간부터 가웨인은 각 도시를 돌며, 적당히 대접받으며 여행을 즐겼을 뿐.

헬데움은 물론 카르도나조차 그렇게 판단했기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래. 레데가 일으킨 전쟁은, 기적적으로 인명피해를 일으키지 않았어. 혼자 일으킨 전쟁인 이상 속전속결을 원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전쟁을 끝낸 이웃 나라를 다시금 전쟁으로 어지럽힌다면, 과연 황제 폐하께서 나를 이뻐해주실까?”

“…….”

“거기까지 다다른 이상, 외통수임을 알았지. 내게 황제가 아닌, 다른 뜻을 이으라는 것이 폐하의 의도라는 것도.”

가웨인의 말은 아비에게 버림받은 아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세월동안 억지로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책임감을 벗어던진 후련함이 있었다.

“이곳 헬데움에 검술 학회가 있지? 우선 이곳에서부터 인가를 받아야겠어.”

“…이곳 헬데움은 전하의 도전을 응원할 것입니다.”

제국 전역에 흩어진 열 곳 남짓한 검술학회는, 자신을 높이고 나머지를 낮추며 서로 경쟁해왔다.

한 검술학회의 인가를 받으면, 다른 학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그 자를 깔본다. 그것이 자신들을 높이는 길이므로.

그런 학회의 생리조차 무시하는 무위를 보인 자.

각기 다른 검술학회 다섯 곳 이상의 인가를 받은 자를, 세간은 검성이라고 불렀다. 한 세대에 다섯 명이 나오기 힘든 위대한 업적.

세밀은 조금 고개를 숙인 뒤 말을 이었다.

“하오면, 이 소식은 이제 필요 없으시겠군요.”

“…소식?”

“네. 교국을 장악한 라이안 황자에 레온나토스 황자가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교국의 적법한 통치자를 데리고 있다고요.”

“레온나토스, 그 자식이?”

이번 황제의 임무 중에 새로운 황태자가 결정될 거라 봤지만, 이 전개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우려와 감탄을 동시에 하는 가웨인을 은근히 부추기듯, 세밀 메렌치가 말했다.

“방금 말씀에 따르면 전하께서는, 중립적인 입장이신 것, 맞으시지요?”

그 말에 가웨인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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