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날이 밝았다.
밤동안 초원 위에 큰 원을 그리며 환하게 밝혀져 있던 횃불은, 어느덧 태양의 밝기에 밀려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아있었다.
밤동안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자들의 면면 또한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에서 내린 채 숙이고 있었지만, 말의 기본 체고가 있기에 그들의 위치는 드러날 수밖에.
흑사자 기사단 역시, 자신들의 위치를 속이고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렌은 조금 놀랐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밤중에 행동을 취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낮이나 밤이나, 돌파는 자살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그나마 한둘이라도 살아가는 방법은 어둠을 틈타, 포위망의 칼이 정교하지 않은 순간을 노려 빠져나가는 것.
저들이 아침까지 남았다는 건, 아렌과 얘기해볼 마음이 들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이봐, 아렌. 좀 더 가까이 붙어. 놈들이 움직인다.”
더글라스가 한 걸음 아렌 앞에 나서며 말했다.
활을 가져왔었다면 그들을 좀 더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엔지 황자가 붙잡혀있는 동안에는 섣불리 활을 쏠 수도 없다.
그 사실은, 황자를 납치한 본인들이 더 잘 알 터.
수풀 멀리서 말에 타는 기사단과 광신병의 모습이 보였다.
무구를 갖추고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덮은 모습은, 교섭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결국 내린 결론이 저 건가? 자신들에게 가장 불리할 때에 막무가내인 돌격으로 생을 마감하는 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모두가 자신의 말에 탔지만, 천천히 걸어 나오는 건 흑사자 기사단에서도 혼자 뿐이었다.
‘혹시, 함정인가?’
아렌은 얼른 말에 탄 자들의 복식을 살폈다. 허수아비를 세워뒀거나, 근처에서 매수한 다른 인원을 말에 태웠거나. 갖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지만 어느 것도 현실성은 없어 보였다.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 하나는 무리와 떨어진 채, 혼자 터벅터벅 걸어왔다. 같은 흑사자 기사단 동료도, 광신병도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돌격!”
혼자서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지른 기사가, 전력 질주로 아렌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려왔다.
아렌을 보호하기 위해 특히나 더 포위망이 두터운 지점이었다. 그 시점에, 아렌은 그 기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더글라스. 응전해주겠어요?”
“젠장할, 별로 좋은 역할은 아닌데.”
투덜대면서도 검을 뽑아 앞으로 나서는 더글라스.
더글라스 또한 돌격하는 기사의 노림수를 알았다. 싫은 역할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흑사자 기사의 강맹한 검이 더글라스의 검과 맞부딪쳤다.
까라라락!
잘 벼려진 칼날이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땅 위가 아닌 말에 탄 채 펼치는 전투는, 그만큼 변수가 많았다. 두 기사 모두 요행을 바라기보다, 두 칼이 맞닿은 상태에서 승부를 짓기를 원했다.
흑사자 기사단은,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그 명성 때문에 고집스레 요행을 바라지 않았지만, 그건 실책이었다.
변수 없는 싸움이란 곧, 실력에 의해 곧바로 결판이 난다는 뜻.
더글라스의 검이 순간적으로 뒤로 미끄러졌고, 흑사자 기사단은 한순간 그의 검을 놓쳤다.
서걱!
메마른 소리와 함께 더글라스의 말이 몇 걸음 앞으로 나갔다.
흑사자 기사단의 몸은 말 위에서 잠시 흔들리다가, 이윽고 서서히 멈췄다.
기사의 머리가 잘려 투둑, 소리를 내며 땅 위로 굴렀다. 더글라스는 검에 알알이 맺힌 핏방울을 적당히 공중에 흩뿌리고 칼을 갈무리했다.
“끝냈다, 아렌.”
더글라스는 씁쓸한 듯 중얼거렸고.
“…중과부적이로군. 항복하겠다.”
뒤에 남아있던 흑사자 기사단과 광신병들은 무기를 위로 치켜든 채 앞으로 나왔다.
마치, 기사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
기사들과 광신병은, 이미 항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혼자 돌격한 기사 혼자만이 항복을 거부하고, 포위망에 돌격하기를 택한 것.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했고, 나머지도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싸우다 죽고 싶다니, 그걸 상대하는 사람은 무슨 죄야?”
실전에서 적은 베는 일 정도는 익숙하다.
하지만 죽을 곳을 찾기 위해, 일부러 덤벼드는 적을 죽이는 것은 몇 번을 겪어도 어색하다.
“그래도 여한은 없을 거예요. 대륙 최강의 검사와의 결투 후에 목숨을 잃은 거니까.”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다른 놈들은 목숨을 부지하기로 했잖아?”
“아마, 동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죠. 모조리 항복한 것보다, 사상자가 한 명이라도 더 생긴다면 중과부적이라 사로잡혔다는 변명이 가능하니까.”
물론 아렌이 보기에도 미련한 생각이라는 건 변함없다.
아렌이라면 맹세나 신념 따위는 사후 도모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아렌은 말에서 내린 채, 포박되어 끌려가는 자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흑사자 기사단 셋과 광신병 다섯. 총 여덟 명 중 셋이 중상을 입었다.
“모두 한 방에 넣지 말고 여덟 개의 독방으로 나누세요. 각자 심문할 거니까. 치료가 필요한 자에게는 최선의 치료를 아끼지 말아요.”
아렌은 손이 묶인 채 연행되는 흑사자 기사단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그렇지만, 참 대담한 결단이군.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너를 믿은 게 아니다. 네 주군인 레온나토스 황자의 인망을 믿은 겆. 이번 작전에는 분명, 그의 의사도 들어가 있겠지?”
“그야 물론이다.”
표적중 하나인 레온나토스는 굳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
이번 작전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구조만 설명했을 뿐이다.
더글라스가 옆에서 소곤거렸다.
“…이봐, 아렌. 인망이고 나발이고, 기사 놈들을 살려둬야 할 이유가 있나? 이참에 다 죽이고 엔지 황자만 구하면-”
“확실히 그러면 엔지 황자의 정보가 넘어가지도 않고, 괜히 후환을 남기지 않겠죠. 하지만 낮안개 기사단과 레온나토스 전하의 위병은 지금 일을 보게 됩니다.”
이 주변 포위에 거의 전력을 다한 위병 200인과 낮안개 기사단 40인에게 기껏 항복해온 상대의 처형장면을 보게 할 순 없었다.
“자부심이란, 저절로 생기거나 누군가가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상황을 통해 조금씩, 서서히 채워지는 것이죠. 만약 항복해온 자들을 베어 넘긴다면, 그건 레온나토스 전하를 섬기는 자로서의 자긍심에 해가 될 거예요.”
“레온나토스 전하를 섬기는 것 자체에 긍지를 가지게 해야 한다? 말은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잖아요? 아무 보증도 없이 구두 약속만으로도 저들은 항복했어요. 우리가 레온나토스 전하의 수하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내려놓은 장비를 확인하는 아렌.
그 뒤쪽에는, 여전히 말의 안장 뒤쪽에 올려져있는 둘둘 말린 멍석이 보였다.
“엔지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렌. 네놈이냐? 왜 이렇게 늦었어?”
오랫동안 말의 안장 뒤쪽에 누워있어, 멍석 안쪽은 토사물로 더러웠고 입안도 조금 씹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 새끼들은? 다 죽였나?”
“아뇨,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준다고 약조했기에, 일단 모두 잡아둔 상태입니다.”
“뭐라고? 그딴 새끼들을 무슨 이유로 살려두는 거냐! 날 짐짝 취급하고 이곳저곳 끌고 다닌 새끼들인데!”
“네. 무도한 자들이죠. 영지 안에서 양민들도 손을 대었고요. 그만한 죗값은 치르게 할 생각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죗값이 어디 있단 말이냐!”
악에 받친 엔지의 말에, 아렌은 비릿하게 웃었다.
“사실은, 있을지도 모르죠.”
*****
살아있는 물증으로서 라이안 앞에 배달될뻔한 엔지 황자는 가까스로 구출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셋의 흑사자 기사와 다섯의 광신병들의 거취 문제였다.
레온나토스가 황태자가 되어, 엔지 황자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시점에 그들을 풀어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들을 기약 없이 지하 감옥에 가둬두기만 하는 건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
아렌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
“선택하게 해드리죠. 기약 없이, 빛도 없는 감옥 속에서 기다리느냐, 산맥을 넘어 설원의 개척을 돕느냐.”
“…산맥 너머의 개척?”
“네. 유랑족이 오랫동안 살아가던 곳이죠. 충분히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에요.”
“하지만, 별로 녹록하게 들리지 않는데. 설원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고.”
“그럼, 지하감옥?”
“…”
“둘 중 한 곳이에요. 탈출할 생각만 없다면, 지하감옥에 얌전히 누워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적어도 춥진 않을 테니까.”
흑사자 기사단은 약간의 불만을 표출했지만, 사실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수련의 연속이었던 흑사자 기사단에게, 제대로 운신할 수조차 없는 지하감옥에 들어가 있으라는 건 죽음과도 맞먹는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설원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아마 기사들을 죽이기 위해 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사들을 죽이려 했다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이 아니라, 아렌조차도 지금 당장 행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양손이 결박된 기사단의 배에 단검을 푸욱, 꽂아 넣기만 하면 되니까.
“…그럼, 설원으로 정하신 거죠?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어요? 그럴 수도 없겠지만, 도망가기 없기에요?”
“우린 기사다. 한번 약조한 것이 있으면 지키는 것이 기사의 명예야. 레온나토스 황자가 황태자가 되면 우리를 풀어준다, 맞지?”
“네. 사실, 라이안 황자가 황태자가 되어도 당신들은 자유의 몸이 될 테지만요. 레온나토스 전하는 축출당할테고 라이안 황자의 눈이 이곳에 닿을 테니까.”
“그러지. 만약 최소한의 지원도 없이 설원에서 죽으라는 식으로 던져둔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그건, 걱정마시죠.”
흑사자 기사단이 무단으로 설원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일류급 검사라 해도, 고작 세 명의 힘으로 40인이나 되는 숙련병이 지키는 요새를 통과할 수는 없으니까.
설령 그곳을 통과해도, 협곡 가도 남쪽의 관문을 한 번 더 통과해야 한다.
기사의 맹세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통과할 가능성을 아렌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 너그럽기도 하군. 이렇게 귀찮게 하지 않아도, 우리를 죽이면 모두 해결되지 않나?”
“당신들이 무모하게 덤벼들었다면 그랬겠죠. 하지만 아니었고요. 살고 싶었기에 그런 것 아닌가요?”
“우리야 그랬지. 라이안 전하께의 충성심은 여전하지만, 해석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이 딱히 전하를 배신한 것도 아니니 말야. 하지만 너희들은 다르지 않나? 우릴 죽여도 살려도 상관없다면, 죽이는 게 간단할 텐데.”
“아뇨. 이래뵈도 레온나토스 전하의 진영은 ‘영리함과 자비로움’이 삶의 신조거든요. 이걸로 제법 이득을 봤죠.”
“…그게 허명이 아니었다는 건가?”
“네. 실제로도 그렇고요.”
그들은 영지 안에서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
왕의 가도 중간에 버려져있는 마차의 주인들을 참살한 것도 그들임이 거의 확실했다.
흑사자 기사들은 척박한 설원에서 나름의 죗값을 치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춥고, 가장 넓은 감옥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광신병들은 약조한 대로라면 다시 교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엔지 황자가 살아있다는, 교국 주교에게는 최고의 교섭재료와 함께.
‘…그렇게 둘 순 없지.’
처음부터, 아렌은 그들을 곱게 교국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