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아렌?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렌 옆에서 그를 호위하던 더글라스조차, 아렌의 말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렌이 소리친 어둠 너머에서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무슨,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헛소리를 따를 것 같으냐!”
“방금 목소리는 아트마 교국의 승병의 것입니까, 아니면 흑사자 기사단의 것입니까.”
“…….”
“저는 교국의 승병에게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만.”
지금 상황은 아렌 쪽에게 명백히 유리하다. 어둠 속에서 말에 탄 신속한 움직임은 무리가 있으니, 저들의 돌파에는 제약이 따른다.
반면 병사들은 창을 앞세워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가면 그만이었다.
그 사실은 포위당한 쪽도, 포위한 쪽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아렌이 훤히 드러나 있는 정답을 굳이 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잠시간의 침묵 후, 아렌 맞은 편의 어둠에서 방금과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궁금하군. 자네 말이 사실이라는 건 어떻게 증명할 거지?”
“-이봐!”
흑사자 기사단은 여지를 준 듯한 광신병에게 성을 냈지만, 아렌도 광신병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가 흑사자 기사단을 돌려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엔지 황자의 일을 함구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본인을 앞에 데려가지 못하더라도, 엔지 황자가 실은 살아있다는 소문만으로도 라이안 황자는 우리를 아주 곤란하게 하겠죠.”
“…….”
“하지만 아트마 교국의 승병들이라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정황상 전서구나 파발을 보내진 않은 듯하더군요. 외부와의 연락 수단은 모두 우리 손아귀에 있고, 또 제국을 가로질러 교국까지 보내는 연락이라니, 중간에 가로채어질 위험이 너무 큽니다.”
“…그러니, 흑사자 기사단만 선페일 영지 밖으로 못 나가면 비밀은 함구된다? 우리라면 다른가? 언제부터 우리를 그렇게 신뢰했지?”
“신뢰가 아닙니다. 당연한 결과죠. 현재 교국의 대주교가 엔지 황자의 일을 알게 되어도, 그걸 곧바로 공표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히 라이안 황자와도 나누지 않겠죠. 카드 게임에서도 강력한 카드는 곧바로 쓰지 않고, 가장 적절한 순간까지 아껴두는 것이 철칙이니까요.”
“그래봤자 대주교님께 약점이 잡힌다는 건 변함이 없군. 우리까지 죽인다면 뒤탈도 없을 텐데,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될 위협을 감수하는 것 아닌가?”
“글쎄요. 일부러 약점을 내보이는 것이 항상 독이 된다고는 볼 수 없죠.”
흑사자 기사단에겐 지금 광신병과 아렌의 대화가 꽤나 못마땅할 테지만, 당사자인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마치,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처럼.
“대주교가 그 사실을 재료삼아 교섭을 하려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같은 미묘한 시기에, 교국과 제국이 다시금 긴밀하게 연락하는 계기가 될 테니까요.”
현재 대주교의 교국 내 입지는 그리 좋지 않다. 그의 명백한 대항마인 아르테가 국경을 넘어, 제국 차기 황제후보인 레온나토스에게 몸을 의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레온나토스의 가신인 아렌이 대주교와 이야기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마치, 지금은 아르테와 동맹을 맺고 있지만 언제고 동맹을 종결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봐! 대체 뭘 그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거야!”
흑사자 기사단은 광신병과 아렌의 대화를 더는 듣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설마! 저런 말같지도 않은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건 아니겠지?”
“흥, 설마. 어차피 이 대화를 거절해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없어.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지루했을 뿐이다.”
“단순한 심심풀이였다면 그쯤 해두시지. 이미 도를 넘었어.”
“흠, 그런가? 내게는 썩 나쁘지 않은 제안으로 들리는데.”
“뭐라고?!”
“모르겠나? 이 대화를 받아들인 이상 우리 위치는 저들에게 더 드러낸 꼴이야. 이제는 무리하게 돌파해도 한두 명이나 살아갈까? 그리고, 네놈들은 그 한두 명을 누구로 할건지 이미 정해뒀겠지. 멍석으로 말린 저 황자 놈을 실은 기사로.”
“…이 자식이.”
“그렇게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이뤄야 하는 임무라면, 네놈들끼리 하도록.”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광신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그 말뜻은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소중한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싸우기에, 광신병들은 그렇게 강할 수 있었다.
이번 임무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얻지 못한 이상, 광신병에게 이곳은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곳이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광신병과 흑사자 기사단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역시.’
저들의 결속력이 약해져 있으리라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광산에서 엔지 황자를 납치하고 두 명의 광부를 죽인 사건은 은밀하게 처리했고, 다운힐 시내 한복판에서의 소동은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건이 완전히 따로 노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흑사자 기사단과 광신병, 두 집단이 각자 다른 뜻을 가지고 움직였다고 가정하면 말이 들어맞는다.
제국의 가장 북쪽까지 몰래 잠입했지만, 광신병들은 자신들의 목표조차 변변히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황.
반면 기사들은 엔지 황자를 납치해 데려간다면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두 집단 사이 균열이 갈 것이라는 추측은, 광신병들이 묘하게 싸움에 소극적이었다는 발커스, 더글라스의 보고로 확신하게 되었다.
‘조금만 등을 떠밀어주면 자기들끼리 양패구상… 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하지만, 아렌이 한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입장상 흑사자 기사단을 북부에서 내보내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엔지 황자를 살아있는 채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교국의 광신병 정도는 돌려보내도 상관 없었다.
광신병과 흑사자 기사단 사이의 미묘한 기류가, 단지 말단끼리의 사소한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균열은 아마 좀 더 윗선에서부터 내려오는 거겠지. 라이안 황자의 도움으로 대주교가 된 것까지는 좋았겠지만, 글쎄. 그 뒤에도 좋았을까?’
라이안 황자가 루카스 대주교에게 빚을 지운 듯한 이 상황.
교국의 사람들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을 일이다.
‘그 균열을, 최대한 이용한다.’
흑사자 기사단과 승병들 간의 실랑이는 더욱 요란해졌다.
어둠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소리에 집중해보면 아직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그럴수록 그들의 탈출은 더욱 멀어지고 만다.
이 경우 자포자기할 수 있는 건 임무도 실패하고, 삶에 미련도 적은 광신병들. 원래라면, 그들은 그저 전투만을 위해, 가장 요란하게 싸우며 종국엔 자신의 목숨마저 아트마에게 공양할지 몰랐다.
그렇기에 아렌이 쳐놓은 그물은 강력했다.
투항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상황에서 꽤나 잘 먹혀들어 갔다.
죽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제아무리 광신병이 전장에서 초연하더라도, 적어도 하루 더 살아있으면 하루 더 신에게 경배를 드릴 수 있다. 그만한 욕심조차 없을 리는 없다.
광신병의 마음에 아주 약간의 미혹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등 뒤를 깨끗이 맡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면. 그 균열이야말로 아렌의 가장 큰 노림수였다.
“아, 물론 제 제안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제 제안의 절대 조건은, 엔지 전하가 살아계시는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흥, 그럴 줄 알았지.”
흑사자 기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걸로 그들이 자포자기해 엔지를 죽일 가능성은 아주 조금이지만 줄어들었다. 설령 흑사자 기사단이 그리 마음먹어도 광신병이 막을 테니까.
이것으로 그들에게 할 이야기는 모두 마쳤다.
“이게 이야기의 끝입니다. 아마 날이 밝으면 다시 보게 되겠죠.”
“…물러나는 거냐? 지금, 이 순간에?”
“밤중에 목소리로 그 위치를 알고, 급습하는 건 역시 너무 치사하잖아요? 날이 밝은 후 얼굴을 맞대고 다시 말하면,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르죠.”
“…….”
그 말뜻은, 밤중에는 공격해오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흑사자 기사단은 주변을 돌아봤다.
주위를 둘러싼 횃불은 어느새 더 가까이 다가와, 고작 수십 미터 간격을 두고 빙 둘러싸 있었다.
하지만 그뿐, 더이상 간격을 좁히지는 않았다.
날이 밝으면, 분명 아렌은 그리 말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던 아렌이 문득 생각난 듯 한마디를 더 얹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방금 한 제안은 흑사자 기사단 분들께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겠네요. 항복해도 죽은 목숨, 맞서 싸워도 죽은 목숨일 테니.”
“왜, 조건이 좋으면 얌전히 항복이라도 해줄 거라 생각했나? 우리가 교국의 이 배알도 없는 놈들과 같아 보였어?”
“배알이 없는 건지 현명한 건지는 곧 알게 되겠지요.”
아렌은,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항복하시죠. 이대로 항복한다면,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자유만 빼앗겠습니다. 레온나토스 전하가 황태자가 되신다면, 다시 자유를 되찾게 해드리죠. 어떻습니까.”
“그럼 우린 죽겠군.”
흑사자 기사단은 아렌의 말을 일축했다.
“살려드린다니까, 왜 죽는다는 거죠?”
“그야 레온나토스 황자가 이기는 미래는 없을 테니까. 미래의 황제는, 오직 라이안 전하 뿐이시다.”
“그럼 더 좋네요.”
“……?”
“라이안 황자가 이긴다면 당신들이 충성을 바친 주군이 이겨서 좋고, 레온나토스 전하가 이기면 자유를 되찾아서 좋고. 음, 이거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 않았나요? 뭘 팔았던 것 같은데-”
“우산 장수?”
“아, 그거요.”
아렌과 더글라스가 허허실실 나누는 대화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밤의 무거운 공기를 타고 흑사자 기사단에까지 전해졌다.
다른 모든 수식어를 제외하고라도, 최강 기사단이라는 불변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그들의 자부심은, 지금 갈갈이 찢기고 있었다.
엔지 황자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인원을 둘로 나눠서 광신병이 날뛰게 하지 않았다면.
레온나토스의 거짓 연설을 노려서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고, 낮동안 포위망을 돌파했더라면.
지금 이 상황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나쁜 선택을 했고, 지금 이 상황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아니, 우리가 이 상황을 선택한 건가? 마치 이곳 영지에 발을 들일 때부터, 지금 상황이 예견되어 있었던 것은-’
이제 정말 레온나토스의 기척이 멀어지고 있었다.
흑사자 기사단원 한 명이 급하게 되물었다.
“잠깐만! 너, 레온나토스 황자를 섬기는 것 맞지!”
“잘 알면서 왜 물어요?”
아렌의 목소리는 이제 귀를 충분히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넌 점술로 유명했었지. 어떠냐, 레온나토스 황자는 황자가 되는 인물인가! 점쳐봤을 것 아닌가!”
물으면서도, 물어볼 것도 없는질문이라 생각했다.
용하기로는 제국 전역에 소문난 점술가인데, 그가 한 황자를 섬긴다.
당연히 그의 미래를 봤기에 그를 섬기지 않을까.
레온나토스가 아닌 다른 황자들을 섬기는 궁인이,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동시에 하는 걱정이었다.
이미 운명은 정해져 있고, 아렌은 그 미래를 본 것이라고.
아렌이 서 있는 그 곳이야말로 차기 황제와 연결된 바로 그 길이라고.
하지만 아렌의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모르는데요?”
“…몰라?”
“네. 레온나토스 전하의 미래 따위, 점쳐본 적 없어요.”
“…….”
저 말이 거짓말이라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 말을 해서 얻을 것이 없다. 황제가 되지 못할 황자 곁에 알면서도 굳이 있을 이유가 없고, 황자가 될 운명을 지닌 자라면 그것을 공표하는 것이 그 앞길에 더욱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어둠으로 시야가 차단된 지금 아렌의 목소리는 기사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마치, 조명을 최소화해 평소에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아렌의 낙일관처럼.
흑사자 기사단은 아렌이 한 말을 에누리 없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지금껏, 라이안 전하의 승리를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었는데.”
기사의 중얼거림은 수풀 속 어둠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