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더글라스의 칼에 쓰러진 기사는, 낙마한 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 한 명의 가세에,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더, 더글라스 경!”
흑사자 기사단의 누군가 중얼거렸다.
적으로 만났음에도, 기사의 이름 앞에 경을 붙인다는 건 무인으로서 더글라스에게 가진 최소한의 경의였으리라.
무의 정점에 올랐다는 증거인, 검성이라는 호칭.
그것에 가장 가까이 있는 더글라스에게, 그 정도의 존경심은 품어 마땅한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발커스 경?”
“지금 한가하게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발커스의 다급한 외침에 더글라스는 얼른 뒤돌았다.
흑사자 기사의 죽음을 확인하고 더글라스를 향해 달려드는 건 지금까지 전투에 최소한의 반격만 하며, 소극적으로만 임해왔던 교국의 광신병이었다.
흑사자 기사단의 노림수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지금까지는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지만, 흑사자 기사단을 단칼에 베어넘긴 더글라스를 보고 호승심이 생긴 것이었다.
카각!
광신병의 몽둥이와 더글라스의 검이 충돌했다.
검신의 뿌리 부분으로 충격을 충분히 줄였지만, 그럼에도 검날이 삐걱일 만큼 광신병의 힘은 위력적이었다.
날붙이가 지배하는 전장에서 굳이 무기를 둔기로 정한 건, 둔기로도 목숨을 끊기에 충분하기 때문.
‘체격에 비해 힘이 보통이 아닌데? 특수한 수련을 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약물?’
더글라스는 맞붙은 상태에서 광신병의 강함의 유래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싸움의 도중에도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땅 위였다면 더 잘 싸울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지만 말 위에서라면 그 무기로 힘들어!”
더글라스의 장검이 옆으로 누웠다.
칼의 옆면을 타고 둔기를 미끄러지는 더글라스의 검. 광신병의 둔기에는, 미끄러지는 칼날을 막아줄 막이도 없었다.
광신병은 황급히 뿌리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서걱, 하고 뼈를 자르는 메마른 소리와 함께 후두둑, 광신병의 손가락이 잘려 바닥에 숭덩숭덩 떨어져 내렸다.
“-크윽.”
물러난 광신병은 자신의 오른손을 감싸쥐었지만, 그럼에도 광신병은 아직 전의를 잃지 않았다.
더글라스 역시, 땅에 쓰러진 발커스를 챙겨야 했기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려 하지는 않았다.
더글라스는 오른쪽 손가락 네 개가 잘렸음에도 아직 전의를 잃지 않은 광신병을 보며 조금 놀랐다.
‘지금까지 소문이라면 많이 들었는데, 역시 제법 강단이 있는데? 광신병이라는 이름은 역시 허명이 아니었던 건가?’
“…발커스 경,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네, 좋군요. 앞으로 10분 정도 후면 뒷 열의 나머지도 곧 따라붙을 겁니다. 시간은 여전히 우리 편이죠.”
그리고, 그건 흑사자 기사단도 알고 있는 바였다.
더글라스의 가세로 전황을 더이상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안 기사들은, 더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머리를 북서쪽으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발커스가 다급히 외쳤다.
“저놈들이 도망을! 쫓아야 합니다, 더글라스 경!”
“허락할 수 없습니다. 어이! 거기! 쫓지 말라고 했지!”
낙마의 충격을 조금씩 이겨가며, 발커스는 조금씩 그 자리에 섰다.
“왜 쫓으면 안됩니까, 발커스 경. 그들이 만에 하나 포위망을 돌파한다면, 추적은 더욱 힘들어질 겁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벌써 한 명을 죽이고, 다른 한 명의 손가락도 잘렸습니다.”
“그들의 전투력이,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까?”
“보고에 따르면 그 외에도 두 명이 더 다쳤을 겁니다. 한 명은 목숨이 위태롭다고 보고받았고요.”
“그럼, 남은 적 인원은 최소한 여섯이겠군요.”
“발커스 경 말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겠죠.”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이지만, 여섯 명이라는 숫자 자체는 완전한 정답이었다.
“…자신들이 도망칠 수 있다고, 착각할만하죠. 운 자체는 어마어마하니까. 발버둥 치면 칠수록 자신들이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모르고.”
얕게 빠진 진흙 뻘은, 발을 뽑으려면 들수록 더 깊이 빠져들기 마련.
지금 흑사자 기사단의 도주는, 더글라스에게 그런 식으로 보였다.
“방금의 교전으로 흑사자 기사단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시간.”
“네. 발커스 경께서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지만요.”
일말의 불안이 남아있다면, 자신들의 모든 퇴로가 막혔다는 것을 안 후 기사들이 엔지 황자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라이안 황자 앞에 대령하기 위해 지금은 살려두고 있지만, 모든 임무가 끝임을 자각했을 때의 행동은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그야 될 대로 되라지.’
그리고 그 상황은, 더글라스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더글라스는 악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인도 아니다.
엔지 황자가 흑사자 기사단의 손에 죽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결과다.
흑사자 기사단이 모두 죽고, 엔지 황자까지 죽는다면 레온나토스에게 있는 큰 약점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결과이기 때문에.
황제와 레온나토스의 주도로 엔지 황자를 살려두고 있지만, 냉정히 말해 엔지 황자의 전략적 가치는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
그가 지닌 부하 역시 어느 정도 흡수했고, 애초에 실리가 아닌 의리로 엔지를 섬겼던 가신은 거의라 해도 좋을 만큼 없었다.
“자, 우선 말에 타시죠. 앞으로는 좀 더 여유로울 겁니다.”
더글라스의 말에 발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발커스도 알고 있었다.
이제 포위망은 더 많은 인력으로, 더 촘촘해질 것이다.
‘다섯 명쯤 잃을 각오를 하고 강행 돌파했더라면, 남은 인원이라도 탈출할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기사들은 광신병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싶어했고, 광신병은 그 의중을 눈치채고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이제 남은 건, 토끼처럼 몰이 당할 흑사자 기사단과 광신병들의 마지막 발악을 받아내는 것 뿐.
점점 호각소리가 잦아들었고, 더글라스가 달려왔던 수풀 너머로, 북쪽을 포위했던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여 명의 병사들과 30여 명의 낮안개 기사단.
흑사자 기사단과 광신병들이 목격했다면, 전의를 잃기 충분한 숫자였다.
*****
날이 저물고, 포위는 한밤중까지도 이어졌다.
횃불을 들고 선을 이어 늘어선 포위망은, 자신들의 위치를 훤히 알려주고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포위된 쪽의 전의를 꺾기 충분한 숫자였다.
“…젠장! 보란 듯이 횃불을 켜기는!”
“흥분하지 말라고, 불신자 양반. 그게 저놈들 목적이니까.”
“너!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나를 부르면-”
“왜, 어쩔 건데?”
어둠 속에서 흑사자 기사단과 광신병이 대치했다. 4대 5로 광신병 쪽이 한 명 더 많았지만, 광신병 중 셋은 부상자였다.
“…쳇, 그만두자고.”
“그래. 이대로 더 전력을 줄여봤자 탈출할 여력만 잃겠지.”
포위망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횃불로 자신들의 위치와 위세만을 과시할 뿐.
야음을 틈타 한 점을 돌파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하필 오늘 밤은 구름이 많아 특히 더 어두웠다.
밤중 전력 질주는 말을 타는 사람에게는 금기 중의 금기다. 말의 발목은 쉽게 상하고, 한번 발이 부러진 말은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다.
“…하나만 묻자. 너희들. 아까는 왜 전력으로 싸우지 않았지?”
흑사자 기사단이 물었다.
“이 임무는 이미 실패했어. 이제부터는 네놈들의 임무지. 그걸 거들고 말고는 우리 판단일 뿐. 물론 동맹이니 도와는 주겠지만, 희생이 필요한 일은 너희들이 먼저 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안 그런가?”
“도리라. 앞으로 목숨을 버리는 미끼도 쓰게 될 텐데, 그때에도 우리가 나서라고?”
“그게 당연한 수순 아닌가?”
“저기 이미 내일 살아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그 또한 우리 알 바 아니지.”
“어차피 이미 늦었잖아! 산 사람은 살 수 있는데, 그게 그렇게 무리한 부탁인가?”
“부탁에는 순서가 있지. 너희는 그 순서를 지키지 않았어.”
잠시 누그러들 뻔했던 분위기는 다시 삽시간에 얼어붙을 뻔했다.
“그만, 그만! 잠깐 조용히 해봐.”
광신병이 말했고, 의도를 알아챈 기사와 광신병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누구지?”
저기, 저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립니까? 들립니까?!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아직 충분히 멀지만, 목소리는 무거운 밤공기를 타고 멀리까지 날아와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이 되었다.
“…저 목소리는.”
“아는 사람인가?”
“그래. 멀리서 한번 들어본 게 전부지만.”
어딘지 앳된 목소리의 주인, 아렌은 똘똘 뭉친 스무 명의 기사단 사이에 자리한 채 어둠을 향해 외쳤다.
“어차피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낮이 되어 당신들의 위치는 발각될 겁니다! 어둠을 틈타 돌파를 시도하겠지만, 사실상 세련된 자살방법일 뿐이라는 것도 잘 아실 테고요! 당신들의 기회는 오늘 낮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밤중 소리를 내면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꼴일 뿐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둠 속의 기사들은 외칠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 왜 지금 죽이지 않는 거지?! 무사의 목숨을 조롱하는 것이 너희들의 방식인가!”
“그럴 리가요. 힘으로 우악스레 굴복시키는 건 쉽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죠. 이야기를 나누면 절충안을 찾을지 모릅니다.”
“-허, 웃기는군!”
어둠 속에서의 외침이 지금 위치를 드러낸다는 건, 아렌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의 위치를 어림짐작한 채, 두 집단은 횃불도 없이 어둠 속에서 묘한 긴장을 유지했다.
흑사자 기사단이 작게 소곤거렸다.
“저 자가 아마, 레온나토스 황자의 비서관인 점술가 아렌이다.”
“…저 작자가!”
“그래. 너희 나라의 주교와도 붙어먹은 놈이지. 원래 레온나토스 황자는 야망 없는 자였지만, 저 놈을 등용한 후 유력한 황제 후보로 등극했어.”
지금까지는 어둠이 그들의 기온과 체력을 앗아가듯 힘이 없었지만, 흑사자 기사단과 광신병의 몸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설령 레온나토스를 죽이지 못해도, 아렌을 해치운다면 주군께 나쁘지 않은 선물이 되겠지.’
‘아르테를 황자에게 연결해준 원흉. 아렌을 죽인다고 되돌릴 순 없겠지만, 그 죄를 단죄할 수는 있겠지.’
지금까지 둘로 나뉘어있던 서로의 목적이, 다시금 하나로 합쳐졌다.
그 사실을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 아렌이 어둠 속에서 외쳤다.
“아! 날 노릴 거라면 그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만전의 상태가 아닌 10명이 어떻게 해볼 숫자가 아니니까요!”
“입 닥쳐! 용건이나 빨리 뱉고 꺼져라! 원하는 게 뭐냐!”
“엔지 전하는, 지금 괜찮으십니까?”
“…….”
엔지는 멍석에 말린 채, 수풀 바닥 구석에 누워있었다.
한 자세로 오래 말려 있으면 몸에 탈이 나겠지만, 지금은 그의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일지 모른다.
“이 난리 통에도 아주 잘 자는군!”
“다행이군요. 그가 죽었다면 일이 복잡해질 뻔했는데.”
그 말을 듣고, 기사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교섭을 하려고? 지금 상황에 교섭이 가능할 것 같은가?!”
레온나토스 황자는 기사들을 밖으로 보낼 수 없다.
비록 엔지 황자 본인은 없겠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만으로도 모든 이목을 북부로 향하게 할 테니까.
기사들을 살려서 보내줄 수 없는 만큼, 어떤 조건을 내걸든 교섭은 무의미한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그런데 당신은, 흑사자 기사단입니까?!”
“그렇다면 어쩔 건가!”
“거기, 아트마 교국의 광신병은 안 계십니까?”
흑사자 기사들은 떨떠름하게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잠자코 앉아있던 광신병들은, 조금 목소리 높여서 답했다.
“여기 있다만.”
“제안할 게 있습니다!”
불안한 예감에, 흑사자 기사단은 갑옷 아래로 식은 땀을 흘렸다.
‘-설마.’
“흑사자 기사단만 다 넘긴다면! 광신병 여러분은 교국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최상급의 치료도 곁들여서 말입니다!”
“…….”
“…….”
어둠이 내려앉은 초원에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분명, 밤중 기온이 내려간 탓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