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81화 (181/227)

#181화

말안장 뒤쪽에 황자를 실은 두 기사는, 뒤쪽의 호각소리를 들으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호각소리는 좌우로 요란하게 울려퍼졌고, 소리의 포위망은 뒤쪽과 좌우에서 서서히 좁혀오는 듯했다.

기사들은 더욱 뒤쪽으로 달렸다. 이제 은폐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때, 흑사자 기사단원은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또다른 기사들을 보고 바짝 긴장해 몸을 굳혔다.

“-젠장, 증원인가?”

하지만, 그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기사는 안심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들은, 아르테를 치기 위해 먼저 북으로 향했던 승병들과 기사들이었다.

수적 열세를 보이던 차에 아군을 만나 한시름 놓았지만, 그들을 이렇게 빨리 만났다는 건 먼저 북으로 올라갔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봐, 괜찮아? 다시 보니 반갑긴 한데, 임무는-”

합류한 흑사자 기사단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거기 아르테는 없었어. 그 황자 놈도 처음부터 우릴 꾀어내기 위한 함정이었다고 아예 공표까지 하더군. 달궈진 분위기를 발판 삼아, 자신이 정식으로 아르테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무서운 놈이야.”

“…그것까지 전하께 보고드리자고. 이 황자와 함께 말야. 저 소리 들리지? 포위망을 건드려 버렸고, 저 호각 소리로 이곳 위치를 알리고 있어. 포위망이 점점 좁혀 올거다. 일단은 물러서서 태세를 정비하자.”

“…아니, 잠깐 기다려.”

합류한 흑사자 기사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도 따라붙는 놈들이 있거든. 꽤나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몇 명인지는 아직 몰라.”

“…….”

북쪽과 남쪽, 양방향에서 포위되고 있는 상황.

북쪽에서 몰래 따라붙고 있던 자들도, 남쪽의 호각 소리를 듣는다면 곧장 거리를 좁혀올 것이 뻔했다.

이전엔 엔지 황자 무리와 합류해야 했기에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포위망이 얼마나 긴지 모르니, 옆으로 도망쳐도 시간문제일 거야.”

“그럼, 싸울 수밖에 없지 않나?”

“전에는 엔지 황자가 우선이니 도망쳐야 했지만, 지금 엔지 황자는 여기 있으니까.”

멍석에 둘둘 말린 엔지 황자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냈지만, 앞에 탄 기사가 멍석을 팔꿈치로 툭툭치자 다시 잠잠해졌다.

“…그래. 이만한 숫자라면 포위망을 뚫어볼 만한 숫자지. 이대로 선페일 영지 안을 전전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일 거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뒤돌아 도망치는 것은 흑사자 기사단의 평소 모습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임무 때문에 그러지 못했는데, 이제야 적을 앞에 두고 싸울 수 있다니.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흑사자 기사단은 조용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녀석들은 왜 그래?”

뒤에 엔지 황자를 태운 기사가 뒤쪽의 승병들을 보며 소곤거렸다.

기사들과 같이 합류한 아트마의 승병들은, 기사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소리 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태도는 명백히 불만이 섞여 있었다.

“몰라. 조금 전부터 갑자기 저러더라고. 대체 뭐가 불만인 건지…”

“불만이라. 뻔하지.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자신들은 이룬 게 없고, 결국 전하께 드릴 선물만 챙겨가는 셈이니까. 놈들의 심사가 뒤틀릴 만하지.”

“…흥. 어차피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놈들이야. 전투가 벌어지면, 저 놈들은 모두 장기 말로 쓰자고.”

“어차피 지금도 다 죽어가는 놈이 하나 있잖아? 그놈부터 쓰면 되겠네.”

“따지고 보면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도 저놈들이 영지 한복판에서 난동을 부려서잖아.”

기사의 말은 틀렸다.

아트마의 승병들이 난동을 부리지 않아도, 지금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흑사자 기사단들조차 광산의 엔지에게 정체를 들키고, 레온나토스에게 서신을 보내는 걸 허용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어쨌건, 포위를 뚫는다면 어디로 할까. 남쪽? 아니면 북쪽?”

“남쪽의 포위망이라면 대강은 알 것 같아. 보병 위주의 가늘고 긴 포위망에, 기사들이 지원 오는 형태겠지. 북쪽에서 오는 자들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모르겠어.”

기사들의 발이 잠깐 멎은 동안, 북쪽과 남쪽의 포위망은 한결 기사들에 가까워진 듯했다.

“…어차피 모르는 거라면, 포위망을 굳이 두 번 뚫을 필요는 없겠지. 서쪽으로 크게 돈 다음, 얇아진 포위망을 단숨에 돌파하고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꽤 저항이 심할 거야. 엔지 황자를 최우선으로 삼아.”

최악의 경우엔 기사들을 미끼로 한둘 던져가면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흑사자 기사단은 육체와 정신 모두 극한으로 단련되어 있다.

임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준비도 되어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죽는 것은 승병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이어야 했다.

“자, 이야기 들었지? 얼른 가자고.”

“…….”

기사들이 말고삐를 고쳐잡았고, 승병들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말없는 그들의 눈은, 이미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

흑사자 기사단을 남쪽에서부터 포위하는 레온나토스의 위병 100여 명과 열 명의 낮안개 기사단.

하지만 다섯 명의 기사단은 왕의 가도 기준 동쪽 부근을 지키고 있었고, 지금쯤 어디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흑사자 가시단의 북쪽에서도 아군이 포위를 좁혀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록 포위망을 세워뒀지만, 정보 면에서는 확실한 열세.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는 생각했다.

‘…놈들이라면 어떻게 할까. 북쪽으로 도망쳐 재정비를 할까? 아니면, 무리를 해서 남부 포위망을 뚫을까. 포위망을 뚫는다면 아마 취약한 옆을 노리겠지만.’

직선으로 얇게 퍼져있던 남쪽의 포위망은, 지금 흑사자 기사단을 목격한 호각 소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말리고 있었다.

그 간격이 촘촘하고 두터워지는 만큼, 감싸는 범위는 좁았다.

포위망이 취약한 동쪽이나 서쪽을 돌파하면, 그 뒤 남부로의 질주는 쉬웠다.

“놈들이 북쪽으로 간다면, 그냥 내버려 두면 돼. 점점 고립되어갈 뿐일 테니. 지금 경계해야 하는 건, 놈들이 포위를 뚫고 남부로 향하는 거야.”

발커스는 자신을 포함한 기사단 다섯으로 취약한 양옆의 전선을 보완하기로 했다.

다만, 동쪽과 서쪽, 어느 쪽을 노릴지는 양자택일.

“-서쪽 포위망을 지원한다. 동쪽은 나머지 기사단이 보완해줄거야.”

발커스는 흑사자 기사단이 동쪽보다 서쪽을 돌파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봤다.

포위망의 동쪽에는 왕의 가도가 있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길인 만큼, 그곳의 경비가 가장 삼엄했다. 흑사자 기사단으로서는 피하고 싶을 터.

발커스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위병의 포위망보다 훨씬 서북쪽으로 달렸을 때, 선두를 달리던 기사가 외쳤다.

“전방! 말에 탄 10명! 아군은 아닙니다!”

“열 명?! 생각보다 많은데!”

발커스가 받은 보고는, 본대는 연설중인 레온나토스에게 오고 소수만이 남하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설마, 북으로 향한 본대가 어떤 행동도 포기하고 곧바로 합류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일부만 내려보냈는데도 저 숫자라면, 최소한 스무 명 이상이었던 건가? 대체 아트마교 주교를 얼마나 죽이고 싶었던 거야!’

당장 자들을 막아야 하는 건, 낮안개 기사단 다섯이 전부였다.

위병들은 말에 타고 있지 않다. 서쪽 포위망도 서서히 좁혀오고는 있지만, 합류가 늦어지면 이대로 각개격파 당할 뿐이다.

‘놈들은 이미 돌파할 생각이야.’

“호각을 불어!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춘다!”

“네? 우리로만요?!”

“단장님이 언젠가는 우릴 전부 죽일 줄 알았어요!”

“시끄러, 자식들아! 잊었나 본데 나도 같이 가는 거거든?”

삐익! 삐익! 삐익!

긴 호각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졌다. 포위망을 좁히던 중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였다. 이제 위병들의 포위망은 한층 더 이쪽을 향해 다가올 것이다.

“적과 정면으로 맞붙으려 하지 마! 시간만 끌면 되니까!”

“단장님이 말 안 해도 그럴 거거든요?”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잠시 입씨름을 한 후.

기사단의 각 첨단이 맞붙었다.

*****

낮안개 기사단의 목적은 원군이 올 때까지 그들을 견제하는 것.

하지만 마차에 실어두었던 무구로 중무장을 한 흑사자 기사단은, 낮안개 기사단을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신속한 지원을 위해 상대적으로 장비가 가벼운 낮안개 기사단은 흑사자 기사단의 전진에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모두 버텨! 말의 다리를 노려라!”

“우리는 가만 있을 것 같냐!”

흑사자 기사가 횡으로 휘두른 대검을, 고개를 숙여 가까스로 피해낸 발커스.

지금 상황에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뒤쪽의 광신병 다섯은 지금 거의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비록 그들이 무기가 둔기이고, 말 위에서 다루기에는 짧음에도 그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뭔가를 노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서로 갈등이라도 있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서로 다른 두 부대가 섞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목적이 각기 다른 부대일수록 더 그렇다.

처음엔 광신병과 흑사자 기사단의 목적이 같았지만, 엔지 황자를 포획하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목표가 생겼고, 그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다.

전투에 가담하는 시늉만 하는 광신병들을 보며 혀를 차면서도, 흑사자 기사들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열심이었다.

“여기 단장 발커스가 있다!”

“불꽃의 기사라니, 그딴 별명이 낯뜨겁지도 않냐!”

‘…거 보라지.’

항상 반쯤 농담 삼아 자신을 치켜세우는 단원들을 흘깃 바라본 발커스.

흑사자 기사단의 반응이 더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렇게 반응해주니 너무 고마운데?”

그 직후, 검과 검이 맞닿았다.

낮안개 기사단은 제국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그 명성은 실력보다 레온나토스를 향한 충성심과 결속력으로 얻어낸 것.

하지만 낮안개 기사단의 실력 또한 대륙 어느 집단과 비교해도 그리 모자라지 않다.

비록 최고 중의 최고만이 모인다는 흑사자 기사단 대원과의 일대일에서, 낮안개 기사단 단장 발커스는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단장님! 뒤에!”

“큭!”

하지만 동시에 둘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부하의 다급한 외침에 뒤에서 날아온 칼을 팔꿈치 쪽 완갑으로 막았지만, 그 반동으로 말에서 떨어지고 만 발커스.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낙마의 충격으로 잠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불꽃의 기사? 그런 낯 뜨거운 별명도 이제 끝이다!”

땅 아래로 내리꽂힌 칼날을 몸을 굴러 피한 발커스.

부하들이 달려들어 시간을 벌어줬지만, 말에서 떨어진 이상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그때.

북쪽에서 말에 탄 기사 한 명이 달려왔다.

“뭐야, 저 놈은.”

“우리 뒤를 계속 따라다녔던 놈인가?”

“고작 한 명이? 북쪽으로 가도 괜찮았을 뻔했군.”

기사는 고작 한 명이었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달려왔다.

낮안개 기사단을 설렁설렁 대응하고 있는 광신병들에게 맡긴 다음, 흑사자 기사단 한 명이 대응하기 위해 나섰다.

일대일로, 자신들을 베어넘길 수 있는 기사는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만했다.

“이봐! 시간 아까우니까 얼른-”

흑사자 기사단 역시 진심으로 응대했지만, 흑사자 기사의 대검은 물 흐르는 듯한 대응에 빗겨 갔다.

달려오던 기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그와 응전했던 흑사자 기사는 관성으로 조금 더 달려간 후,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들키지 않게 미행하래서 거리를 두는 데만 신경 썼는데, 벌써 이 꼴일 줄이야.”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일격에 베어넘긴 기사는, 레온나토스의 근위기사이자, 검성의 반열에 오를 거라 확실시되는 기사, 더글라스였다.

“-더, 더글라스?”

지금, 힘의 무게추는 확실하게 기울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