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포위망이다.”
말 뒷안장에 멍석으로 말아놓은 황자를 실은 두 기사는, 앞쪽에서 느껴진 기척에 남쪽으로 향하던 말머리를 멈춰 세워야 했다.
일행의 여덟은 레온나토스의 함정에 기꺼이 어울려주기로 했지만, 나머지 둘의 임무는 어떻게든 황자를 남쪽 끝에 있는 라이안 황자에게 전달하는 것.
황제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공표했던 엔지 황자가, 사실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건 황제에게 지울 수 없는 큰 허물이 된다.
그걸 밝혀낸 라이안 황자가 곧바로 황태자에 책봉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큰 스캔들.
“…옆길도 틀렸는데? 이 자식들, 내려가기 쉬운 길목은 죄다 막아놓은 것 아냐?”
이미 왕의 가도가 아닌 외진 길만 골라서 나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말이 다치지 않고 통과할만한 길목은 한정적이었고, 그런 곳마다 병사들이 어김없이 틀어막고 있었다.
주변에는 변변한 마을이나 시설도 없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선 대륙에서 가장 잘 닦인 도로에 들어가는 왕의 가도가 있다.
굳이 험한 길만 골라서 내려가는 사람이라는 뜻은, 이미 시작부터 뭔가 걸리는 지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젠장, 마음 같아선 다 베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홀몸이라면 말도 없는 병사들 따위, 베어버리고 달아나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한 명의 뒷안장에는 화물이 실려 있었고, 하물며 그 화물은 죽으면 안되는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속도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을 베어버리면 곧바로 말에 탄 추적자들이 따라붙을 터였다.
“생각보다 대응이 빠르군. 역시 아르테인가 하는 여자는 함정이었던 건가? 이래서야 북쪽으로 간 여덟 명도 고생하겠군.”
“그렇게 한가하게 평가하고 있을 때야? 시간을 끌면 끌수록 영지 경계는 더욱 봉쇄될 거야. 포위망을 뚫고 갈 거라면 지금밖에 없다고.”
“…설령 그 방법을 택한다 하더라도 두 명으로는 무리야. 적어도 세 명은 더 붙어야 안심할 수 있지.”
“세 명이라. 영경의 감시가 이 정도면, 북쪽으로 간 여덟 명의 운명도 대충 예상은 가는데.”
“차라리 남쪽이 아니라, 동부나 서부 전선으로 크게 돌아가는 건?”
“선페일 영지를 가로로 크게 횡단한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감시의 눈길은 조금 약해지겠지만, 그 대신 남쪽으로 빠지는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선페일 영지에서 보내게 된다.
말 뒷안장에 사람만 한 무언가를 둘둘 말아놓은 화물을 실은, 건장한 체격의 긴장한 남자 두 명.
문제 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우선은, 기다려본다.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만약 그 사이 레온나토스의 연설회장에 찾아간 자들이 돌아온다면, 강행돌파도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
뒤따를 추격조차 한 명씩 시간끌기로 버린다면 그 사이 충분히 황도에 다다를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증원이 도착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지만.
어느 쪽이 더 빠른지, 인내의 시간이 흘러갔다.
*****
레온나토스의 연설장에 갔었던 아르테 추격조는, 무모한 레온나토스 암살을 단념하고 남으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추격조가 두 조로 나뉜 형국이 되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이 전시라면 한번 입은 손해는 면밀하여 반격의 양분으로 삼지만, 지금 그들의 입장은 정체가 거의 드러난 추격자일 뿐.
“…누군가 따라붙고 있어.”
흑사자 기사단원 하나가 중얼거렸다.
다른 기사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교국의 승병들 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교국의 승병에게 미행을 간파하는 능력은 없다.
전장에서는 당해낼 자 없는 거친 전사지만, 전투 외의 부분에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흑사자 기사단은 전투와 임무수행에 필요한 것이라면 대부분은 익힌 전쟁 기계였다.
“상대도 꽤나 능숙한 놈인 모양이지만, 바람이 뒤쪽에서 불어오는 건 행운이야. 이 녀석이 냄새를 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암말인가?”
발정기의 수컷 말은 1km 떨어진 곳에 있는 암말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기사는 자신의 애마가 보인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추격이라, 처리할까?”
“아니.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어. 먼저 간 두 사람과도 합류해야 하고. 오히려 더 달려서 추격을 떨어뜨릴 생각을 하는 게 나을 거야.”
“젠장. 영 익숙지 않은데?”
제국 최강으로 공공연히 거론되는 흑사자 기사단이다.
뒤따라오는 적을 쳐부수지 않고 그대로 뿌리치고 도망가는 건 그들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행위였다.
뒤에서 조심스레 추적하는 적 따위, 잠깐 말머리만 돌리면 곧 만나게 될 테지만 지금 급한 건 엔지 황자를 붙잡고 있는 두 명과의 합류였다.
“그 정도는 참아. 이참에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아르테나 레온나토스를 노리는 걸 포기한 이상, 우리의 제1 목표는 엔지 황자를 라이안 전하 앞에 대령하는 것, 그것뿐이야.”
“그래. 엔지 황자라면, 라이안 전하께 아르테에 버금가는 선물이 되겠지.”
“…….”
기사들의 대화를, 광신병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교국과 자신들이 따르는 로이터 대주교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엔지 황자 따위, 교국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르테를 잡지 못하는 이상 자신들이 기껏 제국 국경을 넘은 것은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젠장. 싸우다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치료라도 할 걸 그랬나.”
말 안장 위에 힘겹게 올라탄 광신병의 옷 안쪽으로, 검붉은 반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송진으로 응급처치한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빠르든 늦든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치료를 하지 않았다.
이미 치료의 적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의사를 찾는다 해도 늦었다.
기사들은 중상의 광신병을 신경도 쓰지 않았고, 같은 광신병들만이 부상한 동료를 챙겼다.
“이봐, 괜찮아? 힘들면 조금 쉬었다 갈까?”
“추격이 있다며, 쉬기는 무슨. 걱정마. 이제는 별로 아프지도 않으니까. 미끼가 필요하다면 날 먼저 쓰면 될 테니, 싸우지 않아서 좋네.”
“…….”
승병들에겐 의미가 없는 행군이었다. 차라리 전과 같이 기사들과 티격태격했을 때가 오히려 더 좋았다.
두 쌍둥이 중 한쪽만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갈등과 불만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
“단장님, ‘불꽃의 기사’라는 별명을 얻으면 무슨 기분입니까?”
“이제는 다르게 불리던데? ‘불꽃의 기사’가 좀 심심했던지, 기사단 이름을 엮어서 ‘불꽃의 안개’라 부르더라고.”
“불꽃의 안개! 그거 좋은데!”
오랫동안 봐왔던 동료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낮안개 기사단 단장이자, 최근 제국의 위기를 구한 영웅인 발커스는 부하들의 짓궂은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단장이라 해봤자, 모두 비슷한 시기에 훈련받고 기사가 된 동료들.
낮안개 기사단의 구조는 확고한 수직관계보다는, 긴밀한 수평 관계에 더 가까웠다.
“놀리는 건 상관없는데, 지나가는 티끌 하나라도 허투루 통과시켜선 안돼!”
“단장님은. 티끌 하나를 어떻게 안 놓칩니까?”
발커스에게 대원이 퉁명스레 답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초원의 지평선을 보고 있었다.
초원의 수풀은 성인의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기어서 온다면 지나가지 못할 것 없지만, 걸어서 북부를 지나간다는 건 말이 안된다.
특히 사람 하나를 운반하는 만큼 말은 꼭 필요하다.
“…그런데 단장님. 흑사자 기사단과 싸워본 적 있습니까?”
“…검술대회 때, 본선 8회전에서 한번.”
“아, 그랬었죠. 3년 전이었던가요. 그때는 이기셨죠.”
“그래. 연습용 검으로 간신히.”
날이 없는 목검으로 이루어진 경기는 칼날이 몸에 닿기만 해도 점수를 인정한다.
체격과 힘만큼, 빠른 몸놀림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실전일수록 체격의 차이는 극복하기 힘들다.
힘이 셀수록 더 파괴력이 크고 긴 무기를 들 수 있다.
갑옷 역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무거운 것을 갖춰 입어 방어력을 갖출 수 있다.
체격이 곧 실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재능에 같은 노력을 했다면 체격이 큰 쪽이 유리하다.
그리고, 흑사자 기사단은 입단조건으로 체격이 큰 사람만 골라서 뽑는다.
반면 발커스는 건장한 편이지만, 기사들 사이에서는 딱히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체형.
흑사자 기사단 일반 단원과의 대전에서, 발커스는 단장의 오기로 겨우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전이었다면 달랐을지도.’
자신의 실력에는 객관적인 자부심이 있는 발커스였다. 자신에게 객관적이니 더더욱, 타인에게도 객관적이었다.
“만약 놈들을 발견해도 굳이 상대하려 들지 마. 여기 있는 건 다섯 명 뿐이니까.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거리를 넓혀서, 포위망을 만들어 놈들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거야. 충분한 수적 우위를 가져온 후에 공격해도 충분해.”
“…썩 뒷맛이 깔끔한 방법은 아니네요.”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다면,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실컷 해. 지금은 임무가 우선이니까.”
왕의 가도 한복판에서, 발커스를 포함한 낮 안개 기사단 다섯은 양옆의 평원을 빈틈없이 감시했다.
적들도 생각이 있다면, 왕의 가도로 내려가지는 않을 터.
그들의 실질적인 진짜 목적은, 어디선가 원군 요청이 오면 그쪽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병사들만으로는 흑사자 기사단의 돌파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예상되는 인원수는 다섯에서 스무 명.
최악의 경우 스무 명이라면, 아래에 내려와 있는 열 명의 낮 안개 기사단으로도 시간 끌기가 고작일 수 있었다.
‘…불꽃의 안개라. 내 실력으로 얻은 이명도 아닌데.’
발커스는 지금 이 자리에 아렌이 없어 아쉬웠다.
그가 전투에 도움이 되는 면은 거의 없지만, 왠지 그가 있으면 어떤 전투에서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수평적인 관계의 기사단원에게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는 발커스의 진심이었다.
그때.
삐익!
-삐이익!
왕의 가도 왼편에서 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포위망에서, 뭔가 발견했을 때의 신호였다.
“자, 가자.”
조금씩 불거져오는 불안감을 애써 모른척하면서, 발커스는 말의 고삐를 고쳐잡았다.
*****
“여기다! 분명 저 놈들이야!”
“젠장, 어서 휘슬을 불어!”
삐이익!
병사는 다시금 호각을 불었다.
허리 높이의 풀숲에 웅크리고 있던 병사는, 엔지 황자를 멍석으로 말아 데리고 있는 두 기사들에게 가까스로 들키지 않았다.
기사들은 멋모르고 병사들에게 접근했고, 표적임을 확신한 병사들은 곧바로 호각을 불렀다.
그제서야 포위망을 파악한 기사들은 말머리를 돌렸다.
적의 숫자가 몇인지 무성한 풀숲으로 확인할 수 없었고, 또 뒤에 엔지 황자가 있는 한 싸움은 가능한 피해야 했다.
병사는 병사들대로 말이 없어서 그들을 쫓을 수 없었다.
삐익!
삐이익!
양옆으로 호각 소리가 번지듯 퍼져나갔다.
병사들의 호각을 들은 감시단원들이 다시 자신의 호각을 분 것이다.
봉화의 원리처럼, 기사들과 원군은 소리가 가장 먼저 들린 곳으로 자연스레 모일 것이다.
삐이익! 삐이익!
이쪽이 소리의 진원지라고 주장하는 긴 두 번의 호각.
이제 곧 원군이 도착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병사들은 잠시 잊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군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