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다운힐 중앙 광장에는 연단이 들어서고 있었다.
벌써부터 주위엔 보기 드문 연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조금 뒤면 더 늘어날 예정이었다.
태양교에 등장한 성인이, 자신의 새로운 가신으로 들어갔다는 거짓연설을 준비 중인 레온나토스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지만, 시내 한복판에서 일을 벌이려 하다니. 자칫 큰 사고가 날지도 몰라.”
“네. 그리고 그 혼란은, 그 사이에 있을 적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겠죠. 거절할 수 없을 만큼.”
“…….”
정작 아렌의 걱정은 레온나토스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무리 나중에 거짓이라고 밝히겠지만, 북부의 거점도시에서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하는 연설이었다.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테지만, 이만큼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이 아니면 저 의심 많고 노련한 사냥감을 잡을 수 없다.
“그리고, 광신병들은 도망친 교국의 주교가 이곳에 없다는 걸 안 순간 목적을 잃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목표는 아트마의 주교이지, 전하가 아니니까요.”
“그 점은 안심이로군. 망명한 주교는 저 멀리, 동부 끝에 테오드릭 형님과 같이 있으니. 테오 형님의 군세는 나보다도 더 강대하지. 제국 안에 교국의 병력이 얼마만큼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오드릭 형님을 건드릴 수는 없겠지. 오히려 흑사자 기사단이 더욱 위험해.”
“네. 그들에겐 교국의 도망친 주교보다, 레온나토스 전하와 엔지 전하가 훨씬 더 중요할 테니까요.”
라이안이 직접 레온나토스 암살을 명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굳이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라이안은 유력한 황태자 후보다. 위험한 다리는 항상 열세인 쪽이 먼저 건너게 되니까.
하지만, 아트마 교의 주교가 이곳에 없다 하더라도 레온나토스와 손을 잡았다는 정황이 드러난 이상 기사들이 라이안 황자에 대한 과잉충성으로 레온나토스를 노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 점에서 불안 요소가 있다면, 저희는 모든 병력을 호위로 동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흑사자 기사단이 여기 오지는 않겠죠. 이미 엔지 전하는 확보했으니, 몇 명은 그대로 교국으로 넘어가려 할 테니까요.”
이미 레온나토스는 엔지 제2 황자가 실종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광산 근처 수풀에서 발견된 두 광부의 시체와 함께.
완전히 제압된 황자를 교국까지 끌고 가는 데는 한두 명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영지 경계를 막는 데에는 훨씬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아래로 향하는 큰 도로는 왕의 가도 하나 뿐이지만, 왕의 가도 주변으로는 널찍한 평야 지대가 대부분이다.
멀찍이 돌아갈 가능성을 고려해, 선페일 영지의 병사 대부분과 레온나토스의 근위병 50, 낮안개 기사단 10명은 아래쪽에 포위망을 구축했다.
현재 다운힐 시내에 남은 병력은 태양교의 무승 20명과 근위병 150명, 낮안개 기사단 30여 명이었다.
적의 정확한 규모를 모르는 이상 이만한 병력만 황자 주위에 남긴 것은 큰 모험이다.
“…전하. 역시 아래로 내려보낸 병력을 불러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엔지 황자가 라이안 황자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레온나토스 전하가 무사한 것입니다. 이만한 인원으로는 역시 불안합니다.”
“-아니. 적들이 해볼만하다 생각할수록, 이곳과 난 매력적인 먹이로 보이겠지. 자네들에게만 미끼 역을 맡길 수 있나.”
“…부디 잡아먹히지나 마십시오.”
아렌은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들의 모습은 한둘 정도 뿐. 그 외에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적들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기사들에게는 태양교의 사제복을 입혔다. 하지만 사소한 단점이 있었는데, 주변 누가 낮안개 기사단인지 레온나토스와 아렌조차 모른다는 점이었다.
‘…주변에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것, 맞겠지?’
태양교의 무승 또한 보통의 정규병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
하지만, 아트마 교의 광신병이나 제국 최정예인 흑사자 기사단에 비할 수는 없다.
그들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레온나토스에게 덤벼든다면, 제대로 된 방패는 오직 낮안개 기사단만이 가능할 터.
“슬슬, 연단이 다 만들어진 모양이군, 아렌.”
“네. 이게 함정이라는 건 듣자마자 알았겠지만, 교국 사제가 이곳에 없다는 걸 그들도 알겠지요.”
레온나토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놈들의 반응이 어떨지, 벌써 기대되는군.”
*****
완성된 연단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이봐, 시작된다!”
태양교 사제복을 입은 무승들이 연단 주변을 빼곡하게 지켰고, 레온나토스는 침착하게 연단 위에 올라섰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흑사자 기사단 셋과 아트마의 광신병 다섯.
여덟 명 중 광신병 둘은 이미 부상을 당했다. 한 명은 지금 서 있는 것조차 신기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아무리 송진을 굳혀 급히 상처를 막아뒀다지만, 자신들의 실력에는 무한한 자신감이 있는 흑사자 기사단조차 광신병들의 근성에는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교국에는 저런 병사만 천 명이 넘는다고?’
병력의 규모로는 절대 제국을 넘볼 수 없지만, 항상 교국을 가까운 곳의 선인장처럼 어려워하는 이유였다.
단상은 성인 남자 키만큼 높이 있었지만, 활을 쏠만한 여력은 나오지 않았다. 활을 쏘는 것처럼 큰 행동을 하면 금방 옆 사람의 주의를 끌테고, 주변 이목을 피할만한 건물의 창가나 옥상은 이미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다.
“…묘하군. 주변에 기사들이 너무 없어.”
“전부 황자 주변에 몰려있는 것 아냐? 저기 옷 빼입은 놈들 말야.”
“태양교로? 그럴 수도 있지. 혹은 평상복을 입고 이 주변을 돌고 있거나.”
흑사자 기사단이 여러 상황을 가늠하는 동안, 레온나토스는 어느덧 연단에 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이렇게 모여준 여러분에게는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러분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 있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단 주변에는 즐거움의 웅성거림이 남아있었지만, 뜻모를 황자의 사과에 지금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사과할 일은 다름이 아니다. 태양교의 성인이 나타났다는 말이나, 그가 내 휘하에 들어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한 거짓말이었다.”
이것이 즐거운 이벤트인 줄로만 철석같이 알고 있던 사람들은, 레온나토스의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리고 침묵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황자의 연설을 노려보듯 지켜보는 흑사자 기사단.
“최근 내게 연락해온 인물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저 멀리 아트마 교국의 주교였던 자다. 지금은 내부의 알력 다툼으로 부정하게 축출되어, 제국에 망명을 요청했지. 그와 동시에 그를 쫓아 제국 땅을 밟은 교국의 추적자들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
좌중은 최근 있었던 불온한 사건들을 기억했다. 다운힐 시내 한복판에서 태양교의 무승이 죽은 것이나, 광부 둘의 시체가 수풀에서 발견된 것까지.
“이건 그들에게 보내는 선전포고다! 이곳에 그대들이 원하는 자는 없으니, 그대로 돌아가거나, 혹은 날 상대하거나! 이곳에서 더이상의 행패는 용납하지 못한다! 더불어, 아트마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무도한 지금 아트마 주교를 축출할 것임을 정식으로 선포한다!”
벙쪄있던 관중들은, 다시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다른 내용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황자의 당당한 선포는 그들에게 좋은 요깃거리였다.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리고 숨어서 듣고 있던 흑사자 기사단의 생각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아르테가 여기 없다고?”
“그 말 자체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
“아니. 황자 본인이 모습을 드러낸 자리야. 이곳까지 도움을 구하러 온 자가 황자만 내세우고 혼자 숨는 건 말이 안돼.”
“그것조차, 우리를 속이기 위한 방편일 수 있지.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흑사자 기사단이 저마다 의견이 분분할 때쯤.
“…시끄러. 젠장할, 아르테 그년은 이곳에 없어.”
사실을 눈치챈 승병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그년이 여기 있었다면,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다 눈치챘을 테니까.”
“…그렇군, 빌어먹을.”
기사들은 그렇다 쳐도, 아르테를 오래 봐온 승병들은 일찍이 눈치챘어야 했다.
타국에서의 오랜 임무가 영향이 있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관중들 사이 숨어있는 흑사자 기사단과 광신병이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르테가 이곳에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젠장. 헛걸음했나.”
광신병들은 그대로 광장에서 뒤돌아 나갈 채비를 했다.
마침 레온나토스의 연설도 끝나, 모인 관중들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은 돌아갈 거냐?”
“보아하니 다른 곳에 몸을 의탁한 모양이니, 이 근방으로도 안 오겠지. 당장 여기 있을 필요는 없어.”
“…젠장.”
흑사자 기사는 혀를 찼다. 이제 아쉬운 건 광신병이 아니라 기사들이었다.
비록 아르테가 여기에 없지만, 정황상 그들과 손을 잡은 건 확실한 레온나토스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
라이안 황자의 걸림돌이 될만한 거의 유일한 인물. 기사 다섯의 목숨으로 레온나토스 한 명을 없앨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포기하지. 우리도 돌아간다.”
흑사자 기사가 다섯 명만 있었어도 시도해 볼만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작 다섯 명으로는, 중과부적이다.
“괜히 시간만 허비했어. 얼른 내려가서 황자 운송이나 돕자고.”
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리를 지어서 한 방향으로 가면 역시 의심받으니, 세네 명씩 흩어진 것.
기사들은 태연한 얼굴로 광장을 빠져나갔다. 승병들은 긴장과 이교도에 대한 혐오감을 모두 숨기지 못했지만, 여기 모인 관중들 모두 뜻밖의 사건에 약간씩 고양되어 있어 티가 나지 않았다.
-퍽!
“아야!”
그때, 허름한 차림의 아이가 승병과 부딪쳐 바닥에 쓰러졌다.
“조심해라, 꼬마야.”
퉁명스레 내뱉은 승병은, 그대로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쪽도 조심하셔야죠.”
넘어졌던 소년, 아렌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조용히 일어섰다.
까딱.
그리고, 방금 부딪친 광신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렌의 신호를 보고, 사복 차림의 기사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몰래 추적했다.
*****
“…그런데 아렌, 할 수 있다고 하니 맡기긴 했는데, 그들이 범인인 건 어떻게 알았지? 흑사자 기사단이라면 혹시나 가능할지 모르지만, 광신병을 본 적도 없을 텐데.”
속마음을 읽어서 알았다, 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조금씩, 점괘가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아, 하긴. 설원에서도 눈폭풍이 치는 걸 예견했다면서? 자네의 점괘가 돌아오는 건 기쁜 일이야.”
“네, 감사합니다. 비록 아직 전과 같지는 않지만요.”
상황은 여전히 아렌과 레온나토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방금 그들을 모조리 미행해도, 엔지 황자가 영지 경계를 넘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아렌은 초조하게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잘해. 발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