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아렌과 레온나토스가 이틀에 걸쳐 협곡 가도를 통과했을 때, 가도의 남쪽 입구에는 이미 인부들과 태양교의 무승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인부들이 나와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태양교의 무승은 조금 뜬금없었다.
‘…무승들이 기다리고 있어? 왜지?’
“…황자 나리. 괜찮겠나? 공사는 계속 진행하면 될까?”
“그래. 지금 산맥 북쪽은 루카스 형님이 대신 맡아주고 계시지. 형님이라면 나보다 더 잘할 테니, 형님이 하는 말을 내가 하는 말이라 생각하게.”
“공사만 신경 쓰면 된다지만, 정말 괜찮나? 보아하니 아래에서 깽판 치는 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라던데?”
“그래서 그걸 해결하러 왔잖나?”
광부장은 완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나토스는 곧바로 기다리고 있던 무승에게 지금 상황을 들었다.
그 무승은, 다운힐 시내에서 처음 승병들과 맞닥뜨린 그 무승 중 하나였다.
“…처음엔 수상한 사람이 있으니 신원을 확인하고 주의를 주는 정도에 그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원의 증명을 부탁하니 갑자기 날뛰기 시작하더군요. 창을 가지고 있었지만, 놈들은 동료 두 명의 머리를 박살 내고 그대로 도주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잠깐, 머리가 박살이 났다고요? 무기는 뭐였죠?”
무승의 말을 잠깐 가로챈 아렌이 물었다.
“무기는, 몽둥이에 쇠줄을 감은 듯한 둔기였습니다.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적합한 길이였죠.”
“…그렇군요.”
레온나토스와 아렌은 머리를 맞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생각하나, 아렌.”
“흑사자 기사단의 무기는 아니로군요. 그들이 둔기를 쓴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낯선 무기를 든 것일 수도 있어. 저런 무기는 어느 대장간에서든 금방 만들 테니까.”
“그건 평범한 검을 써도 마찬가지입니다. 둔기보다, 오히려 어느 대장간에서나 파는 평범한 검을 사다 쓰는 것이 정체를 특정하기 더 어렵겠죠.”
“…그렇군, 자네 말이 맞아.”
아렌은 다시 태양교의 무승에게 물었다.
“그 외에 또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저와 제 동료들도 반격을 했습니다. 두 명이 창에 찔렸고, 한 명은 중상이 틀림없을 만큼 깊이 찔렸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저희도 나름대로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만, 동료 두 명이 당하는걸 보고서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수적으로도 상대가 우위였고, 아마 실력도 그럴테죠.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5대 3의 숫자. 심지어 다섯 명이 처음의 추측대로 흑사자 기사단이라면, 태양교의 무승 세 명으로는 어림도 없다. 도리어 반격으로 둘을 부상입힌 것이 대견할 정도.
레온나토스는 다시 아렌에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창에 찔리고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고? 흑사자 기사단에 그런 특기가 있었나?”
“제가 알기로도 아닙니다. 다른 부대라면 또 모르지만.”
다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우는 것으로 악명높은 부대를, 아렌은 알고 있었다.
그 부대가 먼저 보고받은 흑사자 기사단과 동떨어져 있다면 웃어넘기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먼 추측도 아니었다.
“아렌, 자네도 같은 생각인가?”
“네, 그런 것 같군요. 전하와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교국의 특산물이 상인도 없이 제국 북부까지 제 발로 걸어들어왔군요.”
대륙 전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아트마 교국의 정예병은, 신앙과 맹신이라는 갑옷을 둘러 창칼에 찔려도 멈추지 않는 불굴의 병사들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을, 교국 외의 다른 나라들은 ‘광신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
“이봐, 황자는?”
“방금 막 말 뒤에 실어놨어.”
제2 황자 엔지는 변변한 저항조차 못한 채 기사들에게 붙잡혔다.
기절한 채 입을 틀어막히고, 손발이 묶인 채 멍석으로 둘둘 말아두어 설령 정신을 차린다 해도 말 뒤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전부일 터였다.
광산을 나오던 길에 어수선해서 밖을 나와본 광부 두 명과 마주쳐, 기사들은 그들까지 처리해야만 했다.
근처의 수풀에 던져두기만 했으니 발견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
“…가능한 살인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지.”
“어차피 이제 와서 조용히 지나가기는 다 틀렸어. 광산의 시체도 저 광신도 놈들의 혐의로 돌아가겠지.”
“다들 언제까지고 딴사람 일처럼 굴 거야? 저놈들이 잡히면, 우리라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젠장, 왜 저딴 놈들과 발을 맞춰야 하는 거야. 할 줄 아는 건 살인뿐인 놈들을.”
기사들은 툴툴대면서, 미리 지정해둔 집합 장소로 향했다.
아트마 교의 승병들이 지금 영지 내에 수배 중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집합 장소에 그들이 순순히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들 후드를 벗어. 그 놈들과 같은 차림이면, 자칫 우리가 괜한 오해를 사겠어.”
“…오해라. 실은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선페일 영지의 중부, 왕의 길에서 조금 떨어진 갈대밭이 그들이 지정한 집합장소였다.
기사들은 그리 기대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아트마 교의 승병들이 모두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부상 중이었다.
“뭐야, 여기 다 있었잖아?”
“지금처럼만 얌전하게 있지 그랬어? 제법 화려하게 날뛰어준 덕에 영지 안은 지금 난리라고. 너흰 가만히 있는 것조차 못하냐?”
기사들에게 한 소리 들은 승병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원래 임무에서 한눈 판 놈들에게 그딴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은데.”
“…한눈? 우리 임무는 너흴 여기 데려오는 걸로 끝이야. 너희 임무를 도와주고 말고는 순전히 우리 호의일 뿐이지.”
“그래? 그럼 우린 우리 임무를 계속할 테니, 너흰 입 닥치고 있어.”
“미안한데, 지금 시급히 운송해야 할 화물이 생겨서 말야.”
기사는 말 안장 뒤편에 봇짐처럼 말려있는 멍석을 가리켰다.
황자가 눈을 뜬 것인지, 단단히 묶인 봇짐은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말이 걷기만 해도 그 진동으로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미약한 꿈틀거림.
“내려가시겠다? 마음대로 하라고. 우린 우리 마음대로 할 테니까.”
“…그러지. 경고하겠는데, 제국의 땅에서, 제국의 사람을 무턱대고 해치지 마라.”
“제국이기 전에 불신자들의 땅이지. 제국민이기 이전에 불신자들이고.”
승병과 기사들의 입장은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신께 배은망덕한 망나니 놈들.”
“말 다했냐?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미치광이야.”
일촉즉발의 상황.
갈대밭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바람 소리에 실려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나팔소리?”
무언가 함정일 수도 있었다.
승병들은 수배 중이니 제외하고, 흑사자 기사단 한 명이 대표로 소리를 확인하기로 했다.
왕의 가도 근처로 가자, 북쪽을 향해 걸으며 요란한 나팔을 부는 행렬을 발견했다.
말에 탄 열 명의 태양교의 사제들.
“이봐요. 무슨 일이 있길래 그리 요란한 겁니까?”
“아니, 무슨 동굴에 있다 오셨습니까? 우리 교단에 태양신께서 현현하신 것도 모르시겠죠?”
“…태양신?”
“사람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백발의 구원자가 여기 선페일 영지에 들어왔단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레온나토스 황자의 가신들 중 이름 알려지지 않은 자가 없는데, 현현하신 태양신께서 황자를 돕는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겠죠!”
“…….”
기사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의 발자취를 신중하게 지우며 다시 갈대밭으로 되돌아왔다.
“…함정이군.”
상황을 들은 승병들과 기사들, 누구 할 것 없이 같은 의견이었다.
“누굴 바보로 아는 건가? 의도가 너무 뻔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야.”
“그래. 우리가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죄다 꿰뚫어 보고 있는 모양이군.”
아트마의 승병이 아쉽다는 듯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역시 길목이나 지키고 있을 걸 그랬나? 꼴을 보아하니 아르테가 이미 황자와 접촉해버린 모양이군.”
“그 참에 태양교로 개종이라도 한 모양인데, 역시 아트마께서 주신 능력이 아니었어.”
그들은 아르테가 실제로 북부에 왔다고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아르테에게 기반이 없이는 절대 교국의 대주교 직을 탈환할 수 없고, 그녀에게 교국 밖의 다른 기반은 레온나토스 뿐임을 알고 있으니, 그 추측은 그리 빗나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모른 사실은, 레온나토스 자신조차 잘 모르는 테오드릭이라는 동맹의 존재였다.
흥분하는 승병들에게 흑사자 기사단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저들은 함정일게 뻔한 연기를 풍겨대는데.”
“안됐지만,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어. 아르테를 살려두면 앞으로 두고두고 대주교님께 걸림돌이 될 테니까.”
“아마 실패할 거다. 십중팔구 죽을 거고.”
“순교 따위 두렵지 않아.”
이미 승병들은 마음을 굳힌 듯했다.
고작 다섯 명, 그 중 두 명은 부상까지 입었는데도.
“…젠장할.”
아트마 교의 승병들이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당연히 라이안 황자에게 튀는 불똥도 적다.
하지만, 만약 승병들이 산채로 사로잡힌다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승병이지만, 죽음보다 가혹한 모진 고문 앞에서 흑사자 기사단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지, 그들은 장담할 수 없었다.
엔지 황자가 아마 서신을 보냈겠지만, 서신 따위 그저 정황증거일 뿐.
아무리 고문으로 얻어낸 정보라 해도, 살아있는 입에서 나온 증언은 그 무게부터가 다르다.
승병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길이 아닌 갈대밭을 통해 북쪽으로 향했다.
잠시 뒤, 그 뒤를 기사들이 뒤따랐다.
“뭐냐, 너희들. 도와주려는 거냐?”
“착각하지 마라. 우린 목숨 따위는 걸지 않을 거다. 다만, 네놈들 시체 정도는 주워주지.”
“마음대로. 어차피 우린 네놈들을 없는 셈 칠 테니까.”
말에 탄 열 명의 무사들이, 함정인 것이 뻔한 영지 안으로 다시 진입했다.
*****
“아렌. 이번에 판 함정은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네. 저희도 그만큼 급했으니까요.”
지금도 영지 안 어딘가 숨어있을 흑사자 기사단과 광신병들에게, 아르테가 도착했다는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다소 작위적이더라도 아르테가 지금 레온나토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면 그 방법이 가장 빨랐다.
“너무 노골적이면, 보통은 함정임을 의식할 텐데.”
“그들은 아트마의 주교를 쫓아 북부까지 온 자들입니다. 설마, 주교가 추격을 피해 동부 끝으로 갔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겠죠. 자신들을 꾀여낼 미끼라는 건 그들도 알겠지만, 그들로선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미끼겠죠.”
“…하지만, 잘 될까?”
“여기 잠입한 숫자가 관건이겠죠.”
고작 힘없는 여사제 한 명을 잡기 위해 흑사자 기사단 전원이 들어올 리는 없다.
적으면 다섯, 많아 봐야 스물 안쪽의 인원이지 않을까.
물론 그 정도 숫자라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과 명성이 그들에겐 있었다.
‘하지만, 이쪽의 실력과 명성도 뒤지진 않지.’
그때. 아렌이 나눠준 옷 꾸러미를 본 근위기사 더글라스가 볼멘소리를 했다.
“…이봐, 아렌. 정말 이걸 입으라는 거야?”
“네. 꼭 필요한 일이에요.”
“이런, 팔자에도 없는 걸…”
더글라스는 구시렁대면서도 얌전히 받아든 로브를 위에서부터 덮어썼다.
군데군데 보라색이 물든 사제복에는, 태양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