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협곡 가도의 정비는 이미 반 이상 진행되어 있었다.
마차가 다닐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건축자재가 진입할 수 있게 되었고, 산맥 너머의 공사 역시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관문 요새에도 제대로 된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한번 교대에 40명의 병사가 주둔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물론, 그만한 시설이 갖춰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유랑족과의 ·관계는 항상 아슬아슬했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관문의 증원은 필요한 일이었다.
아렌과 같이 관문에 도착한 루카스는 본격적으로 관문과 개척도시 건설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매사에 꼼꼼한 원래 성격에 맞게 계획과 실제 간의 간극을 최대한 줄여가고 있었다.
그때, 협곡 너머로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입니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는-”
“여기 있다. 무슨 일이지?”
바삐 말을 달려온 전령은 숨 돌릴 새도 없이 두 서신을 전했다.
“둘 모두 다급한 일이라고 합니다.”
“한 번에 서신이 두 개나?”
미심쩍어하면서도 서신을 열어본 레온나토스.
하나는, 다운힐 시내에서 행패를 부리고 도망친 자들이 있는데,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 영지군이 나서면 피해를 입을 것 같으니 레온나토스의 정예병을 빌릴 수 없느냐는 안건이었다.
“…엔지 형님이?”
또 하나의 서신은, 주위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제2 황자 엔지가 보낸 서신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라이안 황자가 거느린 흑사자 기사단원들이 찾아와서, 지금 광산 앞에 대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레온나토스가 받은 서신은 곧바로 아렌에게도 전해졌다.
‘…흑사자 기사단이라. 라이안이 엔지 황자를 알아챈 건가?’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일어난 일인 이상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어떤가, 아렌. 다운힐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들이 흑사자 기사단일까?”
“글쎄요.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럴 이유가 있을까 싶은데요.”
그들이 어떻게든 엔지의 신원을 확인했다면, 몰래 사로잡아 라이안 앞에 대령하면 그만이다.
그것만으로 황제와 레온나토스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굳이 시내에서 행패를 부려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
“뭔가 일이 생겼다고? 내려가 보지 그러나.”
제2 황자 루카스는, 서신의 내용을 그리 깊게 알려 하지 않았다.
“형님 혼자 여기 남으시겠다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애초에 그러려고 날 데리고 온 것 아닌가?”
설원에서의 민감한 사안들을 제외하면, 남은 건 중간과 끝이 정해져있는 단순한 작업 뿐이었다.
이곳 설원에 레온나토스가 계속 붙잡혀있는 것보다, 얼른 다른 책임자를 두고 그에게 맡기는 편이 더 나았다.
‘물론, 이렇게 선뜻 맡아줄지는 몰랐지만.’
그때, 레온나토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루카스가 물었다.
“그런데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레온나토스.”
“…말씀하시지요.”
“만약 내가 다른 황자의 사주를 미리 받았다면? 그래서 이곳을 맡은 다음, 일부러 네 시험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어쩔 생각이었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가 내준 시험이 차기 황태자 선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자신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큼 다른 이의 시험을 막는 것도 중요하다.
비록 레온나토스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황자들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일이다.
하지만 루카스의 물음에 레온나토스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고려해보지 않았는데요.”
그건 너무 순진한 것 아니냐고, 루카스가 반문하려는 찰나였다.
“제 시험을 망치는 건, 지금부터도 하실 수 있죠. 그 경우의 수를 제가 고려해야 합니까?”
레온나토스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잠시 마주한 루카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지.”
“네. 다행이군요.”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레온나토스와 기사들은 협곡의 좁은 길을 거의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신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시내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들과 엔지 형님을 노리는 자들, 누구를 우선해야 하지?”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굳이 우선순위를 둘 필요 있습니까? 기사단이 40명이고, 황궁의 위병들이 200명입니다. 충분히 나눠도 될 텐데요.”
“그렇지. 지금 엔지 형님이 무사하다면 말이지만.”
‘…그렇군.’
엔지가 레온나토스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 3일 전. 협곡을 통과하고 광산까지 가는데 못해도 이틀은 걸릴 테니, 그 사이 엔지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확실한 곳에 인원을 분산하느니, 차라리 남쪽 도로를 봉쇄하고 전 지역을 수색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병사들은 봉쇄에 집중하고, 기사단만 움직이는 방법도 있겠군요.”
“그래. 흑사자 기사단이 얼마나 들어왔는지가 관건이겠지만.”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닐 겁니다. 정황상 몰래 잠입했을 테고, 많은 숫자는 괜히 눈에 더 띄기만 할 테니까요.”
아렌의 말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말이었지만, 이미 기사들의 행동이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글쎄. 몰래 잠입한 자들이 시내에서 소란을 피울까? 흑사자 기사단 100인이 모두 들어왔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해.”
“정말 흑사자 기사단의 규모가 100인이라면, 영지를 통째로 점령할 수도 있는 숫자죠. 그게 사실이면 저희 병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들겠죠. 물론, 그렇다면 진짜 목적은 엔지 전하가 아니었겠지만.”
짧은 서신만으로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라도 어서 협곡 가도를 통과하고 싶었다.
조바심에 더욱 속도를 내는 레온나토스와 아렌.
그때, 맞은 편에서 말에 탄 기수가 바삐 달려오고 있었다.
“헛, 레온나토스 전하!”
“뭔가. 또 전령인가?”
“네! 테오드릭 전하께서 보낸 전갈입니다!”
“…테오 형님이?!”
선페일 영지에서 일어난 일의 후속 보고인 줄 알았는데, 뜬금없는 테오드릭의 연락이었다.
레온나토스는 얼른 서신을 받아 읽었다.
“…….”
잠시 말을 멈춘 채 하염없이 서신을 읽어가는 레온나토스.
하지만, 세 장이나 되는 서신을 다 읽은 다음 다시 첫 번째 장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읽기 시작했다.
“…전하?”
레온나토스는 서신을 두 번이나 내리 읽은 다음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이상하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얼핏 보면 내게 보낸 듯하지만, 이 서신은 날 겨냥하고 작성된 게 아닌 기분이 들어. 아렌. 자네가 한번 읽어보겠나?”
“그럼, 어디.”
아렌은 레온나토스에게서 서신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읽은 순간 눈치챘다.
‘…과연.’
서신은 글에 서툰 테오드릭이 쓴 것답게 군더더기가 많고 장황했지만, 요점은 간단했다.
교국에서 레온나토스와 동맹 관계인 주교가 접촉해왔고, 그가 도움을 구하는데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는 내용이었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레온나토스가 고개를 갸웃거린 이유는, 레온나토스가 알고 있는 동맹관계의 교국 주교가 없고, 또한 테오드릭이 굳이 자신에게 서신을 보내 묻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레온나토스 입장에서, 테오드릭은 자신과 친밀한 형일 뿐 동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아르테와 테오드릭, 둘 다 아렌과 연결되어 있었고 황자에게는 비밀인 관계였다.
“…서신의 목적을 대강 알 것 같습니다. 짚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아렌의 말에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에게 자신에게도 알리지 말고 일을 진행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준 이상, 이 보고는 더이상 문제될 것 없다.
“전에 말씀드렸던 적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와 연이 닿은 교국 주교 중 한 명입니다. 그가 테오드릭 전하께 망명을 한 모양이군요. 테오드릭 전하께선 그의 신병을 어떻게 할지 이쪽의 의사를 물어온 것 같고요.”
“…그와의 관계는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아렌, 자네 생각은 어떻지?”
“물론, 그를 지원해 성공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하지만 실패했을 때 꽤 큰 허물로 남겠죠. 게다가 타국에서 황자끼리 대리전을 벌였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려울 테고요.”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를 도와주고 싶군요. 정황상 선대 교국 대주교를 처리한 건 라이안 황자입니다. 더러운 방식으로 대주교 자리를 찬탈한 자를 용납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나도 동감일세.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어떤 지원을 할 수 있지?”
“…….”
아렌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음? 왜 그러나, 아렌.”
“…동부에선 교국의 도망친 주교가 도움을 구해왔습니다. 자신을 쫓는 추격자도 있다면서요. 그리고 실제 라이안 황자의 기사들이 북부 영지에 올라와 있습니다.”
아렌은 되물었다.
“동시에 일어난 두 가지 일이, 과연 완전히 무관할까요?”
*****
엔지는 3일 동안 광산의 관리인 숙소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레온나토스가 일찍 도착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
낮 동안은 보는 눈이 많아 그나마 안전했지만, 밤이 되면 광부들마저 마을로 내려가거나 숙소에서 골아떨어져, 보는 눈이 사라진다.
‘-온다. 온다면, 분명 지금일 거야.’
마침 오늘은 그믐달이 뜨는 밤이었다. 야음을 틈타면 설령 조금 소란스럽더라도 인상착의를 들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콰직!
광산 부지의 외곽에 지어진 관리인 숙소의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엔지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결국, 이 사달이 나는군!’
“…어? 뭐야, 관리인 나리.”
옆 침대에서 광부가 실눈을 뜨고 눈을 비볐다.
“-글쎄. 멧돼지라도 들어온 건가? 별일 아닐 테니 더 자.”
엔지가 누워있던 곳은 관리인 숙소 옆, 광부들의 공용 숙소였다.
간단한 침상만 늘어져 있는, 벽과 지붕이 전부인 간소한 건물.
하지만 혼자 관리인 숙소에 누워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광부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제국의 제2 황자 엔지라는 것도 밝혀야 했다.
엔지 황자가 살아있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자신이 엔지라고 밝혀야 하다니.
그건 모순이다.
엔지는 준비해둔 가방을 챙겨 들고, 광부들의 곡괭이를 든 채 조용히 숙소를 나섰다.
이대로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 산속에 숨어들면 밤에는 거리를 벌릴 수 있지 않을까.
엔지의 짤막한 기대는, 단숨에 박살이 났다.
“역시, 엔지 전하가 맞으시군요.”
광부 숙소 주위로, 네 명의 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관리인 숙소 문을 요란하게 부순 건, 애초에 엔지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이 정도 기만책은, 황궁에서 가르치는 야전교범과 조금도 다르지 않군요. 저희 역시 같은 것을 배웠으니, 조금은 변주를 하셨어야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디서 들었지?”
“-글쎄요.”
기사들이 다가왔고, 엔지는 가져온 곡괭이를 앞으로 들어 올렸다.
“…엔지 전하께서도 변하셨군요. 전에는 승산 없는 승부를 전혀 하지 않으셨는데.”
“그것도 예전 일이지. 안전한 다리만 건너는 놈이 황제 암살을 기도할까?”
“그건 성공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죠. 실제로 거의 성공했잖아요?”
“…….”
기사의 말에서, 엔지는 묘한 인상을 받았다.
묘하게 깔보는 듯한 인상. 그건, 지금 상황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선점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엔지는 북부에 오고 난 뒤 계속 생각해오던 것을 물었다.
“역시, 그때 내게 바람을 넣은 건 라이안 형님의 입김이 닿은 놈들이었나?”
“글쎄요. 그건 황자님 상상에 맡기도록 하죠.”
엔지의 손에 들린 곡괭이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기사들은 사방에서 성큼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