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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76화 (176/227)

#176화

“…이봐, 당신 괜찮나?”

후드 아래로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엔지를 보며, 기사는 고개를 숙였다.

“아아, 괜찮, 습니다. 어제 철야를 한 터라.”

“…그렇군. 어제 무리한 사람을 오래 잡아둘 순 없겠지. 우린 그만 물러가 볼 테니 푹 쉬라고.”

“잠깐만! 얼굴을-”

그냥 돌아가려 하는 기사에게 승병이 항의했지만, 기사는 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됐으니까 돌아가!”

기사는 후드 안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세력과 역량은 라이안 제1 황자에 턱없이 못 미쳤지만, 둘째 황자라는 지위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엔지 제2 황자의 얼굴이었다.

‘분명 역모로 극형을 받았을 텐데, 아직 살아있다니.’

대강 짐작은 갔다. 황제와 레온나토스가 손을 잡고 제2 황자를 북부로 빼돌린 것일 터였다. 황제 시해범을 어느 한쪽만의 의향으로 빼돌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거리가 충분히 멀어진 다음에야 기사는 입을 열었다.

“…방금 그자는 너희가 찾는 여자는 아니야. 하지만 제국에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이지. 산 채로 전하께 데려가야겠어.”

“…쳇, 그래봐야 교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잖아?”

“어차피 당장은 아르테의 단서조차 없는 것 아닌가? 원래 목적은 너희를 이곳까지 안내하는 것이기도 하고.”

“잠깐 따로 행동하자는 건가? 우리야 그래도 상관없다만.”

아트마의 승병은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방금 그 말, 그쪽이 먼저 했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라고.”

*****

뜻밖의 조우에 당황한 건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라이안 형님의 흑사자 기사단이 왜 여기에?!’

그들이 왜 여기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냉정하지 않은 지금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봐, 관리인 양반. 그렇게 허둥대기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잠깐 여길 비워야겠어.”

“비워? 여기를? 가뜩이나 광부장도 없어서 힘든데 당신까지 없다고?”

“그렇게 됐으니, 그런 줄 알아.”

엔지는 얼른 숙소로 가 짐을 꾸렸다. 관리인 숙소는 황궁에 있던 그의 방에 비하면 감옥 독방이나 다름없었고, 가진 짐은 더욱 적었다.

얼마 없는 짐을 가죽 배낭에 쑤셔 담은 엔지는 곧바로 광산을 내려가는 길 위로 향했다.

언덕 아래의 경사길. 양옆에는 익숙한 숲이 보였다. 북부 특유의 곧은 침엽수림이었다.

“…흥.”

그리고, 잠시 아래의 언덕길을 주시하던 엔지는 다시 광산으로 들어왔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짐을 꾸리고 오는 동안 엔지는 약간이나마 평정을 되찾았고, 엔지 역시 황제가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자였다.

항상 풀숲 옆에서 시끄럽게 울던 벌레들이, 지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광산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겠다, 내려가는 순간 잡겠다 이건가?’

엔지는 라이안이 지금 대륙의 남부, 교국에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남부로 내려가 있는 황자의 직속부하가 대륙의 북쪽 끝까지 온 건 분명 뜻밖의 일이다.

굳이 광산 안에서 행패를 부리지 않고 밖에서 기회를 노리는 건,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길 원치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서 유추할 수 있는 또다른 사실도 있었다.

‘당초 저들의 목표 역시 내가 아니었겠군. 목표가 나였다면, 그런 식으로 접근해오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일 뿐이야.’

엔지가 기사들을 눈치챈 것처럼, 기사 역시 엔지를 눈치챘다. 그건 아까의 반응으로 알고도 남았다.

“…이봐. 혹시 밖에 나갈 일 없어? 아니 차라리 휴가를 줄 테니, 나가서 실컷 놀고 오라고.”

“휴가? 그럴 시간도 돈도 없거든?”

“시간은 내가 내어주지. 필요하다면 유흥비도.”

“…정말?”

엔지는 광부 다섯 명을 추렸다. 가장 열심히 일해줬다는 명목으로 소정의 유흥비와 휴가를 지급한 것.

하지만 그 실상은, 레온나토스가 있을 협곡 가도로 전언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알겠어? 서신을 전한 다음에는 뭘 해도 좋으니, 서신만큼은 가장 빨리 전달해주면 좋겠어. 그만한 돈은 줄 테니.”

“나야 돈만 준다면 군말 없이 하겠지만… 대체 무슨 일이야? 다른 사람들까지 우르르 보내선.”

“심부름 값에는 이것저것 묻지 않는 값도 들어있는데.”

“아 알았어, 알았다고!”

다섯 명의 광부 무리가 언덕길을 내려갔다.

언덕길 옆 풀숲에 잠복하고 있던 기사들은, 다섯 명의 광부를 그냥 보내줬다.

“…저들 중에 엔지의 연락책이 있을까?”

“설령 있다 해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지. 심문하면 괜히 인상을 남길 테고, 다섯 명이나 되는 자들을 죽이면 영지의 병사들이 움직일테니.”

기사들도 엔지의 의중을 대략 눈치챘다.

이제 한도 없이 이곳에 기다리고 있을 순 없다. 이곳에서 대기할 수 있는 시간은, 잘해봤자 3일 정도. 그 이상 시간을 끌면 레온나토스의 정예와 싸워야 한다.

“…그냥 달려가서 납치하고 가버릴까? 죽은 줄 알았던 엔지가 살아있고, 거기에 지금 황제와 레온나토스가 연루되어있다는 건 그들에게 큰 타격이야. 지금의 편파적인 시험 따위는 당장 무의미하게 만들 만큼.”

“…3일간 변화가 없다면 그러자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조바심을 내는 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광신도 놈들을 이대로 설치게 놔둬도 되는 건가?”

“설마 문제라도 일으키겠어? 여기는 지금 제국에서 라이언 전하 다음으로 유력한 황자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데. 놈들도 머리가 달려있으니 생각이라는 걸 하겠지.”

기사의 말은 예측이라기보단 희망 사항에 더 가까웠다.

아쉽게도,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

“젠장할, 또 태양문양인가? 더러운 이교도 새끼들.”

선페일 영지의 거점도시, 다운힐의 시내 한복판에서 아트마 교단의 승병들은 태양교의 심볼을 볼 때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정황상 아르테는 아직 이곳에 오지 않은 듯했다. 그녀를 잡으려면 여기보다 차라리 남쪽의 길목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아 보였다.

더군다나 기사들은 지금 광산 앞을 감시한다고 떠나버린 상황.

“…이봐. 어차피 수색할 거면, 놈들없이 우리끼리만 해도 되지 않나? 어차피 놈들 역할은 길잡이가 끝이잖아.”

“…기다려. 아르테에겐 질문이나 심문 따위도 필요 없어. 그냥 보는 것만으로 사람 속마음을 훤히 아니까. 우리가 들쑤실수록 그 여자가 여기 걸어들어올 확률은 줄어든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여기 계속 가만히 있으라고? 여기는 신경 거슬리는 게 너무 많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아.”

아트마교는 한창 포교에 열중이던 시기의 태양교보다는 온건한 편이지만, 현 대주교인 로이터 휘하의 사제들은 달랐다.

아트마 교단에서도 강성파만 모였고, 그만큼 맹목적인 자들이었다.

이곳같이 이교도의 본진 한가운데는 그들에게 너무 자극이 심했다.

“이봐, 살기를 숨기라고. 아르테가 아니라도 눈치채겠어.”

눈빛이 사나워지는 승병을 다른 승병이 제지했지만, 정작 그조차도 온몸에 흉흉한 기색을 휘감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지나는 사람을 쏘아보면서, 이따금 살기를 숨기지 못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 되고 말았다.

“…거기 당신들, 어디서 오셨죠?”

“누구, 우리 말인가?”

태양교의 사제 세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들이 들고 있는 창은 그 모양이 특이했는데, 앞으로 비스듬하게 뻗은 네 갈래의 창날이 달려 있었다. 마치 단순화시킨 태양 모양을 반으로 잘라 붙인 듯한 형태였다.

선페일의 치안은 영지의 병사들이 주로 담당하지만, 영주와 협력해 태양교의 무승 또한 치안 유지에 일조하고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험상궂은 자들이 쏘아본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만약을 위한 것이니 신분을 증명해주시죠.”

“…신분? 굳이 증명해야 하나?”

“용병이라면 용병증, 상인이라면 조합원증이 있을 텐데요. 광부라면 전에 일했던 광산이라도.”

아트마의 승병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 기사 놈들이 기고만장하겠군. 헤어지자마자 이 꼴이라니.”

*****

제국의 제9 황자, 테오드릭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날 찾아온 사람?”

지금 있는 곳은 제국 동부, 만월강을 넘어 아티스 옛 권역 깊은 곳이었다.

테오드릭이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건 비밀이었지만, 아르테는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 몇명과 함께 당연하다는 듯 테오드릭 앞에 서 있었다.

뒤로 길게 묶었던 머리는, 어깨보다 위로 짧게 잘랐다.

한번 뒤로 묶은 건 바꾼 머리카락의 인상을 남기기 위해. 그 인상이 고착되었을 때 한 번 더 짧게 잘라 감시망을 피했다.

북부에 시선이 집중된 동안, 아르테는 아렌의 첩보로 들었던 테오드릭의 행선지, 동부로 찾아왔다.

“날 아나? 내 착각이 아니라면, 우린 초면인 것 같은데.”

“네, 착각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초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아르테가 황궁에서 몇 번 인사하긴 했지만, 그때는 말단 수행원으로 위장한 상태였다. 테오드릭은 아르테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 초면이나 ‘다름없는’ 자가 왜 날 찾아온 거지?”

“…그건, 단 둘이 얘기해도 될까요?”

“둘이?”

찾아온 낯선 자가 독대를 원한다는 말에 황자의 병사들과 호위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하지만.

“그래, 좋다.”

테오드릭은 순순히 병사들을 물렸다.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기도 하고, 또 그녀에게 적의가 없다는 의중을 파악한 것이다.

숨김따위 없는 테오드릭의 속내를 파악한 아르테는 속으로 몰래 감탄했다.

‘…테오드릭 황자 역시 인물은 인물이군. 이런 자조차, 황권 경쟁의 의욕을 잃을 정도로 레온나토스 황자는 걸물인 건가? 그게 아니면-’

‘걸물’이 실은 황자가 아니라, 그 곁에 있는 레온나토스라거나.

아르테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전, 레온나토스 황자의 가신 아렌과 협력하고 있는, 아트마와 평화의 진리성전의 주교 아르테라 합니다.”

“아… 또 그 녀석인가?”

“네, 또 아렌이죠.”

테오드릭은 조금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자고로 옛말에, 친구의 친구는 또다른 친구라는 말이 있죠. 그 옛말 따라 도움을 구하러 왔습니다.”

“교국이라면, 라이안 형님 때문이겠군.”

“네, 그렇습니다.”

“이제 좀 이해가 가는군. 그래, 뭘 해주면 되겠나. 아렌과 만나고 싶나? 아니면 보호를 원하나? 힘닿는 데까지라면 도와주지.”

“전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허나, 저 역시 도움만 받지는 않을 겁니다.”

혼자 몸으로 국경을 넘어 대륙을 가로지른 아르테였다.

그녀는 오히려 역으로 제안했다.

“불온한 자들이 부정한 방법을 써 성좌를 찬탈했습니다. 교국을 되찾는데 도움을 주신다면, 저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드릴 것입니다. 어떠신지요.”

상황에 따라선, 한번 단념했던 황권 경쟁에 다시 뛰어들 기회일 수도 있었다.

아르테의 질문 또한, 테오드릭의 심부에 있는 진심을 건져내기 위한 미끼.

하지만 테오드릭은 이미 자신의 야망을 전부 레온나토스에게 위임한 후였다.

그가 말했다.

“북부로 전령을 보내지. 결정은 그 다음에 하겠다.”

“…네, 그러시지요.”

아르테는 겉으로 아쉬워하며, 하지만 속으론 슬그머니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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