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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75화 (175/227)

#175화

아렌과 기사들은 붉은 눈 마을에서 출발했다.

붉은 눈 마을에서는 환송도 아니고 축객령도 아닌, 실로 미묘한 태도로 병사들을 배웅했다.

그곳에도 벤조르같은 강경파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산맥 너머의 정주민이 환대받기는 여전히 어려웠으니까.

붉은 눈 마을이 빌려준 개썰매를 타고 돌아가는 기사들.

아렌과 사야는 같은 썰매를 타고 있었다. 어쩌면 제국과 유랑족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줄지 모르는 사야에게, 아렌은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히 말해줬다.

사야는 중간 회담장소에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온천지대에 마을을 만드는 것은 조금 달랐다.

“금기의 땅에, 제국이 마을을 만들겠다고? 진심이야?”

“왜? 역시 이상해?”

사야는 제국과 친하게 지내도 상관없다는, 유랑족 중에선 온건파에 속했다.

그런 그녀조차도 온천지대에 마을을 만드는 일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금기시하던 땅이야. 멀리했다고, 그곳을 외지인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도리어 경원시하던 땅이기에 더 간섭하지 않아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야.”

“마을을 만들면 안되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면 물러서겠어. 하지만 그런 이유가 있나?”

“그건…”

사야는 대답하지 못했다.

반면 아렌은 제국이 그곳에 마을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나 말할 수 있었다.

“먼저, 제국이 그곳을 관리하면 통제되지 않는 운명석 계약자가 급감할 거야.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능력에 떨 이유가 없어지는 거지.”

“…하지만 다른 부족들도 운명석이 필요해. 족장이 되기 위해선 운명석과 연결되어야만 한다고.”

“거기서 두 번째 이유. 지금까지는 돌을 구하기 위해 눈의 사생아들을 피해 몰래 잠입했다지? 그곳이 제국의 마을이 되면, 족장 후보들에게는 특별히 창고를 개방해줄 수 있어. 필요한 만큼 운명석을 가져가는 거야.”

“그러니까, 필요할 때마다 너희한테 손을 벌리라는 거야?”

“그게 그렇게 되나?”

원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질서를 다시 만들려고 하니, 생각지도 못하던 곳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역시 쉽지는 않은가?’

개설매는 설원에서 말보다도 빠르게 달렸다.

어느새, 저 멀리 제국의 관문이 보였다.

사야는 끌고 온 개썰매와 한층 가뿐해진 개썰매를 끌고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늦었나, 아렌! 며칠씩이나 늦어져서 수색이라도 보낼 참이었어!”

“제국의 병사가, 설원을 수색한다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만큼 답답했다는 뜻이야!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지? 말은 또 어쩌고?”

아렌은 그간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유도된 나무말뚝과 불어닥친 눈폭풍, 붉은 눈 부족의 마을로 간 것까지.

“…역시, 유랑족들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은가 보군. 붉은 눈 부족은 어찌 납득해준 모양이다만.”

온천지대로 떠났던 레온나토스는, 의외로 별 문제 없이 돌아왔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온천지대로 향했던 레온나토스는, 그 경로에 나무말뚝을 일렬로 박아놓았다.

혹시나 눈폭풍에 바로 앞도 보이지 않아도, 나무말뚝을 보고 조금씩 찾아갈 수 있게끔.

레온나토스는 루카스를 돌아봤다.

“형님께는 괜한 고생을 시킨 것이 아닌가, 뭔가 죄송하군요.”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재미있던데. 황궁에서는 절대 못 할 경험들이었어. 지식으로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세상은 넓군.”

“아, 그건 동감입니다.”

아렌을 등용하기 전 레온나토스와 같았다. 아렌과 만나기 전 레온나토스 역시 경험보다는 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채워나가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이곳조차도 넓은 대륙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서운 법이다.

아렌은 두 황자를 슬그머니 부추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대륙은 끝이 아닙니다. 이곳이 거의 끝인지, 아직 중앙일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르죠. 대륙 위쪽의 제대로 된 지형도가 없으니까요.”

바다로는 북쪽 바다에서 흘러들어온 유빙이 가로막아 진행할 수 없고, 육로로는 혹한과 눈폭풍으로 갈 수 없다.

인간에게 대륙의 북부는 이미 미지의 영역이다. 사람이 살고있는 설원조차 제국에게는 미지의 땅이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리고, 설원의 더 북쪽에는 운명의 산이 있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운명의 산? 루카스 형님은-”

“아, 루카스 전하께서도 운명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셨습니다.”

“아, 그렇군. 따로 설명해 드리려고 했는데, 잘됐어.”

설원에서의 삶에 익숙한 유랑족조차도 본 적 없는 산.

어쩌면 제국의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유랑족보다 훨씬 좋은 장비, 많은 물자를 가지고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은 운명의 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겠지만, 그럴듯한 의미를 심어두는 게 둘을 움직이기 더 유리할 거야.’

“만약, 유랑족이 온천지대의 마을을 반대한다면, 그 이유는 십중팔구 운명의 산에서 나오는 운명석 때문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곳을 터부시한 것도 그 이유일 거고.”

“네. 제국이 그곳을 통제하려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위험하기 때문이죠. 운명석과 그 계약자, 둘 다.”

사실은 유랑족에게 일정량의 운명석을 전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비록 만나본 횟수는 적었지만, 유랑족 족장이나 그 후계자가 가진 능력이 제국이 놀랄 만큼의 위력이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온천지대로는 부족하다? 그 원천인 운명의 산을 제국이 통제하면, 그건 완벽할 것 같은데.”

“네, 전하. 관문에서 북쪽으로 쭉 뻗은 눈기둥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그걸 어떻게 잊겠나.”

“그게 정말 건국왕께서 놓은 이정표라면, 운명의 산에서 적어도 그 중간까지는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흠…”

“비록 500년 전에는 실패했지만, 지금의 제국은 500년 전의 그 국력이 아니죠. 지금의 제국이라면 성공할지도 모릅니다.”

“흐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레온나토스가 넘어올 것 같았다.

아렌이 박차를 가하려는 찰나.

“운명의 산이라, 확실히 호기심이 동하는군. 그런데 온천지대를 확보하려는 이유가 바로 그 운명석 때문 아니었나? 온천지대 확보에 실패한다면 모를까, 굳이 지금부터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역시 그렇겠죠?”

‘쳇, 안 넘어오는군.’

아렌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급하게 생각할 것은 없었다.

비록 교국으로 내려간 라이안의 동태가 걱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시간은 많았으니까.

아렌의 생각이었다.

*****

레온나토스와 아렌이 산맥을 넘어에 있는 동안, 선페일 영지엔 흉흉한 소문이 맴돌기 시작했다.

선페일 영지를 들렀던 상인들이 하나 둘 실종되거나, 으슥한 곳에서 짐마차와 함께 시체로 발견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흔한 괴담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이 이야기에는 실제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흉흉한 소문에 상인들은 손해를 무릅쓰고 호위들을 고용했다.

아트마 승병과 라이안의 기사들은 영지 안에서 더더욱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이전의 선페일 영지였다면 영지 안의 이방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지 모른다. 애초에 새로운 사람이 방문하는 빈도도 적고, 방문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선페일 영지는 은광의 개발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지금은 은광이 세 곳이지만, 광맥은 광맥 주변에 분포하기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광산이 더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리고, 소문의 주인공인 아트마교 승병들과 라이안의 기사들은 이미 선페일 영지 한복판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간의 반응들로 마차에 짐도 가득 실어놓은 상태. 대부분 잡동사니지만, 마차 위에 덮어놓은 천을 열지 않는 한 쉽게 들키진 않을 것이다.

대륙 남부의 따듯한 바다가 근거지인 승병들은 한껏 싸늘해진 날씨에 신경이 더욱 곤두서 있었다.

“이봐! 충분히 북쪽으로 올라왔잖아! 여기서 더 올라간다고?”

“그래. 얼어붙은 산맥에 붙어야 해. 그곳에 제국의 은광산이 있거든.”

“젠장, 재수없는 이름이 쌍으로 붙었군.”

추위를 싫어하는 승병들에게 ‘얼어붙은 산맥’은 이름만으로도 비호감이다.

거기에 제국과의 관계악화의 시발점이 된 은광산의 이름까지 듣자 승병은 진절머리를 쳤다.

“여기엔 왜 온 거야? 설마 광도라도 무너뜨릴 생각인가?”

“그중 하나라면 그것도 괜찮군. 북부의 세 은광산 중 하나는, 레온나토스 황자가 양도받아서 운영 중이거든.”

“-그렇군. 이해했다.”

기사들은 북부에서 레온나토스 황자가 뭘 하는지 모른다. 산맥을 넘는 길을 만드는 일도, 산맥 너머에 개척마을을 만드는 일도.

다만 황자의 은광산이 북부에 있으니 은광산과 관계된 무언가겠거니, 막연히 생각할 뿐.

“다수의 기술자와 인부들을 데려갔다니, 아마 주변에서 새로운 은광산이라도 파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 아르테도 거기 있을 거다?”

“어때? 추측이지만 썩 나쁘지 않지?”

어차피 지금으로선 다른 짚이는 구석도 없다.

기사들은 더 북상해 얼어붙은 산맥에 뿌리를 내린 은광산에 접어들었다.

위장을 위해 갑옷도 마차에 숨기고 허름한 복장을 차려입었기에, 직접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한 정체를 들킬 일은 없다.

“이제 우릴 보고 얼굴을 굳히는 놈이 있다면 무조건이지. 아르테는 우리 얼굴을 알 테니까.”

“당연하지. 뭣 때문에 물어본 상인들을 모두 죽이면서 왔는데. 흰머리 여자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르테는 더욱 경계하겠지.”

“쉿. 잡담 그만해. 이곳 어디 레온나토스의 병사가 있을지 모른다고.”

승병들과 라이안의 기사단은 병사 수십 명의 포위 따위 단번에 돌파할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의 정예, 낮안개 기사단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개개인으로는 호각 이상으로 싸울 자신이 있지만 낮안개 기사단은 40인 가량. 수적으로 월등히 열세였다.

“병사들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신중히 접근하자고.”

기사 중 하나가 제일 한산한 제2 광산을 향해 접근했다.

대부분의 인부가 협곡가도 현장에 가 있기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기사는 모른다.

“…이보쇼, 무슨 일입니까? 당분간 거래는 옆 광산에서 하시죠?”

광산 관리인실에서 기사를 맞은 건, 후드를 눌러쓴 키 작은 남자.

이미 현장에 완전히 적응한 제2 황자, 엔지였다.

‘…남자로군.’

신경이 온통 흰 머리의 여자를 찾는데 쏠려있는 기사는, 황자의 얼굴을 보고도 순간 눈치를 못 챘다.

반대로 눈치를 챈 건, 말의 아래에서 기사를 똑똑히 올려다본 엔지.

‘-흑사자 기사단! 라이안 형님의 기사들이 여기 무슨 일이지?!’

엔지는 동요했지만, 겉으로는 그 동요를 필사적으로 숨겼다.

“거래를 하려면 옆 광산을 가라? 이곳은 지금 운영을 안 하나?”

“에에, 그렇습니다만? 그런 줄 알고 그만 돌아가시죠.”

그들과 더이상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엔지는 조금은 단호하게 이야기를 끊으며 그들을 돌려보내려 했다.

그때,

“잠깐만. 당신, 후드를 좀 벗어보겠어?”

뒤쪽에 대기하던 승병이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이야기는 이미 끝났어. 돌아가자고.”

“아니. 난 꼭 얼굴을 봐야겠는데?”

후, 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나토스의 입김이 닿은 곳에서까지 살인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되도록 짙은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는데, 승병의 행동으로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갈 찰나였다.

“미안하게 됐군, 책임자 양반. 동행이 워낙 별나서. 잠깐 후드만 벗어주지 않겠나? 아마 우리가 찾는 사람은 아닐 거야.”

대수롭지 않게 말한 기사.

하지만, 후드 안 엔지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누가 봐도 의심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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