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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74화 (174/227)

#174화

아렌과 붉은 눈 부족 족장은 방에서 나왔다.

좁은 눈 참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기 족장 후보 벤조르.

“어르신, 어떻습니까?”

“이 자들은 금기의 땅에 있었던 참사와 아무 관련이 없네. 도리어 피해자라 할 수 있지.”

“그럴수가….”

“그게 사실이다. 벤조르. 이들에게 사과해라.”

벤조르는 쉬이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감히 족장이 한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때 일은, 미안했다! 됐냐!”

뒤따라 나온 아렌에게 머리를 숙인 벤조르.

아렌으로선 벤조르에게 사과를 받는 것보다는, 제국이 설원에서 대량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보증이 더 필요했다. 이제 와서 받는 사과따위 원하지도 않았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보다, 앞으로 일이 더 중요해.’

“아,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던 찰나.

아렌은 생각을 바꿨다.

“-지 않아.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이지. 자칫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했다고. 증거조차 없이 의혹 하나 때문에.”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사과하잖아.”

“말로만?”

순간 벤조르의 눈이 크게 떠졌지만, 족장이 인정한 손님인 이상 화를 삭혀야 했다.

“진짜 미안하다면, 이쪽에 하나만 협력해주겠어?”

“협력이라니, 뭔데?”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 나무 말뚝을 옮겨 박은 거, 기억나? 그곳에 시설을 설치하고 싶어. 눈폭풍에도 버틸만한 시설로.”

“시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마을이나, 피난처나, 회담장소나 뭐든. 유랑족 중 누구든 제국 측에 할 말이 있으면 그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관문에 있던 병사들은 신호를 받으면 확인하러 가는 거지.”

유랑족에 봉화를 피울만한 장작은 없으니, 봉화나 시설의 관리는 제국 측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아렌의 말에 벤조르는 의문을 표했다.

“…회담장소가 필요한 건가? 굳이 새로 만들 필요 없이, 이미 있는 마을 중 한 곳을 정하면 되잖아. 아니면 관문으로 직접 찾아가거나.”

“이미 있는 곳은 안 돼. 유랑족 마을 중 한 곳을 정하면 그곳에 지나친 의미 부여가 될 테니까. 붉은 눈 부족 마을에 제국과의 회담장소를 설치하면, 벤조르 넌 반길 수 있겠어?”

“…흥, 절대 무리지.”

“그렇지?”

회담장소가 된 마을은 자칫 친 제국파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더욱 문제고, 설령 사실이라도 다른 부족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되도록 그런 인식을 피하고 싶을 터였다.

“그렇다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관문으로 오면, 회담의 주도권을 제국이 쥐고 있다는 인상을 주겠지. 이런 건 완전히 중립적인 곳이 나아.”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쉽게 될까?”

“시도조차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너도 도와줄 거 아냐?”

“…하나만 짚고 넘어가야겠는데.”

벤조르의 얼굴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너, 나이도 어린 놈이 따박따박 반말이야? 머무는 사람들은 위아래도 없어?”

“아, 미안. 나한테 창칼을 겨눈 사람한테는 존댓말 안 하기로 마음먹었거든. 불편하면 말하고.”

아렌의 말에, 벤조르는 불만을 속으로만 삭히며 툴툴댈 뿐이었다.

그 사이, 제3 황자 루카스가 다가왔다.

“아렌, 이야기는 잘 끝냈나?”

“네. 덕분에 오해는 어느 정도 풀린 듯합니다.”

“그래. 그 사이 우리도 이야기를 들었다. 설원에는 특별한 힘을 주는 돌이 있다고 말야. 그게 특히 많이 나오는 곳이 바로 온천 지대인 모양이지?”

루카스가 설원에 오게 된 이상 언젠가는 밝혀질 사실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분명 성가신 힘이지만, 돌이 준 능력에도 몇 가지 규칙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규칙?”

“네. 가령 계약자가 얻은 능력은, 다른 계약자에게 통하지 않는다던가.”

“흐음.”

아렌이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한 이유는, 자신은 운명석 계약자가 아니라는 일종의 허세였다.

붉은 눈 부족 족장이 아렌의 마음을 읽었다면, 자연히 아렌도 운명석 계약자가 아니게 되니까.

‘대놓고 물어보지 않는 이상, 이걸로 어느 정도는 얼버무릴 수 있어.’

문제는 루카스가 아렌에게 노골적으로 물어봤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였다.

거기에 아렌은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흠, 그럼 아렌. 자네는 운명석과 계약한 몸인가?”

“…….”

루카스는 아렌이 입장을 정리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추궁하듯 물었다.

*****

제국의 북부, 선페일 영지까지 곧게 뻗은 ‘왕의 가도’.

말에 탄 열 명의 남자는 그 길을 빠르게 달렸다.

상행용 마차를 하나 끼고 있으니 얼핏 상인과 용병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마차는 속도를 내기 위해 필요 최소한도의 짐만을 싣고 있었다.

그 기묘한 행색은, 일반인이면 몰라도 상인이 보면 금방 지적할 정도로 어색했다.

“이 길로 쭉 가면 되나? 황자의 병사들 따위,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됐던 것 아냐?”

“불만이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되는데. 상인이랍시고 국경을 넘었는데, 제대로 된 지명 하나 못 말하면 꼴이 참 우습겠지?”

“-흥!”

아트마 교국의 승병 다섯과 라이안 황자의 기사 다섯은, 아르테가 먼저 향했을지 모를 북부로 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말을 구해 먼저 북부로 가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뒤를 쫓는 것보다 먼저 앞질러 가 기다리고 있는 게 조심성 많은 그녀를 잡기 더 유리했다.

한가지 걱정이 있다면, 그녀가 정말 아렌이 있는 북부로 향할까, 하나 뿐.

“그쪽 황자의 말대로 정말 북부로 향하고 있는 거겠지? 만약 아니었다간-”

“그쪽 황자?! 그분의 존함에 라이안 황자 전하라고 꼬박꼬박 경칭을 붙이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섬기는 건 유일신 아트마와 로이터 대주교, 둘 뿐이야.”

“로이터 대주교는 몰라도 아트마는 지금 당장 만나게 해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해줘?”

“개도 자기 집에서는 기세등등하다더니, 그 말대론가?”

승병과 기사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애초부터 밀약은 대주교와 황자가 맺은 것.

그 아래 부하들은 애초부터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국 기사들은 교국 승병을 미신을 믿는 얼간이로, 승병들은 기사들을 교국 영토로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불신자쯤으로 여겼으니까.

북부로 향하는 속도는 늦춰지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기류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깐 기다려, 누가 온다.”

“아마 상인인 것 같은데?”

선페일 지역의 은 세공품과 기타 교역재료를 잔뜩 싣고 내려오는 상인이었다.

왕의 가도가 충분히 치안이 갖춰진 길이라서인지, 호위도 없이 마차 한 대에 상인 하나 뿐이었다.

“잘 됐군. 저기 잠깐 물어보지.”

정체를 숨긴 승병이 맞은 편의 마차에 다가갔다.

상인은 모자를 벗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에는 태양 문양의 목걸이가 반짝였고, 그걸 본 승병의 입가는 조금 굳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느 상회 소속이신지요?”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은발에 머리를 뒤로 묶고, 흰색 천으로 리본을 묶은 여자를 모르나? 어쩌면 북쪽으로 향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몇몇 목격 정보를 종합해 아르테의 바뀐 인상착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승병의 이야기를 들은 상인은 노골적으로 경계를 숨기지 않았다.

“…그 여자와 당신들은 무슨 사이죠?”

“물건 대금을 떼먹은 사기꾼이야. 아주 못된 년이지. 내 손으로 꼭 직접 잡아야 속이 풀리겠어.”

“물건 대금이라고요?”

상인은 승병들의 마치를 흘깃 바라봤다. 상인에게 마차의 짐칸은 놀릴수록 손해. 아주 조금의 이윤밖에 남지 않는다 해도, 상인이 마차의 짐칸을 굳이 비워둘 이유는 없다.

승병들의 마차는 텅 비어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짐이 실려있지 않았다.

“당신들, 정말 상인이 맞는-”

상인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

승병이 펑퍼짐한 옷 안에 숨겨뒀던 철퇴로 상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단숨에 정수리가 푹 꺼진 상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졌다.

“-이봐! 외국인 주제에 제국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셈이냐!”

“이쪽을 의심해버렸다고. 어차피 이단자고. 하는 수 없잖아!”

“그러게 먼저 나서서 어설프게 심문하기는….”

기사는 승병을 힐난했지만, 그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제국민은 제국과 황제를 위한 존재.

지금 임무는 곧 황제가 될 라이안을 위한 임무.

그러니, 지금 임무 중 죽는 건 제국민이 제국을 위해 죽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르테라고 했나? 아마 먼저 앞서가지는 않았을 거야. 말도 구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넌 그 여자를 몰라서 그래.”

반평생을 비원궁에서 떠나본 적 없는 승병은, 주교 아르테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비록 자신을 향한 음모나 협잡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앞에서는 모두 밝혀질 수밖에 없었기에 전대 대주교는 그녀를 중용했다.

이번 교국에서의 음모를 성공하기 위해 계획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자는 한동안 궁 밖에 나가 있거나 독방에 있는 등 갖은 노력이 있었다.

“그 요물을 상대하는 거야.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지.”

그렇기에, 승병은 결코 아르테를 깔보지 않았다.

*****

“…정말 여기면 되냐?”

“네. 여기면 충분해요.”

“하지만, 여긴 누구도 오지 않는 곳인데-”

후드를 깊게 눌러쓴 아르테는 얻어탄 마차에서 내렸다.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 누구에게 음심이나 흑심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지만, 처음 봤던 그 인상만을 믿으면 그건 그것대로 오산이었다.

처음엔 순수한 마음이었어도 약간의 계기만으로도 완전히 변해버리고 마니까.

마차를 얻어타는 건 아르테로서도 모험이었다.

“그런데, 젊은 여자 혼자서 이런 곳에 오다니, 여기는 제국의 끝이라고? 이 너머는 완전히 황무지란 말이다.”

“네. 알고 왔답니다?”

“끙…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군.”

중얼거린 상인은 마차를 돌렸다.

길은 왔던 곳까지 이어져 있지만, 이 앞부터는 완전히 끊어져 있다.

이 앞부터는 엄밀히 제국령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무지에, 오도카니 홀로 남은 아르테.

조금 쌀쌀한 날씨였지만, 주변 은은하게 깔린 안개로 인해 더욱 춥게 느껴졌다.

아르테는 길을 따라 걸었다.

조금 더 걸으니, 제국의 경계를 지키는 감시 초소가 보였다.

“멈춰! 넌 누구지?”

“이 근방에서 못 보던 사람인데.”

잠시 그들의 속마음을 읽은 아르테는 대뜸 말했다.

“이곳의 책임자와 만나게 해주세요.”

“뭐라고? 네가 뭔데?”

“이곳 초소의 대장은, 분명 월슨이었죠?”

“…대장님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단숨에 달라진 병사들의 태도.

하지만, 그녀가 말할 건 병사들의 대장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뇨. 전 이곳을 지나갔던 제9 황자, 테오드릭 전하를 만나러 온 사람이에요.”

“…그걸 어떻게!”

황자의 동부 행은 꽤 떠들썩한 화젯거리였지만, 만월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제국의 동부, 옛 아티스령 경계에서 아르테는 말했다.

“테오드릭 전하께선 절 모를 테지만, 전 그분에 대해 아주 잘 알아요. 그리고 절 안내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경을 치를 테고요. 그러니-”

아르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사들들은 지휘관용 막사로 향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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