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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73화 (173/227)

#173화

“제 말이, 거짓말이라고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핵심인 진실은 숨기고 있지.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어.”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뭐죠? 아무리 어르신이라도, 제 과거는 알기 어려울 텐데요?”

붉은 눈 부족 족장은 분명 운명석 계약자지만, 그건 아렌도 마찬가지다. 운명석 계약자는 다른 계약자의 능력으로 간섭할 수 없다.

노인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야, 운명석에게 받은 축복 없이도 사람이 진심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내가 얼마를 살았을 것 같나? 벌써 백 해가 조금 넘었어.”

‘…백 년? 그거 굉장하네.’

비쩍 말라 살갗이 온통 쭈글쭈글한 노인이었지만, 백 년이라니.

아렌은 그만큼 오래 산 사람을 본적 없었다.

“이만큼 살아오면,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짐작하게 된다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긴.’

아렌도 사람의 속내를 짐작하는 기술을 황궁에서 독학했다.

온갖 음모에도 휩쓸리지 않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귀족과 황족들의 눈치를 보며 20년간 갈고닦은 기술이니, 아렌보다 오래 산 사람이 아렌과 비슷한 특기가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럼, 저 노인에게 거짓말은 무리인가?’

노인을 어떻게 대할까 아렌은 조금 경계했지만, 노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 걱정하지는 말게. 자네의 능력이 뭔지,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 보나 마나 운명석 계약자인 것조차 저들에게는 비밀이겠지?”

“-원하는 것이 뭡니까?”

아렌이 저들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들킨 시점부터, 이미 아렌은 노인에게 약점이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것이라. 그건 이쪽에서 물을 말인데. 자네들은, 산맥 너머에 있는 땅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왜 불모지인 이곳 설원까지 넘보는 거지?”

노인에게는 무언가를 숨겨봤자 소용없다고 판단되었다. 아렌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어르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아렌은 털어놓았다. 황제가 네 아들에게 준 시험. 북쪽을 고른 레온나토스. 길을 뚫는 작업과 그 와중 알게 된 옛 황제의 업적까지.

“흠, 족장이 되기 위한 시련과 다름 없다는 건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노인이 지적했다.

자신이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한 아렌은 두 눈을 끔뻑였다.

“응? 본인은 모르고 있는가 본데, 자네는 황자의 일 외에도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곰곰이 생각해보면 눈치챌 텐데.”

“…그렇군요.”

아렌은 수긍했다.

아렌 자신조차도 잊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 하는 욕망은 존재한다.

“실은, 당신들이 운명석이라 부르는 그 돌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황자의 시험 무대가 북부임을 알았을 때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어쩌면 제 생각보다도 더, 운명석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을지도 모르죠.”

말이 나온 김에, 아렌은 물었다.

“이 마을의 차기 족장은 산맥 너머의 정주민들이 이곳에서 도망친 자들의 후예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흥, 우리의 케케묵은 전승이지. 설원에 남은 자들은 과거의 맹약을 지금까지 지키는 자들, 산맥 너머 안락한 곳으로 도망친 비겁자가 지금의 머무는 사람들이라는.”

“…맹약이요?”

“그리 진지하게 들을 것 없네. 우리들 중에도 그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지금 설원의 사람들은 단지 이곳이 삶의 터전이니까 계속 살아오고 있을 뿐이야.”

“맹약이라니, 그게 뭐죠?”

“자네도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나?”

‘…운명의 산. 그리고 운명석.’

아무것도 없는 설원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생각나는 것은 저것밖에 없다.

‘온천 지대를 금기의 땅이라 부른 것도 알 것 같군. 자신들이 지키고 봉인해야 할 운명석이 멋대로 흘러나와 모이는 곳이니까, 당연히 터부시할만 하지.’

아렌은 말했다.

“…제국은, 산맥 너머로의 진출을 시도할 겁니다. 산맥을 넘는 길을 만드는 것이 황제의 시험 내용이었고, 그 길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사실은 보통의 경우와는 선후가 반대다.

원래는 살기 좋은 곳에 사람이 모여 마을이 생기고, 왕래를 통해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지니까.

하지만, 레온나토스도 지금은 정말 북부 개척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온천지대를 제국이 관리해, 제2, 제3의 제이드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위험한 운명석 계약자 한 명이, 제국에 전쟁보다도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걸 이미 알게 된 이상 관리는 필수다.

“만약, 제국이 온천 지대에 마을을 세우고 관리한다고 하면 눈의 사람들은 순순히 용납할까요?”

“자네들이? 무슨 수로? 누구도 운명석을 통제할 수 없네. 보초를 세우면 보초가 계약할 테고, 이미 계약한 누군가가 관리한다면 그가 빼돌리고 자신의 심복에게 주겠지.”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곳을 그냥 내버려 두면, 눈의 사생아들은 혼자서 설원을 넘지 못해.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제이드라는 눈의 사생아도 결코 산맥을 넘지 못했을 거야.”

“…아뇨. 그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추위를 느끼지 않았어요. 그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뿐. 혼자서 설원을 지날 능력은 애초에 가지고 있었어요.”

“…….”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노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니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지나친 억측입니다.”

“…….”

노인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어르신?”

“제이드가 운명석에 빈 소원은 무엇일까.”

뜻밖의 질문. 아렌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글쎄요? 확실하게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 얼어죽고 싶지 않다, 이런 단순한 소원이었던 것 같은데요? 남쪽으로 향한 것도 그렇고.”

“굳이 주변 사람을 모두 얼려 죽이면서까지?”

“…….”

전까지 아렌은, ‘남이 얼어 죽어도 상관없으니 나만 살아도 된다는’ 제이드의 못된 심보가 능력으로 발현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그게 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어쩌면 그가 가진 소원은 훨씬 단순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 단순히 추위를 끝내고 싶다거나, 모든 사람의 위에 서고 싶다거나. 어쨌건 그는 남쪽으로 향했지만, 사실 그가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은 오히려 북쪽이었을지도 모르지.”

“…북쪽이요?”

“그래. 방금 자네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는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종종 있으니까.”

무의식적인 소원이 운명석에게 받는 능력으로 주어진다면, 제이드의 주변으로 오는 강렬한 기온 하강도 어쩌면 설원 더욱 북쪽의 인상이 은연중에 투영된 것일지 몰랐다.

‘그럼, 북쪽에 있는 건-’

“그래. 아마 자네 생각이 맞을 거야.”

노인이 아렌의 생각을 읽고 앞서 말했다.

운명의 산.

모든 운명석이 나오는 원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아직 살아서 그 땅을 밟은 자는 아무도 없다고 알려졌지만…

“모르긴 몰라도 제이드라는 자의 능력이라면, 그곳에 능히 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제이드는 스스로의 진짜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운명의 산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마치, 그런 운명이기라도 한 것처럼.’

잠깐 들었다 사라진 의문을 아렌은 애써 외면했다.

*****

대륙의 최남단, 비탄의 바다 위 우뚝 서 있는 비원궁.

새로이 대주교의 자리에 오른 로이터는 법장을 휘두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아직도 아르테는 찾지 못했나!”

“그, 그게…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위장한다고 해도, 추격자의 낌새만 보여도 곧바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통에-”

“그래도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하는 게 자네들 일이야!”

“하지만, 정말 그녀를 막으려면 교국 안 모든 여자들의 이동을 막아야 합니다. 그만한 명령을 내린다면 비원궁 밖의 신도들조차 비원궁의 내홍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르테를 잡는 게 급선무야!”

아르테가 그냥 정적이라면 이처럼 극성을 부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약관이 조금 넘는 나이에 대주교 직전까지 다다라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요물이었다.

그녀가 살아있는 한, 아직 목숨만은 붙여둔 반(反) 로이터 세력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

로이터의 불똥은, 옆에서 한가하게 지켜보던 라이안에게 쏠렸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조금도 힘을 빌려주지 않으십니까?”

“아르테를 쫓아낼 때 병사들을 빌려주지 않았나? 제국의 병사가 비원궁 밖까지 돌아다닌다면 괜한 오해를 살 뿐이겠지. 이 나라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이미 선을 몇 번이고 넘기도 했고.”

“선을 몇 번 넘었다면, 한두 번은 더 괜찮지 않습니까! 전하와 전 한배를 탄 몸입니다! 제 몰락은 곧 전하의 몰락이라는 뜻과 다름없습니다!”

“그때는 그때지. 잘못된 선택이라면, 기억하고 다음에 다른 선택을 하면 그만이니.”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까지 와 있습니다! 어찌 다음을 말씀하십니까!”

로이터가 소리를 빽 질렀다.

라이안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움찔했지만, 라이안은 그들을 여유있게 제지한 후 말했다.

“자네가 이토록 조급해하니 하는 수 없군. 조악한 추측이네만, 들어보겠나?”

“…부디 말씀해주시지요.”

“주교 아르테는 아마도, 제국의 열두 번째 황자인 레온나토스의 비서관과 연이 닿아있어.”

“…비서관과요? 황자가 아니라 말입니까?”

“정직과 청렴만이 장점인 녀석이라 말이야. 그 녀석과 관계된 협잡은 보통은 그 부하인 비서관, 아렌의 독단인 모양이더군. 레온나토스는 대강 눈치챈 후 묵인하는 듯하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라이안은 창밖을 바라봤다. 비오는 바다 특유의 음습한 하늘이 바다 너머로 거칠게 펼쳐져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 남쪽. 그곳에 길은 없다.

“교국 안에 아르테에게 남아있는 끈이 없다면, 아르테는 어디로 향할까. …짐작이 가나?”

“…설마, 북부?”

“지금 레온나토스는 황제 폐하의 임무로 제국 북부, 얼어붙은 산맥 부근에 있다더군. 아르테가 어디로 향할지, 짐작이 가겠지?”

라이안은 대놓고 흥분한 로이터를 부추기고 있었다.

로이터의 측근들은 우려를 표했다

“하, 하지만 성하! 교국의 사람을 제국령으로 보내고, 그것을 들킨다면 제국에는 큰 빚을 지게 됩니다!”

“빚이라. 빚 또한 자산이라고들 하지. 생길지 안 생길지도 모르는 빚보다, 지금 더 처리하고 싶은 게 있는 것 아닌가?”

흥분으로 거칠어진 로이터에게, 라이안의 제안은 너무도 달콤했다.

“자네가 만약 북부로 사람을 보낸다면, 내가 지원해줄 수도 있는데.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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