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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72화 (172/227)

#172화

스윽.

스으윽.

자신의 누운 몸이 그대로 미끄러져 가는 감각에, 아렌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떴다.

말에 탄 감각은 아니었다. 말의 걸음걸이 특유의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여기는-”

“정신이 들었나? 갑자기 쓰러지다니, 평소에 특별히 더 병약한 것도 아니었잖아. 원래 그런 캐릭터였나?”

“…최근엔, 이따금 이렇더군요.”

“아, 하긴. 폐하께서 습격당했을 무렵에도 일주일간 앓아누웠었지. 기억나는군.”

아렌의 몸은 유랑족이 가져온 썰매 위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타고 온 말이 눈폭풍에 모두 얼어죽어, 루카스는 썰매 옆에서 눈길을 걷고 있었다. 황자에게는 힘든 여정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기가 묘하단 말이야. 눈폭풍이 온다는 건, 역시 점괘였겠지? 이곳 현지인들조차 모르던 사실이었으니 말야. 네가 앓아누운 건 점괘의 반동인 건가?”

“…그럴지도 모르죠.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아렌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렌은 어느 정도의 언령이 얼마 만큼의 반동으로 다가오는지, 아직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아렌은 누운 채로 주변을 살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썰매를 끄는 사람들이 보였다. 전에 사야가 동행했을 때는 개썰매였지만, 이번에는 인력으로 끄는 썰매였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우릴 습격했던 자들의 마을로 가는 중이지. 우릴 변호했던 유랑족 소녀도 함께 가는 중이야.”

“…만약 쓰러진 저 때문이라면, 이제 일어났으니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당장 몸을 일으키려는 아렌.

하지만, 아렌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히 오기 부리지 말고 누워있어. 어차피 너 때문에 거길 가는 것도 아니야.”

루카스의 말에 아렌은 얌전히 썰매에 몸을 뉘였다.

일어날 리 없는 눈폭풍을 일으킨 대가로, 다시금 앓아눕게 된 아렌.

하지만 이 정도 반동도 아렌이 상정한 것에 비하면 너무 작았다.

‘만약, 비를 내린다거나, 눈이 모두 녹을 만큼 더워진다고 했다면 이것보다 훨씬 반동이 컸겠지?’

자신들조차 예측하지 못한 눈폭풍이 불었을 때, 유랑족들은 일어날 리 없는 일을 겪은 기색이 아니었다.

자신들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을, 이방인인 아렌이 예견했다는 부분에 놀란 것이다.

‘전조도 없던 눈폭풍은 이례적이긴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건가.’

아렌의 언령으로 일어난 눈보라로, 일촉즉발이던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아렌은 지금 저들의 마을로 향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정말 아렌 일행을 죽일 거였다면 굳이 마을까지 데려갈 필요도 없을 터였다. 사실이야 어쨌든, 저들은 본인들이 정말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아렌? 일어났어?”

아렌의 시야 한편에 흰색 후드를 둘러쓴 머리통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유랑족 소녀 사야였다.

“그래. 아까는 도와줘서 고마워.”

“뭘. 그렇게 치면 너흴 둘러싼 사람들도 나랑 같은 눈의 사람들인데 뭐.”

“…그런데, 지금 저들의 마을로 가고 있다고? 왜지?”

“자기들만으로는 판단이 안돼서, 족장에게 물어보고 싶다나 봐.”

“족장?”

“그래. 너무 걱정할 필욘 없을 거야.”

사야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눈의 사람도 마을에 초대한 사람을 해치지는 않으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곧바로 금기의 땅으로 추방되지. 그리고-”

사야가 아렌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저씨 두 명을 관문으로 보냈어. 만약 너희가 돌아가지 않으면 붉은 눈 부족이 가장 먼저 의심받겠지.”

‘저 부족 이름은 붉은 눈인가?’

썰매가 지나가는 평원의 색깔은 온통 하얄 뿐이었다. 그런데 눈이 붉다니, 생각나는 건 하나 뿐이었다.

‘부족 이름에 피를 연상시킬 정도로 호전적인 건가? 저런 부족 몇이 연합한다면…’

그들을 제압하는 데는 별문제 없겠지만, 설원에 그들의 피가 뿌려지는 상황 자체가 제국에는 악재가 된다.

설령 제국이 필요한 만큼의 자위권만 행사했더라도, 유랑족들은 동족의 피가 흐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테니까.

지금은 저 불쾌한 오해를 푸는 것이 먼저였다.

‘…좋게 생각하면, 가장 강경한 부족의 오해를 풀면 나머지를 설득하기도 한결 쉬울 거야.’

썰매에 실린 채 누운 자세 그대로, 아렌은 마음을 다잡았다.

*****

붉은 눈 부족의 마을은 걸어서 이틀이나 더 가야 했다.

이틀째 낮부터는 조금씩 몸이 움직이기 시작해, 얼마 뒤에는 아렌은 썰매 위에 걸터앉는 정도로는 움직일 수 있었다.

“호오,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돌아보는 루카스에게, 아렌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걷는데 제가 썰매 위에 있다니.”

“무슨 소리. 몸이 불편한 자가 편히 가는 것이 당연하지. 항상 책상 앞에만 있으니 가끔은 움직이는 것도 나쁘진 않군. 조금 추운 게 단점이려나.”

레온나토스 만큼이나 책상 붙이로 유명한 루카스지만, 이만큼의 움직임은 버틸 수 있다. 레온나토스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성인이기도 하고,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단련 역시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유랑족들은 원래 이만한 거리를 걸어 다니나?”

“평소에는 개썰매를 쓰지, 높으신 나리.”

루카스의 질문에 대답한 건, 곁에 있던 사야.

“이만큼 먼 거리는 보통 데려오는데, 개를 두고 온 게 이상하긴 해. 물론, 그 덕분에 눈 폭풍에 죄다 죽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면 사야 너도 개를 끌고오지 않았네?”

“응. 주술사 할망이 개를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거든. 왜 그랬는지는 몰랐는데, 이제 알겠네.”

유랑족 마을의 족장과 족장 후보는 모두 운명석 계약자들이다. 그 주술사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아렌이 눈폭풍을 불러올 것을 어느 정도 예견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썰매 위에 앉아서 한참을 가던 아렌은, 순간 눈을 비볐다.

어쩐지 풍경이 이상하게 보였던 탓이다.

“…눈이, 붉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화 솜처럼 하얗던 눈밭이, 조금 분홍 색을 띄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앞으로 점점 나아가면 갈수록 그 색은 더 진해지고 있었다.

“말했잖아? 붉은 눈 부족이라고. 이 부근 눈은 조금 빨간 색이야. 그래서 붉은 눈 부족은 이 주변을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하지. 별 의미없는 투정일 뿐이지만.”

유랑족에게 영토의 개념은 없다.

하지만 그곳에 계속 터를 잡고 살아가, 부족 이름까지 붙은 자들이니 자신의 땅이라 주장하는 것쯤은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붉은 눈이라. 흥미롭군.”

루카스가 옆에서 눈을 빛냈다.

“책에서 본 적 있네. 이따금 흙먼지가 섞인 눈은 색깔을 띤다고. 노란색 눈이나 초록색 눈도 보고된 적 있으니, 당연히 붉은색 눈도 있겠지. 아마 철 성분이었나? 그럴 거야.”

“철 성분이라. 그럼 이 땅 부근에 철광맥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어느 땅의 흙먼지가 섞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을 찾으면 가능성은 있지.”

설원은 제국의 사람이 살아가기엔 혹독한 환경이지만, 광맥의 규모에 따라 광산이 들어설 가치는 충분히 있다

특히 양질의 철광은 국가의 역량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주요 요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썰매는 눈이 붉어진 땅을 몇 시간 정도 더 지났다.

이윽고, 눈밭을 파 만든 유랑족의 마을이 드러났고, 그곳에서 오랜 세월 쪼그라든 듯한 인상의 노인이 걸어나왔다.

붉은 눈 부족 전사 벤조르는 얼른 노인에게 달려갔다.

“어르신. 지금-”

“그래. 알고 있다.”

벤조르의 보고를 듣지도 않고 대꾸한 노인. 벤조르도 익숙하다는 듯 물러났다.

‘-저 노인도 역시 운명석 계약자인가? 하긴, 그렇겠지.’

유랑족 마을의 족장과 족장 후보는, 필연적으로 운명석을 지니고 있다. 운명석과 계약하는 것이 곧 유랑족 족장이 되는 조건인 만큼.

더 나아가면, 벤조르는 운명석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계약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옆에서 사야가 소곤거렸다.

“붉은 눈 족장 할배는 그 사람 과거를 다 알 수 있어.”

“…아하.”

말하자면, 실종된 아르테와 유사한 능력이었다.

‘과거뿐 아니라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아르테의 능력이 더 범용한가?’

혹시 또 모른다. 저 능력이, 개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과거의 내용조차 읽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르테의 능력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지점이 생긴다.

‘이제야 왜 굳이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겠군.’

온천 지대의 학살에 대해 자신의 족장에게 물어본다는 것도 이런 의미였으리라.

어떤 해명보다도 노인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빨리 진상을 밝히는 길이니까.

“-흐음.”

부족들을 따라온 기사들의 면면을 훑어보던 노인의 시선이 아렌에게서 머물렀다.

노인의 눈이 빛났다.

‘내가 운명석 계약자인 걸 눈치챘군.’

아렌의 과거를 읽어서가 아니라, 아렌의 과거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벤조르.”

“네, 어르신.”

“저들은 눈의 사생아들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진범을 친절히 자신의 땅에다 풀어놓기까지 했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말야. 자신들의 손으로 다잡았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일말의 긴장을 하던 유랑족 전사들은 그제야 몸의 긴장을 풀었다.

‘…내가 운명석 계약자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 건가?’

아렌의 과거를 읽지 않아도, 기사들을 통해 진상에 도달하는 건 쉽다.

‘나를 언급하지 않는 건 배려심 때문인가, 아니면-’

아렌과 교섭할 생각이 있다는 뜻일까.

교섭할 생각이 있다는 건 벤조르같은 강경파가 아니라는 뜻이고, 조건에 따라 제국과 협력할 여지도 있다는 뜻이다.

아렌의 복귀가 늦어져서 레온나토스는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어쩌면 그 시간에 걸맞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우선, 아렌이라고 했나? 몸이 괜찮다면 차라도 들겠나? 직접 대접하지.”

“네, 좋습니다.”

“모두 저들을 큰 방으로 안내해 대접하게. 저기 깡마른 분은 귀하신 몸이니 특별히 더 신경 쓰도록 하고.”

아렌은 루카스에 눈짓하곤 비틀비틀 걷는 노인을 따라 눈밭 아래 파인 방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참호를 파 마을을 만든 건 회색 이빨 부족과 마찬가지지만, 천장이 달랐다.

눈폭풍을 피할 때 저들이 잘라낸 눈벽돌로 막은 것처럼, 마을의 지붕 역시 눈을 잘라 쌓아, 돔처럼 굳힌 형태였다. 붉은 눈 벽돌은 빛을 투과해, 붉고 은은한 빛이 방안을 신비롭게 꾸몄다.

노인은 이끼를 끓인 차를 아렌 앞에 놓은 후, 다짜고짜 물었다.

“운명석은, 부모에게서 받은 건가?”

“…네. 어릴 때, 헤어지던 부모님이 준 유일한 물건입니다.”

“흠, 그렇군. 네 부모는 어느 부족의 족장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혹은, 족장 후보였거나. 아렌과 계약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아렌의 부모는 운명석과 계약하지 못했다.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과거보단,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그 중 자네가 가장 숨기는 게 많아 보였지만, 하필 자네의 과거만 읽을 수 없군. 자네의 능력은 뭐지?”

“그걸, 말씀드려야 할까요?”

“난 자네의 일을 황자에게 말하지 않았지. 지금이라도 상관없네만.”

“…어차피 제가 아니라도 다른 이들에게서 과거의 일을 알아냈겠죠. 이미 어느정도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 한들 자네가 직접 하는 말보다는 못하겠지.”

노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렌은 툭 내뱉듯 말했다.

“후, 제 능력은, 미래를 예지하는 것입니다.”

노인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건, 거짓말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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