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유랑족 출신?”
유랑족 전사가 아렌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루카스는 ‘그러고 보니’하는 표정으로 새삼 아렌을 돌아봤다.
유랑족을 유랑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징은 특유의 복식과 문화 정도뿐. 복식을 바꾸고 예절을 몸에 익히면, 제국민과 유랑족을 구별하기는 누구도 쉽지 않았다.
“허! 네가 우리 동족이라고? 그런데도 머무는 사람의 앞잡이로 다니면서 그 꼬락서니냐?”
“그래, 완전히 제국 사람 같지. 첫눈에 사람 됨됨이를 알아본다는 당신조차 헷갈릴 만큼.”
“…흥!”
“제국은 내 출신을 모두 알면서도 날 중용해줬다. 제국은 사람의 출신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 오히려 차별은 당신이 하고 있지. 아닌가?”
아렌의 말은 거짓말이다.
당장 산맥을 넘은 운명석 계약자 제이드만 해도, 유랑족을 경멸하는 상인의 말을 듣고 능력이 다시 폭주했다. 제국에서 유랑족 차별은 실존한다.
다만, 아렌은 운 좋게도 주변에 그걸 신경쓰지 않는 자들만 있었을 뿐.
‘…그리고,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된다면 정말 대부분 해결될 일이기도 해.’
아렌은 말했다.
“말했다시피 넌 애초부터 틀렸어. 우린 이곳에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 당신은 우리를 포위하고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부터 잘못됐지. 지금 위기에 몰린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니까.”
둘러싼 유랑족 전사들은 여전히 창을 겨누고 있었다.
기사들은 혹한의 추위에 대비해 철갑옷을 두고, 가죽갑옷에 두꺼운 천옷으로 온몸을 둘둘 감쌌다.
그것으로도 어느 정도 방호는 되지만, 평소의 철갑옷에 비하면 빈약한 수준.
그럼에도, 말에 내린 채 투박한 창을 들이밀고 있는 자들을 겁낼 정도는 아니다.
“다시 말하지. 이건 허세도, 협박도 아니야. 이건 제안이다.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의 제안.”
포위된 상황이나 아렌이나 루카스, 혹은 기사 몇몇이 다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쪽은 여전히 기사단이었다.
“…족장은, 머무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했지. 머릿수에서 무기까지 설원과는 비교도 안 된다면서. 하지만 난 안 믿어! 이곳에서의 의무조차 저버리고 산맥 아래로 도망친 자들의 후손 따위,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려고!”
‘…도망쳐? 산맥 남쪽의 사람들이?’
유랑족 전사의 말에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유혈사태를 막는 쪽이 우선이었다.
“이야기라면 찬찬히 들어주겠어. 그럴 거면 일단 둘러싸고 있는 창부터 내려.”
“창을 내려?! 우리가 왜!”
“아까 말했듯 여기서 너희를 다 죽이는 건 간단한 일이다. 그 뒤 제국과 설원 간의 전면전이 일어나더라도 제국은 개의치 않을 거야. 정말 네 말대로 우리가 눈의 사생아들을 다 죽였다 치자. 우리가 그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닌가? 지금 너희 행동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아.”
그들에겐 괴로운 양자택일이다. 제국이 온천지대를 모두 쓸어버렸다면, 응당 그 무력으로 나머지 설원 전체도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제국에 설원 전체를 감당할 힘이 없다면? 당연히 온천지대의 눈 사생아들을 감당할 수도 없었을 터.
‘…양자택일? 아니, 그보다 더 나빠.’
그리고 진실은 더 가혹하다.
제국에는 온천지대 살육의 범인이 아니고 모여있던 눈 사생아들을 상대할만한 힘도 없지만, 설원에 흩어져있는 100개 부족을 상대할 역량만큼은 차고 넘칠 만큼 있다.
“…이 자식이!”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유랑족 전사의 창이 아렌에게 한층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창은, 아렌의 목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말이 조금만 더 움직이면 그 반동으로 찔려버릴 정도의 위치까지.
“…아렌 님.”
기사들도 더 이상의 인내는 한계였다.
“명령해주십시오. 이 이상 참지 못하겠습니다. 이 무도한 놈들을 모두 쓸어버려도 설원 전체와 척지진 않을 겁니다.”
“이미 대화할 생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기사들의 재촉에 아렌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여기까진가?’
여기서 최악은 아렌과 루카스, 기사들이 저항하지 않고 모두 죽는 것. 그럼 레온나토스와 제국은 즉각 설원을 토벌할 거고, 제국은 부족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한데 묶어 인식할 것이다.
여기서 20여 명의 유랑족을 죽이는 것이, 차라리 나머지 유랑족들과 대화할 길이 남아있는 셈.
아렌이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였다.
“…잠깐만. 누가 오는데?”
말 위에 타 있었기에 유랑족들보다 시야가 높았다.
아렌의 눈에 무언가 흰 설원 위를 타박타박 걷는 모습이 보였다.
흰 옷을 입어 설원에서 잘 보이지 않는 인물은, 가까이 왔음에도 그 몸은 여전히 작았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열 명 남짓의 유랑족 전사들.
작은 아이의 실루엣은 전에도 본 적 있었다.
“…사야?”
체구가 작은 유랑족 소녀, 사야는 아렌에게 창을 겨눈 전사에게 외쳤다.
“그만두세요, 벤조르 아저씨!”
“…사야?”
“자 사람들은 금기의 땅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저도 같이 동행했고, 이미 도착했을 때 그 안의 모두가 죽어 있었으니까!”
“…글쎄. 넌 그렇게 말해도, 또 모르지. 이미 넌 저들이 꽤 마음에 들었잖아? 거짓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벤조르라 불린 유랑족은 여전히 창을 내려놓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사야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 아렌에겐 오히려 악재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곳의 모두를 죽이고 나중에 변명했을 테지만, 제국에 우호적인 사야네 부족이 가까이 온 이상 그들 앞에서 칼부림을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비정한 방법도 아직 남아 있었다. 도와주러 온 사야와 회색이빨 부족 전사들까지 모두 죽인 다음, 그들이 서로 칼부림을 했다고 둘러대는 방법.
‘…아무리 내가 레온나토스보다는 비정하다지만, 역시 그렇게는 못 하지.’
되도록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이럴 때가 아닐 텐데?”
“넌 조용히 해, 이방인!”
“시끄러. 앞으로 10분 뒤면 눈 폭풍이 몰아칠 거야. 모두 꽝꽝 얼어붙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던가.”
“…눈 폭풍! 어이, 이것 보라고!”
기사들을 둘러쌌던 유랑족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유랑족 출신이라지만 설원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무지렁이가, 있어야 할 전조조차 없는 눈폭풍을 말하고 있다니.
“이봐, 사야. 너희 마을 사람들은 이런 녀석을 대접해준 거냐? 물론 웃기긴 하겠네.”
“…아저씨들?”
사야는 벤조르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과 같이 온 전사들에게 눈짓한 후, 말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을 뿐.
“뭐, 뭐야! 너까지 머리가 돌아버린 거야?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설원의 아이가… 이만큼 화창한 날씨는 보기 드물다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오늘 날씨는 맑아요. 변덕스러운 하늘과는 거리가 멀죠.”
“그래, 그렇잖아!”
“하지만-”
사야는 딱 잘라 말했다.
“아마, 아렌이 한 말이 맞을 거예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
사야는 딱 잘라 설명하지 못했다. 그냥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일탈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족장 후보인 벤조르는 사야의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족장 후보라는 뜻은, 그녀도 금기의 땅에 있던 운명석을 지니고 있다는 것.
벤조르는 아직 운명석과 계약하지 못했다. 그런 낌새조차 없다.
하지만 사야는, 자신조차 모를 뿐 이미 운명석과 계약했다고 알려진 인물.
다른 부족에도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녀가 딱 잘라서 하는 말이 운명석의 능력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는 한, 웃어넘길 수는 없다.
벤조르는 아렌이 아닌 사야를 믿었다.
“-젠장할! 이봐! 얼른 땅을 파! 어서!”
겨눈 창을 내려놓고 서둘러 땅을 파기 시작한 유랑족 전사들.
말이 딛고 설만큼 단단한 땅은, 실은 오랜 세월 견고하게 압착된 눈이었다. 눈을 칼로 잘라 벽돌처럼 위로 세우는 사람들.
“…저건 못 보던 방식인데?”
“땅에서 잘라낸 눈으로 둥근 지붕을 세우는 거야. 팔 아프게 천을 들어올릴 필요도 없고 천을 놓칠 염려도 없지. 대신 잘못 만들면 무너져서 복구하기도 힘들어.”
눈폭풍을 피하는 방법은, 아마 각 마을마다 조금씩 다른 모양이었다. 물론 저 방식은 기사들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타고온 말이 있기에, 말까지 보호해야 했으니까.
‘…아니, 10분밖에 없어.’
따라온 기사들 역시 아렌과 함께 눈폭풍을 경험해본 자들이다. 그때와 똑같이 땅을 파려는데, 아렌이 말한다.
“말은, 포기하세요.”
“아렌 님! 하지만 말은-”
“말까지 숨길 시간은 도저히 없어요. 10분 만에 말의 몸까지 숨길 수 있는 땅을 팔 수 있다면 그러시죠.”
“…….”
기사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렌은 루카스를 재촉했다.
“전하께서도 어서, 눈을 파셔야 합니다. 먼저 끝낸 자에게 전하 몫의 눈을 파라고 하겠지만, 시간이 촉박합니다.”
“눈폭풍? 자네들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지?”
황궁에서 곱게 자란 루카스지만 아렌의 말에 군말 없이 눈을 파기 시작했다.
“…다행이군. 추위에 강한 북부 말로 갈아타고 와서. 황궁에서 타고온 말에는 애착이 있어서 말이다.”
“아마 다른 기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기사에게 자신의 말은 또 다른 동료니까요. 실은 잠시 바꿔탄 말을 포기하는 것조차 가슴을 도려내는 심정이겠죠.”
“하지만, 눈 폭풍은 일어난다. 네 말이 맞지?”
아렌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항상 희끄무레하기만 하던 설원에서는 보기 드문 맑은 하늘이다.
하지만, 아렌이 내린 ‘점괘’는 사실로 일어난다.
앞으로 약 6분.
“네, 맞습니다.”
“놀랍군. 소문의 네 점괘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태양을 가라앉혔을 때 이후로 처음인가?”
황자로서의 체통 따위 신경도 안쓰며 눈을 파내고 있는 루카스.
루카스가 흘린 말에 이미 구덩이를 거의 다 파놓은 벤조르가 고개를 들었다.
“…태양을 가라앉혀?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창을 겨눈 꼬맹이는 말이다. 제국에서도 유명한 점술가거든. 어찌나 용한지 태양이 사라지는 것까지도 예측할 정도로.”
“…하지만, 지금 날씨에 눈폭풍이라니, 역시 말도 안 돼!”
“안 믿는 것치고는 구덩이를 알차게도 팠는데?”
앞으로 3분.
“어떤가, 아렌. 이제 다 끝인가?”
“아뇨. 이제 천에 물을 뿌린 뒤, 지붕처럼-”
아렌은 이곳을 처음 겪는 황자에게 달라붙어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황자의 구덩이에 달라붙어 같이 들어갈 기사가 천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건 아렌도 마찬가지. 자신의 손아귀보다는 기사의 억센 손이 더 믿음이 가는지라, 아렌으로선 고마을 따름이었다.
‘…특히, 지금 같은 때는 더욱더.’
당장 바람 한 점 없지만, 혹한의 추위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아렌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아렌의 구덩이에 같이 들어올 기사에게, 아렌은 미리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지만, 저 대신 지붕을 부탁해도 될까요?”
“그야 물론입니다만, 괜찮으십니까?”
“그건 눈폭풍이 지나면 알겠죠.”
기사조차 한눈에 알아볼 만큼 아렌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10초.
설원은 한순간에 얼굴을 바꾼 것처럼 강한 바람을 뿌려댔다.
흩날리는 눈송이에 앞조차 보기 힘든 상황.
“…역시. 내 말이 맞았어.”
언령에 대한 검증에는 정확한 물증이 나올 수 없다. 오직, 심증에 심증을 더할 뿐.
그리고 이번에 또 한 번 강력한 심증이 더해졌다.
‘언령은, 역시-’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아렌은 눈구덩이의 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