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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70화 (170/227)

#170화

“…목적,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렌은 당황했다.

가신이 주군을 위해 하는 일을 ‘목적이 있다’고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의 의미는, 이미 아렌이 레온나토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있다고 확신하는 말투.

아렌으로서는 순순히 긍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계속 부정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겠지.’

루카스가 수긍할만한 사실을 대충 말한 다음 넘어갈 것이냐, 아니면 루카스에게 사실대로 고하고 조금 더 깊은 관계를 도모하느냐.

이미, 아렌에겐 비슷한 관계가 있었다.

레온나토스를 거치지 않고 아렌과 직접 손잡은 제9 황자, 테오드릭이 그랬다.

‘…동맹 이름은, 레온나토스 황제 만들기 동맹으로 지으면 되겠군.’

속으로 시답잖은 농담을 떠올린 후, 아렌은 표정을 정돈하고 반문했다.

“말씀이 조금 짓궂으시군요. 가신이 주군을 황제로 세우는 데에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물론, 필요없는 사람도 있지. 사냥개처럼 충직한 자라면 별다른 이유 없이도 남을 섬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네가 그런 자인가? 내 눈에는 아닌 것 같다만.”

“…….”

‘그러게. 내가 봐도 그건 아니야.’

둘러댈 것인가,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아주 잠깐 고민한 아렌은, 결국 방향을 정했다.

“…물론,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렌의 선택은, 루카스에게 어느 정도 진실을 말해주는 것.

“…호오?”

“레온나토스 전하가 제국의 정상에 오른다면, 저 또한 제국 가장 높은 곳 언저리에 올라서겠지요. 그리되면 레온나토스 전하 외에 제게 간섭할 사람은 없게 됩니다. 물론 레온나토스 전하에 대한 호감과 충성심도 여전합니다만, 섬김에 제 타산이 들어가지 않을 순 없겠죠.”

“…그렇다면, 네 위에 레온나토스가 있는 건 괜찮은 건가? 언젠가는 레온나토스조차도 무거운 간섭이라 느끼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글쎄요. 전하께서는 이미 제가 레온나토스 전하 머리 꼭대기에 올라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으음, 그건 확실히-”

“제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문제는 없겠죠.”

“아니, 내가 보기엔 지금도 이미 아슬아슬 위태롭다만.”

하지만 아렌의 진심은 얼추 느껴졌다. 루카스에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따위는 없지만, 누군가 진심을 담고 하는 말은 그 무게부터 다른 법이다.

아렌이 그에게 물었다.

“그보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전하께서는, 계속 중립을 견지하실 겁니까?”

“…글쎄. 내가 레온 녀석을 도와주거나, 아예 손을 잡는다 치자. 레온이 이겼을 때 내게 돌아오는 게 뭐가 있지? 내가 원하는 것은 이미 작은데, 그 정도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레온 녀석이 능히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야.”

“…….”

루카스가 무슨 말을 할지, 아렌은 알 것 같았다. 그건 레온나토스에게는 확실히 아픈 지점이었다.

“반면 라이안 형님이 이겨 황제가 된다면, 레온을 거들어둔 모든 자들에게 철퇴가 내려지겠지. 딱히 라이안 형님이 남들보다 더 잔혹해서가 아니라, 그게 원래 황궁의 일상적인 법도였으니까. 그렇다면, 설령 중립을 깨더라도 누구의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할까?”

‘…반박하기 아렵군.’

레온나토스는 잔혹하지 않다. 자신을 마지막까지 괴롭힌 적이라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온정을 보일 것이다. 그 행동이 다소 자신에게 해가 되어도 마찬가지일 테고, 자신에게 해될 것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반면 라이안은 특별히 비정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적대시한 자에게는 확실히 그 값을 치르게 할 만큼의 비정함이 존재한다.

라이안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정말 그를 마음속 깊이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중에는 단지 라이안을 적으로 두기 싫어서 협력하는 사람도 꽤 될 것이다.

‘…비정함, 역시 그게 레온나토스의 약점인가.’

하지만 그 부분은 아렌이 어떻게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레온나토스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근본에 닿아있기 때문에.

그때, 루카스가 말했다.

“하지만 까놓고 말해, 레온에게 부족한 비정함은 네 녀석이 채워줄 수 있지 않나?”

“…제가요?”

“그래. 주군 머리 위에 있으면서 맑은 공기만 쐴 생각이었나? 비가 오면 먼저 맞기도 하고, 조금은 궂은 일도 해야지.”

비정함은 그 자체로 강한 동력이지만, 명성에 손상을 입히기도 한다.

제4 황자 가웨인을 둘러싼 헛소문만 하더라도, 그걸 믿는 사람들에게 경외심과 더불어 미치광이라는 낙인을 찍었으니까.

하지만 아렌이 자처한다면 공포와 혐오는 아렌이 받고, 레온나토스는 오직 좋은 부분만 취할 수 있다.

‘…온 천하에 드러나는 걸, 흑막이라 불러도 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그런데, 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야 간단하지. 이대로 가면 이기는 건 라이안 형님일 거다. 하지만 이기는 게 바람직한 자는 레온나토스지. 그건 주위에 모여든 사람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다. 라이안 형님 주변에 이름난 사람이 누가 있지?”

“…….”

아렌은 당장 떠올리지 못했다. 추종자의 숫자는 월등히 많고, 그만큼 재능있는 자도 많지만. 라이안 황자라는 빛이 곁에 있으면 웬만한 인물이라도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건, 가웨인 황자도 마찬가지겠지.’

황자 자신이 너무 밝게 빛나자 주변의 빛을 모두 가려버리는 것.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달랐다.

이미 가웨인과 호각으로 겨루는 검성 급 고수인 더글라스, 낮안개 기사단의 단장이나 최근 불꽃의 기사라는 아명을 얻은 발커스, 머리속에 수만권의 책을 집어넣은 전맹사서 레밍과 태양을 떨어뜨린 점술가 아렌까지.

“더 솔직하게 말해줄까? 네가, 꽤나 유망해 보여서 말이다.”

“…제가.”

레온나토스가 아니라, 아렌이 유망해보여서.

루카스가 말한다.

“여전히 난, 레온나토스와는 손을 잡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와는 잡고 싶군.”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레온나토스 녀석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더러운 협잡은 하지 않으려 할 테니까. 같이 일한다면 답답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너는 다르다.”

루카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는 열 명의 기사들을 곁눈질하고 말했다.

“지금 레온나토스 진영과 라이안 형님 진영의 균형은 팽팽해. 그럴수록, 아주 약간의 차이가 성패를 좌우한다고 봐도 되겠지.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말야.”

“…그러니까, 지금이 공신이 되기에 가장 적기라는 말입니까?”

“공신이라.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조금 덜 좋은 사람이 황제가 되고, 힘을 더하면 더 좋은 사람을 황제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것이 루카스의 진심이라면, 아렌으로서도 나쁠 것 없다.

이미 레온나토스를 건너뛴 동맹을 해봤으니, 두 번째라고 어려울 것도 없다.

“그럼, 루카스 전하-”

아렌이 루카스가 내민 손을 그대로 잡으려는 찰나.

“-뭔가 이상합니다.”

아렌은 말 위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렌 일행이 따라오고 있던 설원 위의 나무말뚝은, 평원 한복판에서 끊겨 있었다. 원래 이곳에 있어야 할 유랑족 마을 옛터는 온데간데없었다.

“이곳은 전에 왔던 곳이…”

그 순간.

아렌의 주위로 눈 평원이 벌떡 일어섰다.

전에 봤던, 유랑족들의 매복 방식이었다. 눈 참호를 판 뒤 위에 흰 천을 덮고 있던 자들.

‘-당했다.’

설원에서 길을 찾지 못하는 제국군에게, 설원에 표시한 말뚝은 길을 찾는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주변에 다른 지형지물이 없는 이상 말뚝을 뽑아 다른 곳에 바꿔 박는 것만으로도 아주 간단하게 속일 수 있다.

주변을 에워싼 유랑족은 스무 명가량. 그들은 모두 기사들과 아렌을 향해 창을 겨눴다. 평소라면 말에 탄 기사 열 명을 제압하기에 역부족인 숫자이지만, 이곳이 설원이고 포위되었다는 점이 기사들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그들 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전사가 물었다. 예전 유랑족 소녀 사야의 마을과는 다른 부락 출신 같았다.

“너희, 머무는 사람들. 왜 금기의 땅에 있던 동포들을 모두 죽였지?”

“…너희가 그 오해를 했음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니야.”

대답한 아렌을 보고, 유랑족 전사는 창을 겨눈 자세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리군. 네가 이곳 책임자냐?”

지위는 그렇지 않더라도, 직책은 그렇다. 아렌이 대답하기 위해 루카스를 돌아본 순간.

“아렌 나리. 어서 대답해주시지요.”

“…….”

루카스는, 얼굴 낯 하나 안 바뀌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렌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양반이.’

*****

물론 루카스의 행동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선 아렌이 황자인 루카스를 지켜야 했고, 저 반응은 아렌을 도와주는 행동일 뿐이다.

‘하지만, 레온나토스의 반응은 달랐겠지.’

자신 대신 아렌이 나서게 할 수 없다며 나서서, 일이 더 복잡해졌을지도 모른다.

루카스에 대한 평가 중, 원리원칙만 따르며 고지식하다는 점이 있었다.

지금 루카스의 행동이야말로, 그 나름대로 원리원칙만을 따르며 고지식한 행동일 뿐,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 한 행동이 아니다.

‘같이 손을 잡기에는 순발력이 꽤 괜찮아. 레온나토스의 바보같은 고지식함과는 다르니까.’

물론 레온나토스의 그 바보같은 고지식함이 주변의 인재들을 끌어모았지만. 각자 필요한 역할이 다른 법이다.

아렌은 한발 앞서며 말했다.

“난, 셰오덴 제국의 제 12황자 레온나토스 브륀할트 전하의 가신인 아렌이라 한다.”

창을 겨눈 전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자? 산맥 너머 추장의 아들인가? 하지만 열두 번째 아들이라니, 설령 실력순으로 뽑는다고 해도 차기 추장으론 가망이 없지 않나?”

“글쎄. 우리 전하께선 황궁에서도 두 손가락에 꼽히는 유력주자이신데. 물론, 첫 손가락은 장자이신 제1 황자시지만.”

아렌의 말에 전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미안하군, 가웨인. 이번에만 좀 빠져달라고.’

장자와 직접 경쟁하는 열두 번째 황자. 그것만으로도 부족 사회의 전사에게 충분히 어필하는 요소다.

“…어쨌든 방금 말했듯, 저주받은 땅에서 있었던 일과 우리는 아무 관련이 없어. 우리가 가 있었을 때는 이미 시체의 산이 있었으니까. 증인도 있어.”

“증인?”

“우리와 동행했던 유랑족 소녀. 원래 이 말뚝을 따라가면, 그들이 살던 옛 마을터에 도착했을 텐데 말야.”

“아, 회색이빨 부족 말이군.”

그들이 그렇게 불렸다는 건 아렌도 지금 처음 알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데. 뭣보다, 지금 여기 없잖나. 외지인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순 없어.”

“…그곳을 죽음의 땅으로 만든 녀석은 정체를 숨기고 산맥을 넘었어. 산맥 너머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야.”

“그것조차, 우린 알 필요 없지. 외지인의 말이니까.”

“말끝마다 외지인, 외지인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지?”

“그야 척 보면 척 아닌가?”

유랑족 전사는 어깨를 펴며 자신있게 말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

“난 어릴 적 산맥 너머에 버려졌던, 유랑족 출신이거든.”

그 말이 뜻밖이었는지 유랑족 전사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걸 보고 아렌은 고소하게 웃으며 말했다.

“척 보면 척이라면서, 그런 것도 몰랐나? 그런 자가 내린 판단이라니, 알 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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