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협곡 안쪽 길은, 여전히 중간중간 험한 곳이 남아있지만, 이제는 마차 한 대 정도는 지나갈 만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레온나토스는 눈을 빛냈다.
“이 정도면, 마차 행렬도 편도로는 지나갈 수 있겠어.”
마차가 지나갈 만한 폭이 마련됐다는 건, 큰 가치가 있다.
설원에는 건축에 쓸 목재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건축자재를 실은 마차가 설원으로 향할 수 있는 만큼, 개척마을과 도시를 만들 수 있는 첫 단추를 이제야 끼운 것이다.
“…이만한 폭이면 느리지만 도시를 세울 수도 있겠군. 효율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루카스의 지적은 타당했다.
황무지에 도시를 세우는 것 자체는 돈과 시간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유지시키느냐는 것.
수익이 나지 않는 곳에 무한정 돈을 쏟아부을 수는 없고, 지원이 끝난 도시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면 기껏 지은 도시도 금방 황폐해진다.
‘…온천지대에 도시를 짓는 이유, 라. 운명석을 밝히지 않고 납득시키기는 무리겠지?’
뒤에 마차까지 대동한 레온나토스의 행렬은, 3일째 낮이 되어서야 협곡을 통과할 수 있었다.
협곡을 통과하자 나오는 광대한 설원에, 루카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곳이, 밟을 수 없는 땅인가.”
“네. 지금 밟고 있으니 이제는 과거의 명칭이 되겠죠.”
협곡의 길이 조금 더 넓어진 탓인지, 목책 위주였던 협곡 앞 관문에는 벌써 군데군데 석벽으로 교체되고 있었다.
투박하지만 단단하게 깎인 돌벽은, 완공된다면 정식 군대가 아니고선 절대 뚫지 못할 장벽이 될 터였다.
관문의 공사가 빨리 진행된다는 건, 분명 북부 개척의 청신호가 맞다.
그런데, 아렌은 일말의 위화감이 들었다.
‘…돌 성벽을 이렇게 서둘러 올릴 필요가 있나?’
유랑족들을 상대로는 기존의 목벽으로도 충분했고, 애초에 그들을 신경써야 할 만큼 설원의 분위기가 위태로운 것도 아니었다.
속속 협곡을 통과하는 기사들과 마차들을 보고, 관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레온나토스를 맞이했다.
그들의 표정은, 떠나올 때의 여유롭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자네들, 수고가 많군. 이렇게 빨리 관문벽을 속벽으로 교체하다니.”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혹 지금 설원으로 향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저, 유랑족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뭐라?”
“전하께서 황도로 향하시고 얼마 뒤, 관문을 찾아와 시비를 거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부족 단위로 몰려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항의해대는 통에 병사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항의? 설마-”
레온나토스의 불안한 예감.
“…네. 오해인 것 같습니다.”
아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온천지대에서 일어난 대량 살육을, 우리가 벌였다고 착각한 모양입니다. 시기상 우리가 설원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니, 착각할만하죠.”
“하지만, 이 오해는 심히 곤란해.”
제국의 개척마을이 설원에 잘 정착하기 위해선 주변 유랑족들과의 관계개선이 핵심이었다.
계곡을 지나오며, 운명석을 제외하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전해들은 루카스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그들이 온천지대의 일로 화낼 이유가 있나? 각 부족의 낙오자들이 모인 곳이라 들었는데. 자신들이 내친 자들이 죽었다고 갑자기 반발하는 건 좀 수상하군.”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겁니다. 이곳 설원에는 100개도 넘는 부족들이 흩어져 있고, 그곳에서 모인 낙오자들의 사정도 전부 제각각일 테니까요.”
루카스의 의문에 답한 건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아렌이었다.
“죄를 짓고 숨어든 자이거나, 혹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싫어져서 가출했거나. 어쩌면 별 이유없이 그곳에 향한 자들이 있을 수도 있죠. 원래 자신들의 구성원이었으니, 해묵은 감정을 넘어 외부인에게 죽은 것을 용납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
레온나토스의 말대로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 오해를 풀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루카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그 유랑족 소녀와 함께 있었다면서? 온천지대에서 있었던 일이, 기사들이 벌인 짓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겠지.”
“그건 맞습니다만, 어떻게 그녀를 찾죠?”
“…마을을 찾아서?”
“보시다시피, 설원에는 길이랄 것이 없습니다. 설원에서 나고 자란 유랑족조차도 혼자서는 끝없이 펼쳐전 설원을 횡단하지 못하죠.”
아렌이나 레온나토스조차도 설원의 진면목을 아주 조금 맛봤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곳이 처음인 루카스에 경고할) 정도는 된다.
말 위에 타 높아진 시야에서도 설원은 변변한 지형지물조차 없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어디로 가든 눈밭 뿐, 방향을 잘못 들면 곧바로 눈밭에 파묻혀 언제까지고 그대로 얼어붙게 된다.
“전에, 한번 그 소녀를 찾아갔다면서? 그때는 어떻게 찾았지?”
“아렌이 그 당시의 마을이 있던 방향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모 아니면 도였지만, 간신히 방향은 맞았죠. 말뚝으로 표시도 해 뒀습니다.”
“그렇다면, 그 길로 곧장 가면-”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마을을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죠. 주기적으로 마을의 위치를 옮기는 듯하더군요. 그때는 소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도 그럴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루카스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시도 안 할 이유는 없겠지. 마침 그곳까지 이어진 말뚝도 있다고 하니. 그 소녀가 또 기다려주길 빌자고.”
유랑족의 예전 마을 터로 향하기로 한 아렌.
그리고, 거기에 따라붙는 건 제3 황자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레온나토스에 제안했다.
“그런데 레온나토스, 너까지 따라오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비효율적이요?”
“그래. 너만 괜찮다면, 온천지대로 향하지 않겠나? 그 소녀는 내가 만나보도록 하지?”
루카스는 묘하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국의 사정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 너도 언제까지 이곳에 묶여있을 수 없지 않나. 온천지대에서도 너 없이 곧바로 도시를 세울 수 있게 먼저 기틀을 마련해야지. 다행히 그 유랑족과 친분이 있는 건 너보다 아렌이라면서?”
“그건… 확실히 그렇군요.”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레온나토스는 루카스의 말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하지만 형님,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겠나. 네가 데려온 기사들, 또 아렌과 함께 갈 텐데.”
‘…내 의사는?’
가만히 듣고 있던 아렌이 속으로 반문했지만,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아렌에게 발언권은 없는 듯했다.
“그럼, 잘 부탁하지, 아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루카스 전하.”
아렌은 고개를 숙였다.
루카스의 행동이 다소 의아한 아렌이었지만, 방금 그의 표정을 읽고 루카스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렇군. 레온나토스가 없는 자리에서, 내게 할 얘기가 있다 이건가?’
아직 완전히 레온나토스의 사람이 되지 않은 제3 황자였다.
그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서라도, 루카스와의 동행은 아렌도 바라던 바였다.
*****
설원을 따라 늘어서 있는 나무 말뚝.
박은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간 몇 번의 눈보라가 있었는지 벌써 한쪽 면에 얼음 알갱이가 하얗게 달라붙어 있었다.
“흐음, 이걸 따라가면 예전 마을 터가 나온다, 이건가? 확실히 주변에 이정표가 될만한 것이 전혀 없군.”
납득하는 루카스의 뒤로 열 명의 기사가 뒤따르고 있었다.
모두 낮안개 기사단으로, 레온나토스의 심복 중 심복이지만 루카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조난을 가장하고 루카스를 이곳에 묻어버릴 수 있는데도.
‘배짱이 두둑하군. 그에게 욕심만 더 있었다면, 훨씬 성가신 경쟁상대였을 텐데.’
비록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능력 대비 욕심이 적다는 점은 레온나토스와도 비슷할지 모른다.
아렌은 기사들에게 눈짓을 해 조금 멀어지게 한 다음, 루카스에게 물었다.
“전하.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아렌 나름대로 선수를 친 것이지만, 루카스는 딱히 숨기는 기색도 없었다.
“흠, 그저 레온나토스가 없는 자리에서 녀석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아렌이 기사들을 뒤로 물렸기에 이곳의 이야기는 둘에게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렌에게 하는 말이니. 누가 더 듣든 별로 차이 없다는 생각에서일까.
“레온나토스는 영리하지. 그것에 이견을 가진 자는 없을 거다. 하지만, 정이 너무 많고 냉혹한 면이 부족해. 인정이 많다는 것은 좋은 사람의 자질일 수는 있지만, 좋은 군주의 자질이라곤 보기 어렵지.”
“…….”
루카스가 한 말 자체엔 아렌도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쉽사리 동조할 수도 없었다.
“…레온나토스 전하의 가신인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아,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음모를 꾸미려거나 하는 건 아니니. 다만, 워낙에 분석하는 걸 좋아해서 말이다.”
“…분석 말입니까?”
“비정함이란, 제국의 황제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 이대로는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되더라도 균형이 맞지 않아. 그런데, 곁에서 보니 네가 레온나토스에게 없는 비정함을 메워주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다. 제법 균형이 맞아.”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너희를 오래 접한 건 아니지만, 가까이 있어 보니 알겠군. 레온나토스가 이 정도 지위에 올라오게 된 건, 순전히 네 덕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위험하다!’
아렌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려퍼졌다.
지금 황궁에서 레온나토스를 보통의 비서관으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황제조차도 아렌을 직책 이상으로 대우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하지만, ‘직책 이상으로 대우받는 심복’과, ‘주군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간 신하’는 전혀 다르다.
아슬아슬한 선이지만, 그 선을 넘는다면 용인받지 못할 대죄인이 된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하신 모든 일은, 그분의 역량으로 가능한 것이었죠. 저는 그저 옆에서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말에 탄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km를 달리지만, 그 위에 탄 기수가 없었다면 힘들겠지. 말을 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쭉 달리게끔 하는데는 억압이 필요해.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렌 네가 그 억압이로군.”
“…신하된 자가 주인을 억압한다라.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황자가 말, 신하가 기수라니.
보통은 그 비유가 반대여야 한다.
하지만, 저 정도까지 확신을 가진 루카스에게 마냥 얼버무리기도 힘들 것 같았다.
루카스가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아렌, 레온나토스를 황제로 세우려는 목적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