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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68화 (168/227)

#168화

“저는….”

입을 연 레온나토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레온나토스는 쉽사리 그 이상의 말을 내뱉지 못했고, 그건 기다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 듯했다.

“…뭐냐, 날 여기까지 끌고와 놓고, 고작 그 대답조차도 못하겠나? 그렇다면 실망이군.”

루카스는 고개를 젓고 일어섰지만, 엔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아니. 레온나토스, 너는 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할 거다.”

“…엔지 형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루카스의 물음에도 대답하는 엔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레온나토스는, 자신에게 돌아올 뚜렷한 이득이 없음에도 날 살리려는 각오를 보였다. 혹자는 그걸 유약함이라 말할지도 모르나, 아니야.”

“뭐야, 단순히 형님을 살려줬으니 두둔하려는 것 아닙니까?”

“아니라니까! 살리는 데에는,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용기가 필요해! 레온나토스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날 살렸다. 그렇다면, 양심에 의해 죽이는 것도 가능할 터.”

매사에 분석적인 루카스는 어리둥절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에 필요한 마음가짐이 같다니,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군. 지금껏 엔지 형님은 꽤나 손을 쓴 적이 많으니.’

아직 어리던 가웨인을 암살하려 한 것도, 황제 암살을 시도한 것도 엔지였다. 그런 엔지가 하는 말이니 조금은 신빙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형님. 절 두둔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조금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겸양 떨 것 없어, 레온나토스. 분명 넌 먼저 라이안 형님을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든 라이안 형님이 널 공격할 건 분명한 사실이지. 그때가 되면, 넌 주저하면서도 라이안 형님의 목에 칼을 겨눌 거다. 그렇지 않나, 아렌?”

“…그렇군요.”

이 순간 갑자기 아렌이 호명되는 것은 꽤 어색했지만, 아렌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미 아렌을 평범한 비서관이라 생각하는 황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걱정은 기우일 거다, 루카스. 중요할 때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황자들을 제치고 라이안 형님과 맞상대할 수 없어.”

“…확실히, 형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엔지의 말에 루카스가 수긍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렌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과거 제2 황자 엔지와 제3 황자 루카스는 황궁에서도 유명한 앙숙이었다.

대부분 엔지의 선공을 루카스가 받아치는 양상이었지만, 루카스 스스로도 엔지 같은 인물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공표할 만큼, 둘의 사이는 친밀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지금, 엔지가 모든 권력과 욕심을 버리자 둘은 마치 예전부터 막역한 사이처럼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사이에 권력만 없다면 다른 황자들도 이렇게 될까?’

그건 어쩌면 권력만을 쫓느라 혈육에게조차 비정해진 황궁에 염증을 느끼는 레온나토스가 진정 바라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레온나토스 자신이 그 권좌에 올라야 가능하지만.

‘케이크 위 하나밖에 없는 딸기를 먼저 먹어 없앤다면 형제들 사이에서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겠지.’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 제국의 황제 자리를, 고작 케이크 위 딸기로 비유한 아렌이었다.

루카스가 한 질문에 레온나토스는 선뜻 답하지 못했지만, 만약 그 질문을 아렌에게 했다면 아렌은 흔쾌히 답했을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삶을 위해, 아렌은 얼마든지 피를 볼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

아트마 교국의 주교 아르테는 비원궁 아래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조각배는 삽시간에 부서지고, 아르테의 몸은 급류 속으로 휘말려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목격자는 많았지만, 새로이 대주교 자리에 오른 로이터는 여전히 추격과 탐색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얼마 뒤, 비탄의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변을 뒹굴고 있던 아르테의 주교복을 발견했다.

익사한 사람의 몸에서는 저런 식으로 옷이 벗겨지지 않는다. 아르테는 살아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여자가 살아있다고? 대단하군. 사실은 정말 신의 은총이었나? 운명석 따위가 아니라?”

아르테를 마지막까지 추격하던 라이안의 사병들도 그녀가 물에 휩쓸리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녀가 가진 능력은 독심술과 비슷한 무언가일 테니, 급류에 휩쓸려도 무사한 능력이 따로 있지도 않을 터였다.

라이안의 참모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보고했다.

“…그래서, 지금 로이터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역시 부정한 방법으로 대주교 자리를 찬탈한 것이 아니냐며, 정식 대주교는 도망친 아르테가 아닌가 하고요.”

“흥, 그럴만하지.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설령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계속 살아있다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겁니다.”

“그렇겠지. 그 능력은 진정 까다로우니까.”

라이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상황에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

그건, 참모가 보기에 자연스럽지 않아 보였다.

“…라이안 전하.”

“뭔가?”

“저와 전하를 따르는 부하들은, 전하의 한마디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렸습니다.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격인데, 더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모두를 위해서라도 좀 더 진지하게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참모로서는 꽤 용기를 내서 한 말이었다.

“그래, 그렇군.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미안하군,”

‘…전에도?’

라이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참모.

“…전하? 외람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은 지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만. 혹시 제가 기억 못하는 것이라면-”

“응? 이번이 아니었나? 미안하군, 또 착각한 모양이야.”

‘…또.’

라이안은 이따금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제4 황자 가웨인에게도 광증이 있다는 소문은 너무 공공연해서 이제 비밀조차 아니다.

혹시나, 자신의 주군도 광증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참모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왕가나 귀족 핏줄이 진할수록 유전병도 강하게 내려온다지. 설마, 광증도 황가의 내력이 되는 건가?’

참모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참모의 걱정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라이안은 마치 반상 게임에서 처음 보는 국면이라도 보는 듯, 흥미진진하게 지금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번엔 어떻게 되는지, 한번 지켜보자고.”

*****

제2 황자 엔지는 여전히 세상에 드러나선 안되는 사람이다.

엔지는 그대로 은광산에 남았고, 레온나토스와 루카스는 산맥을 넘을 수 있는 협곡으로 향했다.

레온나토스도 없이 공사가 한창인 현장, 광부장 터커는 레온나토스와 나란히 다가오는 루카스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엉? 당신은 또 누구야, 또 귀하신 몸인가?”

재빨리 나선 레온나토스.

“아, 이곳의 책임자인 광부장 터커입니다. 아주 유능한 자이지요. 입은 조금 험하지만, 악의는 없으니 용서하시지요, 형님.”

“유능만 하다면, 예절이 무슨 상관이겠나.”

광부장의 무례에 가까운 말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루카스.

광부장 터커는 머리를 긁적였다.

“황자 나리의 형이면… 또 황자잖아?! 참 나, 이런 변방까지 차례차례로 무슨 일들인지 원.”

“아, 아직 자네에겐 제대로 말하지 않았나? 산맥 너머의 온천지대에, 본격적인 거점 도시를 만들 계획일세.”

“아하. 그래서 기사도 병사도 아닌 사람들까지 저렇게 많이 왔구만? 그거야 상관없지만, 아직 길도 다 닦이지 않은 건 알고 계시겠지?”

“물론이네, 광부장. 산맥 너머에 많은 제국민이 기거할 수록, 이곳 길의 중요성도 더 올라가겠지. 이곳 길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야.”

조용히 듣고 있던 루카스가 한마디 했다.

“다른 불안요소는 없나?”

불안요소, 그게 없을 리 없다.

온천지대에는 먼저 그곳을 선점하고 운명석과 계약한, ‘눈의 사생아들’이라 불리는 유랑족들이 살고 있었다.

군대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위험한 자들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단 한 명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고, 그 범인 역시 제국령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온천지대가 무주공산인 것은 아니다.

“물론 있지요. 산맥 너머 설원에는, 아직도 수십 개의 유랑 부족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부족들이라, 우호적인 자들이 있는가 하면 더욱 공격적으로 다가올 가능성도 있지요. 어떨지 모르는 만큼 더욱 위험합니다.”

“결국, 그들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핵심이겠군. 그동안 연이 닿은 자들이 있나?”

“…저희를 설원의 온천지대로 안내해준 유랑족 소녀가 있습니다만, 그 외에는 아직 없습니다.”

“여러모로 갈 길이 멀군. 어서 가보자고.”

루카스의 채근에, 기사들과 개척단은 바삐 협곡 안을 지났다.

급한 부분은 우선적으로 처리해 마차가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루카스의 관심은 길 상태가 아니라 협곡 벽에 쏠려 있었다.

“…형님?”

“이상하군.”

하늘이 좁아진 것 같은 가파른 협곡 안, 루카스는 눈을 찌푸렸다.

“이 길,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닌 것 같은데?”

“아,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광부장이 말해줬는데, 벽 곳곳에서 쐐기 자국을 발견했답니다. 일부러 벽을 무너뜨려서, 길을 막은 흔적이 있다고요. 아마 건국왕 폐하께서-”

“내 말은 그게 아니다. 이 협곡이 어떻게 만들어졌냐는 말이야. 물이 흐른 흔적도 없고, 산맥을 부자연스럽게 지나지 않냐는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 협곡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면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협곡을 만들었는지. 그것이 루카스의 물음이었다.

일단 건국왕은 시기가 맞지 않았다.

아무리 수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 하더라도, 이만한 공사를 몇 년 안에 마칠 수는 없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좁은 곳에서의 공사는 일할 수 있는 인부 숫자가 정해져 있다.

이곳 길을 뚫는 공사에도 광부장 터커는 백 명 조금 넘는 인원만 주문했고, 그 이상 인원은 불필요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길 곳곳에 제법 큰 동산과 바위가 널브러져 있지만, 그것조차 협곡의 크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 그런데도 터커가 요구한 기간은 일년이었다.

‘…인위적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그 규모는 인위적으로 볼 수 없다라. 마치 고대인의 건축물같군.’

아트마 교국의 성전이라는 비원궁이나, 태양교의 대사원 등, 언제 어떻게 지었는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고 시대의 유적은 곳곳에 존재했다.

“…또 모르지. 과거엔 흔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다른 기술들이 있을지는.”

지금 몰두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루카스는 그렇게 대충 흘렸지만, 레온나토스와 아렌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운명석.’

그리고 향하는 온천지대에는, 그 운명석이 흘러와 고였다.

그 운명석을 어떻게 대할지가, 온천지대에 지을 도시 시설의 핵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흘러드는 운명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의중을 알지 못했다.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게 철저히 숨기거나, 혹은 유용해 자신의 힘을 삼거나.’

둘 다 가능한 선택이었다.

레온나토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흥미가 있다. 아렌은 조금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협곡 안쪽에서, 칼바람이 점차 매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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