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북부에서 내려올 때에는 혼자였지만, 다시 올라가는 레온나토스의 행렬은 그보다 배는 더 많았다.
먼젓번에도 산맥을 뚫고 길을 만드는 인부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외딴 설원에 본격적인 도시를 건설할 인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산맥 너머의 전초기지 겸 거점도시 역할을 할 테니, 그만큼 필요한 인원도 많았다.
하지만, 모인 인원 사이에 제3 황자 루카스의 모습은 없었다.
“…역시, 형님은 오시지 않은 건가.”
“네. 그런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던 듯합니다.”
“아니, 그거야말로 네 잘못이 아니지. 어차피 무리였어.”
불가능한 권유를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도 없다.
단념한 레온나토스는 행렬을 다시 북부로 출발시키려 손을 뻗었다.
그때.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전하.”
“아렌?”
“누가 오고 있습니다.”
아렌의 말대로, 말의 등 뒤에 비쩍 마른 장작처럼 얹혀있는 남자 하나가 대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제국의 제3 황자, 루카스는 대열의 맨 앞, 레온나토스의 옆에 서서야 속도를 늦췄다.
“…루카스 형님.”
“괜한 오해를 하기 전에 미리 말해둔다만, 난 네 부하의 조언에 완전히 동의한 것이 아니야. 다만, 완전히 새로운 마을에서 새로운 율법을 정하는 것에 평소부터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저야 형님께서 도와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형님의 의도가 그게 아닐지라도 다른 의심하는 이들이 분명히 생길 겁니다.”
“의심이라. 하라면 하라지. 어차피 지금 나는 무엇 하나 나올 것 없는 일개 야인일 뿐이니까. ”
대열은 북부로 출발했고, 루카스의 말 역시 자연스레 대열에 합류해 레온나토스와 나란히 섰다.
루카스가 말했다.
“…하지만, 너희가 이토록 조바심을 내는 것도 라이안 형님의 폭주 때문이겠지. 아닌가?”
“폭주, 말입니까?”
“응?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나?”
“아니, 아닙니다. 다만 너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지라.”
레온나토스는 뒤쪽의 기사들 눈치를 본 다음, 조용히 루카스에 다가가 소곤거렸다.
“…그런데 루카스 형님, 라이안 형님의 갑작스러운 폭주에 혹시 이유가 있을까요?”
“분명 이유야 있겠지. 하지만 그걸 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야. 내겐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상대에겐 대단할 수 있으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루카스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건, 너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야. 북부에서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었지? 글쎄. 너희가 생각한 대단한 것이 내겐 별것 아닐 수 있으니,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아렌이 호언장담한 만큼, 루카스가 북부에서 본 것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그만큼 역효과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루카스 황자.’
처형된 것으로만 알려진 엔지 제2 황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비밀.
비밀은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그 힘이 줄어든다는 것은 아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 진실이 가지는 힘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도 아렌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루카스 황자는, 마지막까지 내 점괘에 응해주지 않았지.’
아렌은 첫 번째 삶에서 거의 모든 황가 사람들을 자신의 점으로 구워삶았지만, 끝까지 빠져들지 않은 몇몇이 있었다.
매사에 의심이 많고 실증되지 않은 것에는 회의적인 루카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어때. 이번에는 다를걸?’
그때 딱히 패배감을 느낀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뒤끝이 남은 아렌이었다.
*****
“…그럼, 굳이 정착민들을 강제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 변방일수록 법이 더 엄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지. 하지만 그 반대다. 중앙 정부와 먼 곳일수록 법은 더 느슨해야 하고, 법을 판단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져야 해.”
선페일 영지로 곧게 이어진 왕의 길.
한때는 죽음의 한기를 몰고 다니던 제이드의 경로였지만, 모든 것이 끝난 지금은 다시금 한적한 가도로 돌아와 있었다.
뒤로 기사들과 정착에 필요한 정주인력들을 이끌고 가면서, 레온나토스와 루카스는 벌써 몇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한 사람의 해석에 의해 모든 법리가 판단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아니야. 무엇이 더 효율적인가 하는 문제다. 중앙에서 멀수록 공권력은 약해지고, 설령 엄격히 법을 만들어도 그걸 수행할 수 없어. 차라리 믿을만한 법관을 세워 그에게 그때그때 일임하고, 그 사례를 모아 법으로 펴는 것이 더 나을 거다.”
“제국 남부에서 장작 두 개비를 훔친 것과 설원 마을에서 장작 두 개비를 훔친 죗값이 서로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그렇지. 너도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지 않나?”
“-흠.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다른 황자들 중에서도 레온나토스와 루카스는 서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루카스가 정말 이쪽에 붙는다면, 정말 좋은 선전 도구가 될텐데.’
‘명석한 자는 명석한 자를 알아본다’는 선전은 대중에게 꽤나 잘 먹힐 것이다.
그리고, 레온나토스는 벌써 몇 번이나 지나온 길을 따라, 다시금 제국 최북단 선페일 영지에 접어들었다.
“흐음, 이곳인가.”
루카스는, 소문으로만 듣던 영지에 직접 온 것이 꽤나 감회가 새로운 듯 곳곳을 둘러봤다.
아직 선페일의 거점도시, 다운힐에도 접어들지 않았지만, 이미 선페일 지역은 제국의 다른 영지와 분위기부터 달랐다.
건조하고 서늘한 기후, 그렇기에 과거에는 빈궁했지만, 최근 들어 개발된 은광과 새 통치체제에 의해 지금은 가난의 그림자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루카스는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행렬에 가까이 다가와 구경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듣던 것보다도 꽤나 활기찬 곳이군. 듣자 하니 영주를 영지민들 사이에서 투표로 뽑는다면서?”
“네. 도국의 방식을 차용했죠. 반쯤은 모험이었지만요.”
“지금 당장으로선, 실패로 보이지 않는군.”
그리고, 두 황자는 더욱 북상해 선페일 지역을 부강하게 만든 은광지대로 향했다.
“은광이라. 덕분에 제국은 교국과의 무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갈등의 단초가 되기도 했어. 저것이 과연 제국의 복이기만 한 건지는 모르겠군.”
루카스가 광산지대를 한 눈으로 훑고 지나가려던 찰나였다.
“이봐! 거기 말고 다른 곳이라고!”
“이쪽 먼저 파도 되잖아! 광부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거라고!”
“감히 어느 안전에-”
“어느 안전이라니, 어디 귀족 서자 출신이라도 되는 거야?”
“내가 사실… 에이, 아니다!”
검댕이 온 몸 덕지덕지 묻은 광부와 마찬가지인 몰골로 실랑이하던, 광산의 중간 관리직이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중간 관리직, 제국의 제2 황자였던 엔지는 광산을 향해 다가오는 병사들을 보고 얼굴을 폈다.
“어라? 내려갔다 언제 다시 오는 거냐, 레온나토스-”
그리고, 레온나토스와 나란히 서 있던 루카스를 뒤늦게 발견했다.
“-그리고, 루카스구나.”
레온나토스와 엔지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루카스는,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허, 그렇군. 어쩐지 뭔가 석연치 않게 돌아간다더니.”
생각해보면 어색한 곳은 몇 군데나 있었다.
“본보기로 처형당했어야 할 엔지 형이 어째서인지 시체도 없이 처리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황궁이란 곳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어설픈 곳이었나?”
원래 황궁의 분위기였다면, 냉혹하게 죽이는 것이 맞다.
실제로도 그렇게 결말을 맞은 경우가 많으니, 루카스가 눈치채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렌, 이게 북부에서 날 놀래켜줄 일인가?”
“조촐했다면 죄송합니다.”
태연하게 말하는 아렌.
루카스는 어이없다는 눈이었지만, 그 표정은 조금 부드러웠다.
*****
관리자 쉼터에서 온 몸의 검댕을 씻어낸 엔지는 루카스에게 그간의 일을 조금 멋쩍은 듯 털어놨다.
“그러니까, 폐하와 레온나토스가 먼저 제안했다고요?”
“그래. 야망은 야망이고, 굳이 실패한 야망과 같이 익사할 필요가 있냐고 하더군.”
“…레온나토스, 엔지 형님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엔지 형님을 죽이지 않은 데에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엔지가 표정을 찡그렸지만, 레온나토스는 아랑곳않고 말했다.
“물론, 엔지 형님을 따르는 수하들 일부라도 흡수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지요.”
“그래서, 모두 흡수했나?”
“…아니요. 아마 절반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어차피 엔지 형님께 충성한 자들은 아니었어. 단지 성공의 냄새만 쫓아 그 주변을 기웃거리는 파리떼일 뿐이지.”
루카스는 단언했다.
“레온나토스 넌 이득을 좆아 한 결정이라 했지만, 실은 양심을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나?”
루카스의 물음에 답한 건, 레온나토스가 아닌 아렌이었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호오, 어째서지?”
“반대로 엔지 전하의 처형을 그대로 진행했을 때, 지금보다 더 큰 이득이 있습니까? 물론 지금이 위험부담이 더 생긴 것은 맞으나. 그 덕분에 루카스 전하와의 교섭도 할 수 있었죠. 완전히 무의미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난 아직 너희에게 포섭되진 않았지만.”
“아, 죄송합니다.”
물론, 이미 설원의 온천지대에 거점도시를 세우는 일은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문제는 그 이상으로 레온나토스를 지지해주느냐.
루카스의 속마음을 읽은 아렌은 그것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나 하나가 레온 너를 지지하는 건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하기 쉽다고 해서 그 여파가 가볍지만은 않아.”
“…무슨 말씀인지 알고 있습니다. 루카스 형님.”
가웨인은 그를 둘러싼 흉포한 소문 덕에, 다른 황자들의 지지는 변변치 않았다.
라이안은 예로부터 부동의 황태자 후보 1순위였지만, 최근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고작 몇년 전에는 눈에조차 들지 않았던,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에 의해서.
엔지의 가신 일부를 흡수하고, 거기에 루카스의 지지까지 얻어낸다면.
그건 마치, 대(對) 라이안 전선을 공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렌은 속으로 부연했다.
‘사실은, 거기에 테오드릭까지 있지. 그것까지 밝혀진다면?’
이미 라이안은 교국에서 황제의 노여움까지 감수하며 선을 넘었다.
대(對) 라이안 전선까지 확정된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레온나토스, 넌 라이안 형님을 상대로 전쟁까지 각오하고 있나?”
루카스의 말은 결코 비유가 아니었다.
지금의 라이안이라면, 정말 형제 사이에 군대를 동원한 혈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현재 교국 수뇌부가 라이안을 지지하는 지금은 더욱 조심스럽지. 교국과 다시금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레온나토스의 대답은, 아렌 또한 듣고 싶었다.
현재 황권 경쟁에 참가 중인 레온나토스지만, 형제를 직접 죽이는 것까지 각오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루카스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레온나토스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