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전하.”
“그래, 아렌. 알고 있어.”
아렌은 레온나토스를 독촉했다. 이미 황자는 지나칠 정도로 황궁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레온나토스는 여전히 황도를 구한 영웅이니 궁인들의 시선은 상관없다.
하지만, 북부에서의 공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무주공산이 된 온천지대를 선점하기 위해서라도 레온나토스가 직접 가 진두지휘할 필요가 있었다.
‘산맥 너머의 운명석 계약자가 더 판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야.’
속속 드러나는 교국의 사정을 듣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황궁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젠 다시 올라갈 때였다.
문득, 아렌은 불안함을 느꼈다.
‘…역시, 밀정에게는 괜한 이야기를 한 걸지도?’
아르테가 무사히 모습을 드러낸다면, 지금의 대주교 대신 그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 자체가, 이뤄지기 힘든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아렌이 한 언령이 실현되기 위해선, 아르테가 살아있을 경우 무조건적으로 그녀를 지지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레온나토스에겐, 아직 아르테에 대한 것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아르테가 죽었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그녀가 죽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 역시 사실.
하지만, 아렌은 만에 하나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온나토스는 다시 북부로 올라갈 기사단과, 정착마을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자들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렌이 물었다.
“전하. 교국의 상황은-”
“그래. 여전히 주시하고 있다. 라이안 형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쪽의 대응도 달라질 테니까.”
“…역시, 이쪽도 참전하는 것이 좋을까요? 지금이라면 라이안 황자도 방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반대로, 이쪽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미리 함정을 파뒀을 수도 있지.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라이안의 갑작스러운 행보에 레온나토스도 놀랐지만, 지금은 아렌보다도 훨씬 냉철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렌, 네 생각은 다른가보군?”
“어디까지나 제 의견입니다만, 역시 이른 시일 내에 참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라이안 황자는 큰 도박수를 걸었습니다. 솔직히, 왜 그가 그런 큰 도박을 걸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잃을 확률이 큰 만큼 성공했을 때에 확실히 얻을 게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이안 황자의 위험한 도박을 이대로 순순히 성공하게 둘 수는 없지요.”
말은 장황했지만, 요점은 라이안 혼자 비상하기 전에 발목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렌 네 말은 알겠다만, 묻지 않을 수 없군. 네가 하는 말은, 라이안 형님처럼 우리 역시 교국에 간섭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건 곧 교국에서 두 황자가 대리전을 벌이는 상황임을 알고 하는 말이겠지?”
“…….”
“아렌, 솔직히 말해다오.”
“…말씀하시지요.”
“교국에 이미, 네가 걸쳐놓은 인연이 있는 거겠지?”
‘역시, 숨길 수 없나?’
레온나토스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렌은 실토했다.
“실은, 그렇습니다. 교국 내에 알고 지내는 주교가 한 명 있었죠. 지금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만.”
“그럴 것 같았어.”
후, 레온나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언제, 어느 형태로든 교국의 일에 간섭하게 된다는 것은 레온나토스도 알고 있었다.
그때 아예 모르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연이 닿은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명분에도 맞다.
“…만약, 그를 지원했을 때 그는 정당한 교국의 대주교가 될 수 있을 만한 자인가?”
“교국 안에서의 입지는 꽤나 높았습니다. 설령 이번이 아니라도 다음, 다다음에라도 능히 대주교에 오를만한 자였죠.”
실제로 아렌이 목숨을 잃었던 첫번째 삶에서 그녀는 최연소 대주교로서 명망을 떨쳤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로이터라는 자를 건너뛰고 곧바로 아르테가 대주교가 됐군. 로이터가 두려워한 이유가 완전히 허황된 것은 아냐.’
물론, 제국의 제1 황자와 교국에서 대리전을 펼치는 상황을 그리 반길 수만은 없다.
심지어, 그것이 황제의 뜻이 아니라면 더욱 더.
“하지만 전하. 앞서 말씀드렸듯 그는 지금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솔직히 살아있을지도 어떨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자네 점괘로-, 아, 아직 힘들다고 했지.”
“네.”
섣불리 점괘를 냈다가, 이미 죽은 자를 살아있다고 하면 큰 문제다.
‘…명백히 죽은 자를 살아있다고 하면 과연 어떻게 되지?’
문득 호기심이 들었지만, 섣불리 실험해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하는 수 없지. 그가 살아있다면 내게 보고하도록.”
“네, 그러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아렌.”
문득 레온나토스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라이안 형님의 일에 대응하는 것 나 하나뿐인가?”
“…그렇군요, 확실히.”
레온나토스는 제9 황자, 테오드릭이 이미 황권 경쟁에서 물러난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테오드릭은 라이안의 일에 일절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웨인은?’
유력한 황권경쟁 후보였던 제4 황자, 가웨인의 반응이 뜸한 것은 아렌으로서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그에게 붙여둔 밀정은 없지만, 지금 그가 있는 도국 연합의 두 맹주, 카르도나와 헬데움에서 각각 다른 두 밀서가 날아왔다.
둘 모두 어쩐지 가웨인의 황권 의지가 약해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날카롭기로 소문난 도국의 정보원조차 속일 정도의 연기일 수도 있지만, 그 외 정황 역시 꽤 그럴듯했다.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된다면, 자신은 망설이지 않고 계속 검의 길을 걸을 수도 있겠지. 레온나토스의 성정상 자신을 죽이지도 않을 거고. 그 판단은 옳아.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라이안이 황제가 된다면 가웨인으로서도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순순히 해줄지는 모르지만, 가웨인과 교섭해볼 가치는 있어.’
만약 그의 지원까지 받게 된다면, 더이상 라이안도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로 불릴 수 없게 된다.
‘…참, 그렇지.’
무언가가 문득 생각 난 아렌이 레온나토스에게 물었다.
“전하. 북부로 향하는 건 아무리 일러도 내일이 되겠죠?”
“그렇겠지. 지금 개척 마을의 인원을 구하고 있으니.”
한 장소에 누군가를 억지로 정주하게 하는 것은 쉽지만, 스스로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은 어렵다.
특히 의사나 목수, 율법가 등의 전문인력은 중심가와 동떨어진 변방일수록 더욱 중요했다.
그 전문인력을 수배하기 위해, 하루 이틀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잘됐군요. 혹시, 전하의 이름으로 기별을 넣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관없다만, 누구에게?”
“루카스 전하에게 부탁드립니다.”
아렌이 말했다.
원래라면 제9 황자 테오드릭의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 유력한 황권 후보 중 하나였던 제3 황자 루카스의 이름을.
*****
루카스는 자신의 별궁에서 아렌을 기다렸다.
깡마른 신경질적인 외모는 여전했지만, 그는 이제 황권 경쟁에서 이탈해 있었다.
최근 그는 관료들과 함께 제국의 율법을 다듬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비록 새 황제가 결정되면 더는 황도에 있지 못하겠지만, 학문과 거리는 상관없다. 그는 황도 밖에서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나가겠지.
자신의 팔뚝보다도 두꺼운 책을 읽던 루카스는 고개를 든 다음 눈을 찌푸렸다.
“…뭐냐, 너 혼자 온 거냐? 레온나토스는 어디 가고?”
“전하께서는 오지 않으십니다. 제가 이번 대담의 전권을 명 받았습니다.”
“-흥.”
루카스는 책갈피를 끼운다음 두꺼운 율법서를 덮었다.
“그거 참, 이제 잘 나가는 황태자 후보라, 이건가? 더이상 만나줄 필요도 없다는 말인가 보군.”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루카스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글쎄. 용건만 말하라. 괜한 오해를 사, 불필요한 구설수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
일부러 짓궂은 말로 응수한 루카스에게, 아렌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야기를 빙빙 돌리는 것은 원치 않으시니 저도 간단히 여쭙겠습니다. 왜, 그 자리를 테오드릭 전하에게 양보한 것입니까.”
“거기에, 이유가 필요한가? 애초에 모든 황자가 황제 자리를 원하나? 당장 네 주인인 레온나토스부터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루카스 전하께선 그 전부터 황권을 노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엔지 형님이 있었을 때는 그랬지. 괜히 날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대항심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하지만, 결코 그릇이 크다 말할 수 없는 그런 소인배조차도 분에 맞지 않는 탐욕을 부리다 파멸하고 마는 자리가 바로 황제의 옥좌다. 나조차 주변의 부추김이 있었다면 언제고 그리 되지 않았으리라는 법 없지. 엔지 형님이 그리 되고 더 잘 알았다. 내 그릇은, 황제의 자리가 아니야. 황제가 될 자는 자신이 설령 파멸할지라도 주저 없이 달려가는 그런 자일 테지.”
‘엔지처럼 될까 두려워졌다는 건가? …아니.’
엔지에게 서린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건, 허무함에 더 가까웠다.
“아렌. 방금 질문조차,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 그렇지 않나?”
“그 말씀은?”
“사실은 더 묻고 싶은 게 있지 않냐는 말이다. 가령, 내가 어느 황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가, 라거나.”
루카스 앞에서, 아렌은 얼버무리려 하지 않았다. 훨씬 고지식할 뿐, 루카스는 레온나토스에 비견될 만큼 명민한 자였다.
“…그런 의도도 있었죠. 굳이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흥, 역시.”
루카스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말했다.
“이참에 확실히 말하지. 난, 이번 황권 경쟁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 마침 내 보잘것없던 기반 또한 황권을 포기하면서 모두 없어졌어. 지금의 난, 완벽한 야인이다. 내게 상관하려 하지 마.”
‘…완벽한 중립이라.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지만.’
루카스의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그가 가웨인이나 라이안을 지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레온나토스에겐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아렌으로선 더 파고들 구석이 보였다.
“루카스 전하의 판단에는, 혹시 엔지 전하의 최후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건, 답하지 않겠다.”
“네. 제게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같이 북부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북부? 방금 내 말을 듣긴 한 건가?”
“물론입니다. 지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가로서의 전하를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완전히 외부와 동떨어진 개척도시를 세울 예정이거든요. 새로운 율법이 필요할 겁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아렌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에 기반한 권유였고, 마침 루카스가 흥미를 지닌 분야다.
루카스가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 터.
“만약, 저희와 같이 오신다면 좋은 것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
죽은 줄 알았던 제2 황자가 북부에서 살아있다면, 루카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광경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아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