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생각이 많은 듯한 레온나토스였지만, 하루를 꼬박 고민한 끝에 나름의 답을 구한 듯했다.
늦은 시각. 레온나토스는 여전히 자신의 처소에 붙어있는 집무실에 있었다.
아렌이 물었다.
“전하. 결정하셨습니까.”
“…황제직을 내려놓지는 않겠다. 그것이 나를 믿어주고, 나를 위해 희생한 자들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
“네. 제 생각 또한 같습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가 말한다.
“내 실책으로 인해 죽지 않아도 될 자들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아.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결정을 내린 것과 그 결정을 흔들림 없이 관철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후회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렌이 말했다.
“정말 후회가 되신다면,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실수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건, 내게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아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 사건은 아렌에게도 여러모로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위기가 곧 기회로 바뀌었다지만, 지나치게 많은 피해가 생겨버렸다. 후에 있을 더 큰 일을 미연에 방지했다, 라는 정도로는 쉬이 납득가지 않을 만큼의 피해였다.
“-그런데 말이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레온나토스가 문득 물었다.
“대체 언제 테오 형님에게 점을 봐준 거냐.”
“그건-”
“한동안 점을 못 본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점을 볼 수 있었던 거냐?”
레온나토스는 조금 짓궂게 아렌을 몰아붙였다.
레온나토스의 격의 없는 태도에 아렌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테오드릭 전하께 드린 점괘는 그냥 둘러댄 겁니다.”
“둘러대?”
“네. 어떤 임무를 받으셨는지는 모르나, 그 해결책에 전혀 감도 못 잡으시길래 그만… 하지만 아티스 동쪽에서 해결할 문제라면 십중팔구 만월강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드린 조언이었습니다.”
“…과연, 일리는 있군. 결과적으로 테오 형님도 폐하께 보고드릴 만한 것을 발견했어. 네 공로라 해도 좋겠지. 넌 운도 좋구나.”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다. 물론, 이제 아렌의 점괘는 단순한 둘러댐으로는 끝나지 않지만.
‘북부로 영토를 확장하고, 오래 방치한 아티스 왕국의 마지막 강역을 흡수한다고?’
그건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 제국으로서도 한 세대 안에 하기 버거운 일이었다.
레온나토스와 아렌은, 쉬지 않고 황도로 달려온 반동으로 잠시동안 황궁에 머물렀다.
북부에서는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그곳에 굳이 레온나토스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공사의 총 책임자이니 언젠가는 들러야 하겠지만, 잠시 황궁에서 지친 몸을 쉴 여유쯤은 있다.
황궁에 머물러 있으니 달라진 레온나토스의 위상이 더 잘 느껴졌다.
지금 레온나토스는 황도까지 위협할뻔한 죽음의 한기를 멈춰 세운 영웅이었으니까.
“…난 뼈아픈 실책을 범했지만, 어째 황권 가능성은 더 높아졌군.”
“네. 황자분들 중 장남이신 라이안 전하, 검성에 오를 실력을 지닌 가웨인 전하에 뒤지지 않는 서사를, 레온나토스 전하께선 지금에야 얻게 되신 겁니다. 이런 서사는 두고두고 힘이 되겠죠.”
“하지만, 그건 발커스 경과 아렌 네가 한 거잖나.”
“원래 부하의 공은 곧 주군의 공입니다. 모르셨습니까?”
“…….”
제9 황자, 테오드릭은 곧바로 다시 동부로 떠났다. 동부에서 받은 임무가 만만찮았기 때문에, 오래 비워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가장 차기 황제로 유력한 네 명 중 지금 황궁에 남아있는 건 레온나토스 혼자 뿐.
황궁 안 궁인들에게 그 사실이 의미하는 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레온나토스 황자가 일찌감치 시험을 포기했거나, 중간에 황궁에 머물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거나.
특히 이번 제이드 사태를 막아 세운 것이 결정타였다.
“여전히 방심은 금물입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다른 황자들이 대단한 성과를 내지 않는 한 가장 유리한 건 레온나토스 전하, 당신입니다.”
“…그렇게 되었군. 하지만 난 다른 형님들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레온나토스보다 몇 년이나 먼저 세상에 나와 있었고, 황궁의 법도를 깊이 이해한 자들이다.
한치도 방심할 수 없다는 의견엔 아렌도 동감이었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나올까?’
*****
비원궁.
라이안이 손님의 자격으로 머문 것이 두 달을 넘었다.
그 사이 라이안은 비원궁 안에서조차 자신의 수족들을 만들어뒀고,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제국 북부에 갑자기 몰아닥친 혹한에 대해서 접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참모는 자신에게 모인 정보를 취합해 라이안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제국에서 큰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고작 늦가을인데, 순식간에 피까지 얼어붙는 한파가 몰아닥쳤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아주 좁은 지역에요. 알려진 사망자만 육백 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저런. 많이도 죽었군.”
“그리고, 그걸 막은 것이 북부 영지에서 내려오는 중이던 레온나토스 황자였다고 하더군요.”
“…레온나토스가?”
라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런 일은, 전에 있지 않았다.”
“네. 전대미문이라 하더군요.”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
참모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라이안이 영문모를 소리를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순간 뜬금없는 소리를 한 라이안은, 여전히 냉정했다.
“소문의 정확도는 모르겠지만, 고작 한파 따위에 이렇게 대륙이 떠들썩할 리는 없지. 이만큼 호들갑을 떨 정도의 이상기후라면, 필시 그 저주받은 돌의 사용자가 나타났다 봐도 무방할 거다.”
“그리고, 그걸 해결한 것이 때맞춰 등장한 레온나토스 황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야금야금 점수를 따는 꼴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스스로 일을 저지른 후, 자신이 해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작극이다? 글쎄. 레온 녀석이 그런 성정 같아 보이진 않다만.”
라이안은 참모의 말을 일축했다.
“…다만, 녀석이 산맥 너머에 가 있었던 것도 사실. 그 저주받은 돌이 산맥 너머에서 오는 만큼, 한파의 주범의 정체를 미리 알았을수는 있겠지. 결과적으로 자신의 과실이었지만, 함구하고 이득을 취하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라이안의 추측은 꽤나 정답에 근접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제국민과 황궁 안 가신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깨트릴 재료로는 부족했다.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긴.”
황자 라이안은 무심하게 말했다.
“준비해둔 것을, 묵묵히 행할 뿐이다. 준비는 되었겠지?”
*****
늦은 밤, 아르테의 처소.
제국의 소식을 들은 건 아트마 교의 주교, 아르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자신도 운명석 계약자이기에 아르테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 사태가, 운명석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해결한 게 레온나토스 황자라. 후훗! 라이안은 지금쯤 무슨 표정일까?’
아르테는 같은 운명석 계약자로서 레온나토스의 가신, 아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운명석 계약자로 추정되는 라이안에게는 호감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어쩐지, 있어선 안될 곳에 놓인 듯한 기분 나쁜 존재감이 라이안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꼴 좋다. 이대로 여기서 미적거리는 동안, 그대로 차기 황제가 결정되면 꽤 볼만하겠군.’
아르테가 속으로 웃을 때쯤이었다.
“아르테 주교님! 일어나주십시오!”
“일어나있습니다.”
시종이 문밖에서 다급히 깨웠다. 아르테는 옷매무새만 급히 다듬은 뒤 문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시종의 입에서 듣는 것보다,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훨씬 사태 파악이 빨랐기 때문이다.
“-대주교께서, 실종되셔?!”
“네! 그리고 지금 로이터 주교꼐서 이곳으로-”
“헛다리를 짚어도 단단히 짚었군. 이런 오해는 심히 곤란해.”
아르테는 잠옷 차림에서 급히 외투를 걸쳐 복식을 갖췄다. 하지만 옷매무새를 다 다듬기도 전에, 이미 아르테의 문 앞에는 수많은 아트마교 사제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교단 내 서열 2위인 로이터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오랜만이시군요, 로이터 주교님. 근 한 달간 모습을 보이시지 않던데, 무슨 일이시죠?”
“이상하군.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지 않나?”
“네. 대주교께서 승하하셨죠. 당신의 명령으로요.”
로이터 주교를 앞에 두자, 아르테는 사건의 전모를 훤히 알게 되었다.
‘라이안은 대주교 암살에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로이터는 라이안을 지지해? 그 죄를 나에게 씌우고?’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 한, 아르테에게 사건의 전모를 아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문제는, 그 실제 전모를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주느냐였다.
“네가 그렇게 주장할 줄 알았지. 하지만 왜 우리가 이곳으로 먼저 향했냐면, 대주교께서 실족하신 것 같은 창가 근처에 네 베일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참 얼빠진 범인이네요. 자신이 범인인 증거품을 그곳에 뻔히 두고 나와요?”
“아무리 노골적이라도 증거는 증거지. 그리고, 보자마자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내게 씌우는 걸 보니 사실인 것 아니냐?”
“성직에 계시면서, 제법 소설도 잘 쓰시는군요.”
아르테는 뜨거워지려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식혔다. 로이터에게서 더 많은 것을 읽어내기 위해서였다.
‘대주교의 죽음이 확인되면 차기 대주교 투표가 열려. 로이터 주교가 가진 세력에, 라이안 황자까지 지원한다면-’
로이터와 그 측근들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그 이유는, 이번 작전이 아르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동시에 아르테를 가장 먼저 쳐내려는 것 역시 아르테의 능력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라이안은 로이터 주교에게 은밀하면서도 날랜 무력을 제공했고, 로이터는 원래라면 가장 먼저 오해받아야 할 객식구를 두둔하고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 상황에서 아르테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에게 오는 화살을 돌리려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
“-애초에, 아르테 자네가 가진 능력은 정말 신이 주신 능력인가?”
“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 감히 아트마의 은총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라이안 전하에게 들었네. 듣자 하니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사이한 힘을 쓸 수 있는 저주받은 돌이 있다고. 자네의 능력도 혹시 그 돌 때문이 아닌가 묻는 거네!”
“당치도 않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몸 수색을 해봐야겠네!”
“물러서십시오!”
다가오는 로이터와 물러나는 아르테.
뒤늦게 아르테의 방으로 몰려온 사제들로 인해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만하십시오, 로이터 주교!”
“이런 상황에서 범인을 억측으로 단정 짓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당신이야말로 최근 이국의 황자와 친하게 지내시지 않았습니까!”
교국도 여러 파벌이 있다.
대주교가 사라진 지금 가장 강한 파벌은 서열 2위인 로이터의 파벌.
하지만 다른 파벌들이 연합해 아르테를 지원하자 세력은 거의 비등비등했다.
“단지, 아르테가 시험을 통과하면 될 일이다! 일을 복잡하게 하지 마라!”
“그 시험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발가벗고 신의 은총을 행할 수 있는가만 확인하면 돼!”
“말도 안 되는 소릴!”
이제 모여든 반 로이터 연합은 거의 비명을 질렀고, 아르테는 옷 안에 차고 있는 운명석 팔찌를 반사적으로 감싸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소란스럽군.”
그 소동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라이안.
“교국 안이 제법 소란스러운 모양이군요, 로이터 주교. 주교의 친우로서, 이 혼란을 잠재우는데 도움을 줘도 되겠습니까? 나라 간의 우호의 표시로 말입니다.”
명백히 부외자의 말에 사제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반대했다.
“무슨 소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아르테는 라이안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옆에 붙어있는 참모의 속마음은 읽을 수 있다.
‘-미쳤어!’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계획을 알게 되자 아르테는 앞에 있는 제국인들이 같은 사람이 아닌 지네나 뱀, 거머리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