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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62화 (162/227)

#162화

“…….”

레온나토스는 대답이 없었다. 황제가 재차 물었다.

“어떤가, 황자. 더 할 말이 없나?”

여전히 답하지 못하는 레온나토스를 보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잘 알겠군.”

황제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이번 사태로 인해 계속 피해 보고를 받고 있는데, 죽은 사람만 벌써 600명을 넘겼어.”

“…알고 있습니다.”

대답하는 레온나토스의 속은 모래를 한 움큼 머금은 듯 썼다.

마을 하나가 그대로 괴멸한 곳도 있는 만큼, 개인의 한순간 실책으로 생긴 일이라기엔 그 피해가 지나치게 컸다.

레온나토스는 죄책감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황제가 넌지시 말했다.

“이 사실이 모두 공표된다면, 황자 네 인망은 그대로 곤두박질치겠지.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건,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겠지.”

황제는 곰의 머리가 양각된 지팡이 머리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주위에 공표하지 않겠다. 황자 너도 발설할 필요 없다.”

“-네?”

머리를 숙이던 레온나토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알리지 말라고 했다. 이번 사태는, 주변에 알려서 좋을 것 하나 없어.”

“하지만, 그건 제 죄입니다! 피할 생각도 없고 다른 이들을 기만할 생각도 없습니다!”

“죄라. 뭐가 말이냐. 유랑족 꼬마 하나를 산맥 남부로 풀어놓은 것? 네가 산맥 너머로 진출하지 않았다면, 그 유랑족이 산맥을 넘지 않았을까?”

“그건-”

레온나토스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외투를 몇 겹이나 껴입어야 하는 강추위 속에서도 제이드는 혼자 멀쩡했다.

산맥을 넘기 전만 해도 제이드는 본인의 능력을 자각하지 못해, 설원을 넘는데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드가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혼자서 설원을 지나올 수 있다는 것만 안다면, 제이드는 빠르든 늦든 산맥 협곡을 지나 남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것이 제이드의 원래 소원이기도 했으니까.

아렌도 황제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황제의 말대로일지도.’

미리 제이드에 대해 알고 있었고, 곧바로 쫓아왔기에 이 정도 피해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제이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가 어떤 경로든 산맥을 넘기만 했다면. 그 피해는 세 자리 숫자에 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제이드를 왕의 길 위로 안내해, 얌전히 길 위로만 다니게 한 것도 주변을 통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의 생각은 여전히 다른 듯했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궤변입니다.”

“호오. 그 말은?”

무엄하게도 황제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한 레온나토스를, 브륀할트 8세는 기꺼운 눈으로 바라봤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의 죽음에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 죄를 사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호도한다면, 그건 곧 살인 행위를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흠, 그렇군. 황자의 의견은 잘 알겠다. 그럼, 황자는 이 일에 어떻게 책임을 질 생각인가?”

레온나토스는 황제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저는-, 황제가 되지 않겠습니다.”

“과연. 하지만 그것만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나?”

“당연히 다른 죗값도 치를 겁니다!”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황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자 네가 황제가 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나?”

“…….”

“그런 황자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본 바, 네게 황제의 자리란 무거운 책임만이 있는 자리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전에는 황권을 노리지 않고, 그저 책만 읽었을 뿐이지.”

하지만, 아렌의 부추김과 그간의 깨달음으로, 레온나토스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다. 그 모든 것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제국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네가 정녕 책임감을 느낀다면,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평생 속죄하면 될 일이다. 그게 옳은 지도자의 자세란 말이다.”

“…폐하의 판단 방식에, 개인의 양심은 없습니까?”

“때로는 무고한 만 명의 병사를 희생시켜 수십만의 양민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지. 이상만을 쫓을 때는 마음의 거리낌 없이 편안하지만, 그 결과 더 큰 희생이 따를 수도 있어.”

“…….”

황제의 말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권 경쟁에서 내려오는 것이 속죄가 될 수 없다는 말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강권하시는 겁니까. 저 말고도 황제의 재목들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착각하지 마라, 황자. 짐은 누구든 공평하게 대하니까. 황제가 누군가를 편애한다는 말은, 내란을 조장할 만큼 위험하고 거친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듯 레온나토스의 옆에 부복한 발커스에 향했다.

“그리고, 발커스라고 했나?”

“예! 폐하!”

“평소 경의 위명은 익히 들었네. 이번 사태에서도 제법 혁혁한 공을 세웠다면서? 벌써 세간에선 불꽃의 기사가 불린다고 하던데.”

“상황이 급박하여 막무가내로 저지른 일일 뿐입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겸양까지 하는군. 자네 같은 용사가 있는 것이 우리 제국에 두고두고 복이 되겠어.”

황제는, 다시 지팡이를 짚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렌 앞에 섰다.

“…비서관 아렌.”

“네, 폐하.”

“음? 왜 고개를 들지 않나?”

황제의 의문에 레온나토스가 급히 말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아렌은 오는 도중부터 제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아, 부축 없이는 거동하지 못합니다.”

“그래? 그거 고생 많겠군.”

그리고 지나가려다, 문득 고개를 돌린다.

“전에도 꽤 앓아눕지 않았었나? 거나하게 코피까지 쏟았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분명히, 짐의 상태가 기적적으로 호전되던 때였지.”

“…….”

“흐음, 그렇군.”

황제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은 채 병상에 앉았다.

어쩌면 이미, 이번 사태에서 아렌이 또 손을 썼음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황제는 말한다.

“황자 본인의 거취는 본인이 정하라. 짐은 피곤하니 좀 쉬어야겠군. 마침, 곧 다른 알현도 있을 것 같고.”

‘…다른 알현?’

황제의 말에 아렌은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듯 레온나토스가 바라보자, 황제는 묘한 어트로 말을 흘렸다.

“제9 황자가 황궁에 들렀다는군. 동부에서 제법 고전하고 있다지, 아마.”

*****

“아, 테오드릭 형님!”

황궁 내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온나토스는 황제의 병상에서 막 나오는 테오드릭을 반겼다.

“아, 레온나토스. 이제 보니, 너도 고생이 많나 보구나.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됐어.”

“그건 형님도 마찬가지십니다.”

“…그러게 말이다.”

테오드릭도 자신이 맡은 만월강 동부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황궁에 온 것이다.

말하자면 조언도 구하고, 한숨 돌릴 요량이었지만 황궁에 오는 길에 기이한 소문까지 접했으니.

“…듣자하니 왕의 길 주변이 뼛속까지 얼어붙는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면서? 그걸 네가 해결했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말야.”

“…그건 폐하께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해결한 건 모두 발커스 경의 결단 때문입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죠.”

레온나토스는 급히 공을 돌렸다.

발커스는 원망스럽다는 듯 레온나토스를 바라봤지만, 이미 늦었다.

“오오, 그래. 발커스 경.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몸에 불을 붙이고 돌격했다면서? 불붙은 검으로 얼음요괴를 베어 넘겼다니, 과연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용사 아닌가.”

“…그런 이야기까지 퍼졌습니까? 황공하오나 그렇게 멋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발커스는 반사적으로 아렌을 돌아봤지만, 아렌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그런데, 황도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건, 이미 폐하께 한 이야기인데.”

자신이 받은 임무를 말해줄 수는 없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일 자체를 말하는 건 가능하다.

테오드릭은 이야기했다. 만월강의 상류에서, 유랑족의 시체가 무더기로 떠내려오던 이야기를.

“분명 산맥 너머에서 무슨 사달이 났다고 확신했지. 마침 네가 가 있는 곳이라 얼른 황도에 보고하러 왔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구나.”

“네. 실은 산맥 너머에서 내려온 자, 주변을 모두 얼어붙게 한 자가 형님이 보신 광경의 범인이었습니다. 그 근원지에 저도 가 있었죠.”

“역시. 굳이 조언해줄 필요조차 없구나.”

테오드릭은 다시 한번 안도했다. 레온나토스가 있는 한, 자신이 황권 욕심을 버린 것은 역시 잘 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형님. 만월강의 상류에는 왜 들르신 겁니까? 임무 관련이라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아,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냐. 그냥 점괘를 받은 게 있어서, 한번 시험 삼아 들러본 것 뿐이거든.”

“…점괘요?”

“그렇지. 아렌?”

두 황자의 시선이 비서관 아렌에게로 향했다.

아렌은, 지금 발커스의 등에 폭 업힌 채였다.

“…뭐냐, 그 꼬락서리는?”

“여행 중 탈이 왔는지, 몸이 안 움직이더군요. 궁의도 이유를 모르지만, 감각이 있는 걸로 보아 며칠이면 움직일 거라더군요.”

“녀석, 은근히 잔병치레가 많구나. 여하튼. 저 녀석 점괘대로 강가에 가면 임무에 대한 실마리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그 광경을 본 거지.”

‘…그런 일도 있었지.’

아렌이 아직 언령을 시험하던 단계에 한 점괘였다.

테오드릭이 받은 임무는 만월강의 치수와 엣 아티스 영토의 개간.

아렌은 그 실마리가 만월강에 있다고 했다. 만월강을 다스리지 못하면 개간 역시 물 건너가기에, 아렌의 말은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 말대로 될 줄이야.’

산맥 남쪽의 만월강은 수량이 너무 많고 그 폭도 넓어, 고대부터 존재하다 제국에 의해 파괴된 보를 다시 재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능한 첫 번째 방법은 제국이 설원의 온천지대를 점령한 다음, 아래로 흘러가는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방법이었다.

온천수가 주변의 눈을 녹여 큰 강이 되니, 약간의 온천수만 다른 곳으로 돌려도 만월강의 수량은 유의미하게 감소할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운명석 계약자의 능력에 따라, 불가능한것도 아니야.’

영구히 작동하는, 천천히 낙하하는 구덩이를 만들거나, 혹은 기이할 정도로 낮은 온도를 주변에 흩뿌리거나.

모두 운명석 사용자의 힘이라면 가능하고, 실제로 행해진 것들이다.

‘하지만, 광대한 땅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야. 언령으로 아티스의 모든 땅을 마르게 할 순 없겠지.’

그게 가능해도 계약자 본인에게 부담이 될 테니. 현실적인 방법은 강을 중턱에서 막는 커다란 보를 짓는 데 운명석의 힘을 쓰는 것 정도였다.

‘…어쩌면, 예전에 지어졌던 건축물들도 모두 그런 식으로 지어졌었나? 고대의 비경이란 곳은 모두-’

남부 끝의 교국과는 이역만리나 떨어져 있지만, 공교롭게도 아렌이 내린 결론은 교국 비원궁에 있는 라이안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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