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61화 (161/227)

#161화

“어… 어?”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온몸에 불이 붙은 인간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건 평소에 쉬이 접하지 못하는 광경인 만큼, 제이드가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이제 남은 건 고작 몇 걸음 뿐.

“다, 다가오지 마!”

놀란 제이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한기를 발커스에게 흩뿌렸다.

바닥은 순식간에 공기 중의 수분이 응결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 뿐, 직접 옷에 불을 붙이고 달려드는 발커스의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푸욱.

발커스의 장검이, 어린 제이드의 몸을 관통했다.

“커헉!”

제이드의 입에서 이빨만 한 크기의 작은 돌 조각이 튀어나왔다.

검은 색 흑옥 조각, 운명석이었다.

발커스는 곧바로 손잡이 뒷부분으로 땅에 떨어진 운명석을 내리쳤다.

운명석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 즉시 위에 불이 붙은 외투를 벗어던졌다.

밖에 겹겹이 껴입은 외투에는, 횃불을 만들며 남은 기름을 발라둔 상태였다. 아렌이 신호하면 곧바로 외투에 불을 지피는 건 아렌이 미리 제안한 것이었다.

옷에 붙은 불은 옷 사이로 스며들 한기를 막아주지만, 그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안쪽의 옷까지 금방 타버린다면 말 그대로 분신 자살한 꼴이고, 바깥의 지나친 열기로 숨을 쉬면 그만큼 폐가 다칠 정도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아렌 역시 운명석이 깨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얼른 외투를 벗어던졌다. 제대로 먹힐지 불안했지만 결과가 성공이면 나쁘지 않은 결과다.

“…푸하! 아렌 공! 이제 괜찮아요?!”

“네. 벌써부터 기온이 버틸 만해졌어요. 곧 다른 곳처럼 돌아가겠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동안 숨을 참았던 발커스는 이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렌이 벗어둔 외투는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렌은 짊어지고 있는 모든 횃불들을 장작처럼 외투 위에 던져넣었다.

비록 운명석 계약자가 빈사상태고 그의 운명석도 깨졌다지만, 아직은 웃옷과 외투 없이 버티긴 힘든 나이대였다.

“후, 그… 후욱!”

잔뜩 서리 낀 길 위에 쓰러진 제이드의 입에선 계속해서 피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입에서 피거품을 뱉는 제이드. 이미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제이드의 운명석을 제거하기만 하면 사태는 정리되지만, 발커스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몸에 불까지 지르고 달려든 특공이었다.

끝내 숨을 참지 못하고 화염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거나, 운명석을 홀랑 삼켜버리기라도 한다면 끝장이니, 발커스도 꽤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점점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제이드는 중얼거렸다.

“난, 죽는, 건가?”

“…그래. 이제 와서 살 방법은 없겠지.”

“그래… 죽는다고?”

아렌의 대답에도 제이드는 그리 화내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어렴풋이, 자신의 이런 결말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여긴, 춥진 않아…”

-툭.

제이드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가는 곳마다 죽음을 매달고 남쪽으로 향하던 유랑족 소년은, 그렇게 제국 한복판에서 죽음을 맞았다.

“헉, 헉…”

“발커스, 괜찮아요?”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요. 괜찮은 거 맞아요?”

“지금이라도 계속 움직이려 노력해봐요. 지금 당장 불을 피울 테니까 기다리고요.”

아렌이 벗어던진 외투에는 지금도 불이 붙어 있었다.

아렌은 횃불과 지게를 모두 장작 삼아 외투 위에 던져 불을 지폈다.

이제 주위를 에워싼 한기가 사라질 테니, 2km 바깥에 있던 병사들 역시 모두 다가올 것이다.

불 가까이에 양발을 가져다 댄 발커스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래도, 성공했군요. 이제 모두 다 끝난 것 맞죠?”

“네, 일단은요.”

“-좋았어.”

발커스는 주먹을 쥐며 뿌듯해했다.

그에게는 이제 끝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게 끝이 아님은 아렌이 가장 잘 알았다.

‘이제, 운명석에 대해 온 대륙 사람이 다 알았겠군.’

최소한 어림잡아 수백 단위로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개인이 국가 단위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과 그 능력을 어떤 돌에 의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을 터.

제국이 기록을 말살하면서까지 숨기고 싶었던 사실들이, 이제 만천하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이제, 많은 것이 움직이겠군.’

발커스와 아렌이 나란히 횃불 옆에 앉아 몸을 녹이고 있을 때,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국군이 아래로 내려왔다.

기온이 많이 올라갔다지만 여전히 영하 근처를 맴돌았고, 여전히 길 위에 새하얗게 깔린 서리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간접적으로 보여줬다.

“아렌! 발커스 경! 무사한가!”

제국군의 선두에 있는 건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직접 오시다니요.”

“너희들이 위험을 무릅썼는데 나더러 안전한 곳에 가만히 있기만 하란 말이냐! 그자는?”

아렌은 말없이 길 한편을 가리켰다. 그곳엔 피 웅덩이 위에 덩그러니 놓인 제이드의 사체와, 바닥에서 가루가 된 운명석 흔적이 보였다.

“-세상에. 저런 어린 아이가 원흉이었다고?”

제이드의 모습을 처음 본 제국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린아이가 참혹하게 죽어있는 장면은,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제국군의 감성으로는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병사들의 마음에 일말의 망설임이 일려 하자 아렌이 급히 말했다.

“모두 발커스 경의 공입니다. 두껍게 갖춰입은 외투에 스스로 불을 질러, 온몸에 불이 붙은 상태로 돌격하는 모습을 모두가 봐야 하는데요.”

납득하기 어려운 전장일수록 영웅이 필요하다. 아렌은 조금 과장 섞어 발커스의 무공을 알렸다.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 발커스 경, 그게 사실인가?”

“어, 그게… 사실은 사실이나 사실은-”

발커스는 허둥지둥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길 한편에 발커스가 벗어놓은 외투와, 안쪽에 받쳐입은 갑옷의 그을림 또한 그 증거였다.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 경 만세!”

“불꽃의 기사 발커스 경 만세!”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러야 할 정도의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이 어린 아이를 죽였다는 사실을 덮었다.

병사들은 환호했고, 발커스는 조금 미덥지 않아 하면서도 그 환호가 그리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렌은 모닥불 옆에 천천히 몸을 눕히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렌?”

“네.”

레온나토스의 물음에, 아렌은 무엄하게도 누운 상태 그대로 대답했다.

“지친건가? 하지만 아직 바닥이 차네. 조금이라도 따듯한 곳에 눕는게 어떤가?”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아렌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팔다리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몸이 안 움직이네요.”

“-뭐?”

‘이게, 이번 언령의 부작용인가?’

모로 누운 상태로, 아렌이 태연하게 말했다.

“몸이, 전혀 안 움직여요.”

*****

레온나토스와 기사들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위해 그대로 황궁으로 향했다.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아렌은, 더글라스의 뒷 안장에 탄 채 그와 몸을 묶어둔 상태였다.

뒤로 흘러가는 풍경을 천천히 지켜보며, 아렌은 생각했다.

‘그래도, 언령에 개연성을 부연하기 위해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했는데.’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주위에 횃불을 매달고, 마지막에는 몸에 불까지 지르게 했다.

이 모든 것이 ‘왕의 길 위에서 얼어죽지 않는다’는 언령을 조금이라도 더 그럴듯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언령이 없었어도 사실은 괜찮지 않았을까? 혹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내게 오는 반동은 같았을까?’

이대로 몸이 안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았다. 먼젓번에 황제에게 한 언령은 일주일을 사경을 헤맸었지만, 오늘 한 언령이 그때보다 더 심각한 사안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한 명 대상이었고 오늘이 두 명 대상이라고 오늘의 언령이 더 중한 것은 아닐 테니까.

‘몸은, 곧 움직이겠지. 몸에 감각은 남아있어. 엉덩이도 배기고. 마비가 온 사람은 감각도 없어진다고 하니까.’

다만 아쉬운 점은, 이 마비가 있는 동안은 황궁에 도착해도 황제와의 자리에 함께할 수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때, 아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레온나토스가 말했다.

“아렌. 너도 폐하의 앞에 선다.”

“…이 몸으로 말입니까? 이대로면 추태만 보이는 게-”

“네 몸이야 아무나 부축하면 되는 거다. 나도 널 이대로 쉬게 하고픈 마음은 굴뚝같다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렇겠죠.”

하긴, 아렌도 고개를 끄덕였고, 레온나토스와 기사들은 왕의 길 옆에 서 있는 이정표를 지나쳤다.

황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정표였다.

*****

레온나토스와 아렌, 발커스는 황제의 병상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 앉은 황제 브륀할트 8세는, 이제 지팡이를 짚으면 스스로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레온나토스는 왕의 길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범인이 누구였는지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왕의 길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다.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도 보고받아서 이미 알고 있어.”

‘보고? 그렇게 벌써?’

사건을 해결하고 곧바로 달려온 길이다. 레온나토스보다 더 빠른 보고라니, 황제의 정보력은 상상이상이었다.

“황자. 물음에 답하라. 산맥 너머에 그런 자가 얼마나 더 있겠나?”

“…아마, 이제 거의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제국에 위협이 될만한 유랑족이 모여드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개인이기에, 혼자서는 설원을 넘어 산맥 남부로 내려올 엄두를 못 내죠. 그곳에서 최근 대량 학살이 있었고, 유일한 생존자이자 범인이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위협이 될만한 자들은, 이미 죽고 없습니다.”

‘…대답으론 썩 적절하군.’

레온나토스의 대답에 아렌이 내린 평가였다.

레온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온천지대가 유랑족 모두에게 공개된 장소인 만큼, 운명석과 계약할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른 온천지대를 제국의 영역으로 해야 합니다. 늦으면 늦을수록 갈 곳 없는 유랑족이 다시 그곳에 모여들 거고, 새로운 운명석 계약자가 되어 그곳을 지배하겠지요. 그곳을 통제하는 것이 곧 제국에 있을 다른 불상사를 미리 방지하는 일입니다.”

“그 말은, 제국이 유랑족을 지배한다는 뜻인가?”

황제의 지적은 세밀했다.

“유랑족의 부족들은, 모두 차기 지도자로 운명석 계약자를 내세운다고 했다. 다름아닌 레온나토스, 네가 한 보고다. 그들이 새 운명석을 원한다면, 우린 그들에게 제공해야 하나?”

“그건-”

“협곡을 통과해 남으로 오고 싶어하는 유랑족이 있다면 어쩔 건가. 그들을 막아 세울 건가? 우리는 그들의 터전에 진출해놓고? 창칼로 그들을 제압한다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아래로 내려오길 희망하는 유랑족을 막는 건, 레온나토스의 의도 안에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 운명석 계약자가 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이동을 통제하는 것이 옳았다.

레온나토스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황제는 기습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황자. 유랑족 소년이 아래로 내려온 데에는, 황자의 실책도 포함되어있는 건가?”

“…….”

레온나토스는 순간적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언이 곧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