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아르테는 라이안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가신의 마음은 이야기가 다르다.
라이안이 비원궁에 체류한 기간은 길었고, 그의 심복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르테가 노린 건, 그 옆에 있는 심복의 마음을 읽어 라이안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캐내는 것.
하지만, 아쉽게도 가신이 알고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이따금 이상한 이야기를 하신단 말야.]
‘…가끔 이상한 말을 한다고? 그게 뭐길래?’
아르테는 ‘이상한 말’의 정확한 내용을 알기 위해 가신에게 더 신경을 집중했다.
정황상 라이안은 운명석 계약자가 맞을테지만, 그가 무슨 능력인지도, 그의 운명석이 어디에 있는지도 아르테는 모른다.
라이안은 아르테가 신분을 숨기고 황궁으로 잠입했다는 것도, 그녀가 운명석 계약자라는 사실도 모를 테니 정보의 우위는 사실 아르테에게 있다.
‘…적어도, 제1 황자의 능력은 개인에게 곧바로 적용되는 종류는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아르테에게도 그의 능력이 적용되지 않을 테고, 아르테와 아렌이 운명석 계약자라는 사실도 분명 금방 들켰을 테니까.
아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라이안은 운명석 계약자라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참살할 만큼 운명석 계약자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면서 모른척하는 중일 수도 있지만, 라이안이 운명석 사용자에 표출한 분노가 진짜라면 아렌을 계속 살려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가 너무 부족해. 하다못해 그의 운명석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하지만 라이안은 욕실에서 갓 나왔을 때조차도 어떤 장신구도 가지지 않았다고 했다.
운명석 계약자가 한시라도 운명석을 떼놓을 수 있는가.
아르테는 회의적이었다.
자신조차도 목욕할 때 운명석 팔찌를 지니고 들어간다. 운명석 계약자에게 운명석을 지녀야 한다는 강박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그건 아르테가 찾아본 문헌에서도, 자신과 아렌의 경우에 미뤄봐도 확인된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어야 해.’
그의 앞에 직접 나타나는 것은, 아르테로서도 모험이었다. 신분을 숨기고 황궁에 몇번이고 잠입했었고, 한번은 아주 가까이에서 라이안을 마주하기도 했으니까.
그 위험부담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아르테는 라이안에 대해 파악해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아르테는 라이안의 참모가 숨겨둔 속마음을 파헤치는데 더욱 집중했다.
[평소엔 어떤 일이든 권태롭게 대하시다가도, 이따금 혼자 별세계에 계신 것처럼 활발해지니 원.]
‘-칫. 그런 푸념 말고, 황자의 약점이나 장신구에 관한 건 없어?’
마음속을 긁는 갈퀴가 있다면, 양팔을 뻗어 참모의 속을 헤집고만 싶은 아르테였다.
“이봐.”
그 실없는 바람은, 라이안에 의해 금방 무산됐다.
“할 말은 다 끝났나? 인사라니, 이미 나눌 건 다 나눈 것 같은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하. 정작 제국의 차기 주인을 눈앞에 두니, 생각보다도 더욱 긴장이 되는군요.”
“차기 주인이라니, 말이 과하군.”
라이안은 차갑게 웃었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는 네 황자에게 준 과제의 결과에 따라 황태자 직을 결정하실 모양이군. 그리고, 지금 내 상황은 꽤 좋지 않아. 딱히 목표가 없는 과제라니, 기약없이 계속 달리라는 말과 같으니.”
제국의 제1 황자는 지금 자신이 처한 위치를 냉정하게 자평했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선 날 황제로 두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야. 마침 황궁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확인할 방법도 없고.”
“…….”
“…….”
완벽한 제3자인 아르테는 물론, 황자의 최측근인 참모조차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황자는 이어 말했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서 아주 커다란 성과를 가져가지 않는 한, 제국의 황제 자리는 요원할 뿐이야.”
“…‘아주 커다란 성과’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글쎄?”
아르테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않은 채, 라이안은 창밖 아래로 시선을 둘 뿐이었다.
창문 너머 까마득히 아래에 펼쳐진 바다는, 우뚝 솟은 암초들 사이 부서지는 파도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으아아아렌공, 괘괜찮아요?”
“…아마도요.”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의 물음에, 아렌은 건성으로 답했다.
아렌과 발커스는 양쪽으로 네 개씩, 총 여덟 개의 횃불을 꽂아들 수 있는 급조한 지게를 짊어진 채 왕의 길 북쪽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말에 탈 수는 없었다. 이미 옷을 껴입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껴입었고, 횃불까지 주위에 바짝 치켜들었지만 뼈까지 시린 한기에 제대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추위에 강한 말이라도 이만한 추위에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둥그렇게 보일 만큼 외투를 잔뜩 껴입은 아렌이지만, 그조차도 지게를 지탱한 손끝이 얼어붙을 듯 시렸다.
옷으로 무한정 보호하지 못하는 손끝과 귀, 발끝과 얼굴부터 서서히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 바짝 가까이 붙여둔 횃불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많이 껴입었음에도 지금쯤은 의식이 없었겠지.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한기만 더 심해질 뿐 맞은 편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훅.
그때, 발커스가 짊어지고 있던 횃불 중 하나가 꺼졌다.
“안돼!”
아렌은 곧바로 자신의 횃불지게를 기울여 발커스의 횃불에 불을 붙였다.
이건 단순한 횃불이 아니라, 아직까지 아렌과 발커스를 살아있게 하는 생명줄이었다.
“-고맙습니다, 아렌 공.”
“내가 오자고 한 거에요. 병 주고 약 주고 한 거죠.”
“누누, 누구든 한 명은 걸려야 하는 병이고, 자원한 거니 썩 어울리는 비유는 아닙니다.”
“…그렇군요.”
끝이 없는 듯한 추위 속을 걸으면서, 아렌은 생각했다.
‘대체, 이 능력은 무슨 소원을 빌어야 생기는 거지?’
알려진 바를 따르면, 운명석이 계약자에게 주는 능력은 그가 무의식중에 빈 소원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온천지대에 있는 다른 이들까지 다 죽여버리고, 남부로 막무가내로 향하는 유랑족 소년 제이드.
그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면 맞서는 데에도, 협력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때.
“…쩌저저저기, 보입니다.”
발커스는 뼈까지 시린 추위에 아래턱을 달달 떨면서 말했다. 그 역시 겉에 가죽 외투를 잔뜩 껴입었지만, 갖춰 입은 갑옷 때문에 아렌보다도 방한에 더 취약한 모습이었다.
“…보이네요. 제이드.”
맞은 편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유랑족 소년 제이드.
발커스는 그를 보면서, 잔뜩 곱은 손으로 억지로 칼을 뽑았다.
제이드 역시 아렌과 발커스를 보면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형들은 여기 웬일이에요?”
제이드는 설원에서 입던 외투조차 벗어던졌음에도, 조금도 추위를 타지 않는 듯 혈색 좋은 얼굴로 말했다.
“의뭉 떨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들켰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제이드는 문득 표정을 굳히고 목을 양옆으로 우두둑 풀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나갈 때마다 얼어 죽은 사람들이 보이더라? 산맥 북쪽도 아닌데 말야. 그건 아마, 나 때문이겠지?”
발커스는 지금 당장이라도 아이의 목을 떨어뜨리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발이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가지 않았다.
본능이 말리고 있었다. 이 정도 대책으로도, 소년에게 더이상 접근했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발커스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회를 주기 위해 아렌이 시간을 끌었다.
“운명석과 계약한 거, 맞지?”
“운명석? 이걸 말하는 건가?”
입 안에 숨겨둔 흑옥 자갈을 이로 앙 물고 보여주는 제이드.
“역시, 금기의 땅에서 죽은 사람들은 나 때문이었구나. 장례라도 치러주길 잘했어.”
“…장례?”
“손등에 칼집을 내서 한곳에 다 쌓아뒀잖아?”
“집어 치워. 너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라고. 온천지대에서도, 왕의 길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건 나만 그런가?”
지나친 추위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제이드와의 걸음은 발커스의 큰 보폭으로도 열 걸음 안팎.
하지만, 도저히 발걸음이 앞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제이드가 한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만큼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어차피 사람은 살아있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죽여. 직접 손을 더럽히느냐, 스스로 자각조차도 못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러니까, 대량 살인조차 정당하다? 피해자 입장에서 널 살려둘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겠지?”
“그건, 알겠어. 하지만 난 죽기 싫거든?”
아렌은 곁눈질로 발커스를 바라봤다.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발커스도 마찬가지.
아렌은 사력을 다해 한발을 억지로 앞으로 내디뎠다.
“-다가오지 마!”
그 순간, 한데 강하게 뭉친 한기가 망치처럼 투웅,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눈동자의 수분이 얼어붙어 뻑뻑해지고, 몸은 통제력을 잃고 제멋대로 뻗뻗하게 굳었다.
아렌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매고 있는 횃불지게가 땅에 끌려 달그락거렸다.
“어때? 한번 의식하니 이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추추추추추, 추워…”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모두가 동사할 만큼 추위를 느끼는 가운데, 제이드 혼자만 무사한 모양이었다.
아렌은 그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다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얼어 죽어도 상관없으니, 나 하나만이라도 살려달라고 하하, 한 거야?”
‘얼어 죽고 싶지 않다’라는 소원만이라면 그냥 추위에만 멀쩡하면 그만이다. 굳이 주변 기온을 낮춘 다음 자신만 멀쩡할 필요는 없다.
“몰라. 그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아무튼 난 남쪽으로 갈 거야. 평생 떨지 않아도 되는 땅으로 갈 거라고.”
“지금처럼 가는 곳마다, 닿는 모든 땅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면서?”
“-고요해서 좋겠네. 이제 장례는 치러주지 않을 거야. 이제 아무도 만나지 못할 테니 외롭긴 하겠지만, 그 대신 상인들이 파는 모든 물건이 공짜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이 얼어붙은 차가운 세상 속에서 제이드는 평생 살아갈 것이다.
비록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겠지만, 평생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 삶 속에서.
“네게, 이상적인 세계가 그거야? 너 말고 모두 죽은 세계가?”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당연히 내가 우선 아니겠어?”
제이드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무릎 꿇은 아렌은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혈관 속 피까지 얼어붙을 강추위가 점점 더 엄습했다.
아렌은 땅에 걸치듯 쓰러진 횃불지게에 손을 뻗었다.
“그만두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지? 그런 행색으로도 다가오는 게 고작이고, 활도 못 쏠 텐데. 형도 그렇게 움츠린 게 고작이잖아. 아무도 날 건드릴 수 없어.”
“…난 안 해. 힘이 없어서. 대신 발커스가 할 거야.”
“발커스? 저 아저씨? 세 보이긴 한데,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하는데? 지금 움츠러든 꼴 좀 보라지.”
발커스 역시 아렌과 마찬가지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옆에 걸어둔 횃불 두개를 양손에 들고, 몸에 더 가까이 가져다 붙이기까지.
그 역시 추위에 한껏 저항하는 것이 한계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게. 이제 한계야.”
아렌 역시 횃불을 몸에 가까이 가져갔다.
횃불의 불꽃은 모피가 군데군데 남아있는 가죽 외투에까지 닿았고.
-화르륵.
아렌의 몸은, 장작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것이 신호였다.
아렌을 따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발커스는, 전신이 불타오름에도 몸을 일으켰다.
불타는 그대로 검을 뽑아 든 채, 발커스는 아까까지 전혀 좁히지 못한 제이드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