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유랑족 소년, 제이드는 병사들과 함께 협곡을 통과했다.
남쪽 관문에 가까워질수록 아이에겐 생기가 감돌았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덥다니. 원래 날씨가 이래요?”
“산맥 남쪽에선, 선페일 영지는 추운 편에 속해.”
“여기가요?!”
놀라는 아이를 뒤로 두고, 병사들은 계곡을 가로막은 흙 언덕을 파내고 있는 인부들을 발견한다.
어느새 계곡의 남쪽 끝에 다다른 것이다.
큰 바위는 밧줄로 묶어 뽑아내고, 흙을 담은 수레가 지속적으로 남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건 100명이 조금 넘는 인부였지만, 그 인원만으로도 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온천지대에도 저만한 사람은 있었겠지만,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한 일을 진행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계곡을 다 통과하자 아이의 놀라움은 더욱 더 컸다.
좁은 계곡 안에도 눈은 쌓이지 않았지만, 계곡 너머로 눈이 쌓이지 않은 거대한 벌판이 늘어서 있었다.
곳곳에 서 있는 초록빛이 유랑족 소년의 눈을 어지럽혔다.
‘이곳이 대륙에서 척박한 편에 속한다는 걸 알면 완전 뒤집어지겠군.’
“여기가-”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레온나토스가 기사들을 대표해 물었다.
“자, 여기가 협곡의 끝, 얼어붙은 산맥의 남쪽이다. 이제부터는 어쩔 테냐.”
“…모르겠어요. 일단은 전에 말했던 것처럼 남쪽으로 계속 갈 것 같지만-”
“걸어서 갈 테냐? 노새라도 하나 빌려서 줄 수 있다만.”
“아뇨, 짐승 등에 타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요. 어차피 두 발이 튼튼한걸요. 마른 땅을 밟는 건, 여전히 낯설지만.”
설원에서는 평소 단단하게 뭉친 눈이나, 온천지대의 조금 질척이는 땅만 밟아온 제이드였다.
단단하게 뭉친, 마른 땅이 넓게 펼쳐져있다는 것만으로도 제이드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온천지대에서 고립될 뻔한 아이를 무사히 구해줬다는 보람에 기사들은 훈훈하게 미소지었다.
그 이상의 지원은 제이드 스스로도 원하지 않았고, 제이드는 그대로 약간의 식량과 노잣돈만 받아들었다.
제이드가 상행이나 예절, 법도들을 잘 알지는 않겠지만 그건 시행착오를 거치며 차차 나아질 테니까.
떠나려는 제이드에게 아렌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 제이드. 혹시 온천지대에서 가져온 돌 있어? 검은 돌이라거나.”
“…아뇨?”
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그 모습만으로도 거짓말인지 아닌지 분간해낼 수 있었겠지만, 아이의 반응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조금 달랐다.
100명에 한두 명 있는 특이한 사람.
경험과 통계로 사람의 마음을 유추하는 아렌의 그물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거짓말일까? 아니, 하지만 온천지대에 온 지 얼마 안 됐다고도 했고, 유일한 생존자이니 능력이 있었다면 벌써 드러냈겠지.’
멀어져가는 제이드를 곁눈질하며, 아렌은 어느새 레온나토스와 통상 업무에 집중했다.
“허, 참. 유랑족 꼬마까지 데려오고. 아주 여유만만이시구만. 그래, 성과는 있었수?”
광부장 터커가 이마의 땀을 훑어내며 물었다.
레온나토스가 답했다.
“흠, 성과라. 일단 정착마을을 둘 만한 곳을 찾기는 했네. 건축자재들은 모두 산맥 남쪽에서 조달해야겠지만.”
“오! 용케 그런 곳이 있었구만! 그런 좋은 기후라니, 당연히 거기 살던 사람들도 있었겠지?”
“…아니, 아무도?”
광부장 터커의 표정이 뜨악해진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대강 설명하자, 광부장 터커는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막았다.
“…설마, 전염병?!”
아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마 아닐 거에요. 그 가능성도 생각은 해봤지만, 설원에서는 원래 변변한 감기조차도 걸리지 않은 모양이니까. 갑자기 사람을 몰살시키는 질병이 나올 거라곤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이라는 게 있잖아! 이번이 그 시작인 거지!”
“음, 하지만-”
터커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는 있어도, 사실이 아닌 이유는 딱히 없다.
그럴듯한 의견이지만, 어쩐지 아렌은 저 말이 이미 틀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니. 설령 감기와 같은 능력일 수도 있겠지만, 그 감기의 이유는 운명석 계약자에 의해서일 거야.’
막연한 추측이지만 아렌은 이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마치 답안지를 보고 난 후, 기억 날 듯 말 듯한 상태에서 문제를 푸는 듯한, 그런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그 예감이 고했다.
온천지대에, 이미 위험은 없다고.
하지만 그 예감이 사실이라면 필연적으로 다른 물음이 뒤따른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온천지대에서 사라진 위험은 지금 어디로 간 거지?’
“…뭐, 아렌 나리가 괜찮다고 하는 거면 괜찮겠지. 저명한 점술가잖아? 여하튼 이제 길이 완성되려면 적어도 6달은 있어야 하니. 그전에 정착 준비를 다 마쳐야 할 거야.”
“6달이요? 엄청 빠르잖아요!?”
“단순히 계곡을 막은 흙이나 돌을 다 치우는 것만 계산한 거야. 마차가 제대로 다니려면 바닥 돌도 전부 다시 깔아야 하겠지만, ”
아렌은, 황제가 내건 시험의 달성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황제의 시험을 얼마나 잘 해결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얼마나 빨리하느냐다.
이 시험에서 레온나토스는 여전히 유리한 고지에 있었고, 처음 황권에 도전할 때만 해도 손에 닿지 않을 것처럼 멀리 있었던 레온나토스의 황제 등극이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특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유약하고 야망 없는 레온나토스 황자가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된다.
그 가능성이 현실성을 띠기 시작하자 오히려 더 긴장되기 시작한 아렌이었다.
‘-이대로,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그런 바람은 보통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랑족 소년 제이드를 남쪽으로 내려보내고 4일 뒤.
현장에 모여있던 아렌과 병사들은 남쪽에서부터 보고를 받았다.
그건, 왕의 길을 중심으로 모든 초목과 생물들이 죽어간다는 내용이었다.
불현듯 생겨난 죽음의 지대는, 지금도 점점 남하하고 있었다.
*****
황자 레온나토스, 아렌과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따듯한 곳이 있다니.”
제이드는 왕의 길 위에 있었다.
마차 바퀴가 지나가도 될 만큼 평탄한 땅 위에서, 제이드는 아이의 보폭만큼 천천히,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데굴.
제이드의 입 안에는, 이빨 크기만한 흑옥 알갱이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온천지대에 도착한 유랑족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관습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검은 돌이라니. 왜 물어보는지는 모르지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겠지?”
제이드는, 자신의 운명석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운명석을 입에 머금은 채, 제이드가 무심코 빈 소원은 단 하나.
‘절대로, 마을 사람들처럼 얼어죽고 싶지는 않다.’
소년은 힘을 얻었고, 자신이 어떤 힘을 얻었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소년의 눈에는, 갑자기 주변에 있던 무서운 사람들이 갑자기 풀썩풀썩 쓰러져 죽어갈 뿐.
자신과 멀리 있으면 썩어 냄새가 났기에, 제이드는 하나둘씩 죽을 때마다 자신의 거처 주변에 데려와 쌓아뒀다.
자신의 마을에서 장례 치르는 관습대로, 손등에 십자 상처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자신의 주변에서는 시체가 부패하지 않았고, 어쩌다 산 사람을 만나도 소년이 채 다가가기도 전에 옷을 벗어던지며 달달 떨다가 죽어가기 일쑤였다.
제이드는 자신의 코앞에서 죽은 시체에 담담하게 칼집을 낸 뒤 시체 무더기로 데려오기까지 했다.
온천지대에 이제 막 도착한 듯한, 제이드와 또래로 보이는 소년조차 코앞에서 죽고 나서야 제이드는 혹시 자신이 범인이었던 건가, 의심했다.
“-하지만, 아니었지.”
그 직후 만난, 산맥 너머에서 온 기사들은 제이드를 만났음에도 멀쩡했다.
그제서야 제이드는 혹시나 자신이 범인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온천지대에 있던 다른 이들처럼 제이드에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또래 꼬마처럼 놀라지도 않았다. 그들의 친절 덕에, 제이드는 안전하게 산맥을 넘어 내려올 수 있었다.
제이드로서는 예상 밖의 행운이었다.
“여기가, 머무는 사람들의 땅인가? 여기 단단한 돌바닥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되는 거지?”
변변한 짐도 없는 여행길이지만, 이곳보다 수십 배는 더 척박한 설원에서 살아온 제이드였다. 여정에 문제될 건 없었다.
그때.
맞은 편에서 선페일 영지로 향하는 행상인의 마차가 나타났다.
“…….”
제이드는 길옆으로 비켜섰다.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자각은 있기에 최대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차 위에 탄 행상인은 제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고개를 돌려 침을 투, 뱉었다.
“뭐야, 유랑족 새끼 아냐? 오늘은 재수가 없으려니까.”
“…….”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중얼거리곤 지나가는 행상인.
돈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개념이 희박한 유랑족과 가장 많이 부딪치는 사람이 상인들이었다.
문명지역에서 유랑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가 거짓말과 절도일 정도니까.
마차가 다 지나간 후 제이드는 다시 길 위에 올랐다.
-따끔.
“…?”
제이드는 순간 가슴 한 편의 따끔함을 느꼈다.
가죽옷 위로 손을 긁어봤지만.
-따끔.
아픔은 여전했다.
통증은 피부 바깥이 아니라 훨씬 가슴 안쪽에 있는 것 같았다.
겨울이 다가오는 요즘 시기에 북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행상인 뿐이었다.
지나는 행상인들마다 먼젓번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뭐야, 유랑족 꼬마가 왕의 길 위를 걷네? 지금 황제가 누구인지는 아냐?”
-따끔.
“오늘 재수는 텃고만. 아침 댓바람부터 유랑족을 보다니.”
-따끔.
제이드는 익숙했다.
형태는 조금 달랐지만, 닥쳐오는 무례와 매도는 분명 온천지대에 먼저 와 있던 눈의 사생아들과 닮아있었다.
-따끔따끔.
“…….”
하지만 소년의 무표정함과 별개로, 그의 주변 수풀들은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추위에 얼어 죽고, 그 위에 때 이른 서리까지 내려앉는 식물들.
왕의 길 주변으로 강렬한 눈발도, 칼바람도 없이 엄청난 한파가 내려앉았다.
수풀이 얼어 바스러지고, 나무가 얼어 갈라지는 속에서 소년이 앉은 죽음의 땅은 점점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점점 남하하는 죽음의 지대.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렌도 모르지 않았다.
‘-제이드.’
지금 생각해보면 그를 가장 먼저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시체 무더기 속에서 홀로 생존한 소년이, 가장 먼저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로 지목되어야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렌의 눈에 소년은 자신이 대량 학살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이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아렌에게 소년은 일찌감치 용의선상에서 멀어져 있었다.
“-쫓아야 합니다.”
아렌이 강하게 주장했다.
“제이드가 정말 운명석 계약자고 남으로 향하고 있다면, 그것을 풀어준 저희로서는 좌시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아렌.”
레온나토스는 이미 자신의 말을 시종에게 준비시켰다.
“설령 우리 탓이 아니라 해도 남쪽에는 황도가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네.”
긴급한 상황이다. 아렌은 품속 카드 위에 손을 올린 뒤 점괘를 읊는 것과 같은 태도로 말했다.
“-유랑족 소년 제이드는, 더는 희생자를 내지 못할 테니까요.”
아렌은 자신에게 올 후폭풍은 생각지 않은 채, 언령을 담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