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온천지대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도 모른 채 묵숨이 끊어졌다.
자신에 대한 공격임을 알았다면 미처 대응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몸의 이상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를 못할 단계였겠지.
“그러니까, 이들은 자신들이 얼어 죽는 것도 모른 채 가만히 있었다고?”
“어떤 연금술사의 책에서 본 적 있어요. 살아있는 개구리를 솥에 넣고 천천히 열을 가하면, 개구리는 자신이 삶아지는 것도 모른 채 서서히 익어가며 죽는다고요.”
“…개굴이? 그게 뭐야?”
처음 듣는 동물 이름에 사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나토스는 아렌의 말에 반박했다.
“…그건 확실히 신기한 일이지만, 개구리는 사람이 아니야.”
“네. 운명석으로 얻은 능력 또한 가마솥은 아니죠. 물론 증거라기엔 부족하지만, 지금으로선 동사 외에 다른 정황이 없어요. 혹시 모를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부검을 시도하는 거고요.”
“하지만, 기사들의 자긍심이-”
사기가 전력의 7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병력의 사기는 곧 전투력과 귀결된다.
기사들이 강한 이유는 강건한 육체와 잘 마련된 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타 징집병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사기와 자부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기사들에게 사체를 헤집으라는 명령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행히, 레온나토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근위기사 더글라스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아, 전 괜찮습니다, 전하.”
“더글라스 경! 설령 경이 괜찮다고 한들 주변의 시선이-”
“저야, 처음부터 미천한 신분이니까요. 지켜야 할 체통은 없습니다. 어릴 적만 해도 마을 어르신들이 염소나 양을 잡을 때면 꼭 아이들에게 시켜주곤 했죠.”
“…….”
태어날 때부터 귀하신 몸인 황족이나 귀족 자녀들, 혹은 기사가문 출신들은 해본 적 없는 경험들일 것이다.
“…경만 괜찮다면야.”
레온나토스는 마지못해 허락했고, 그 뒤의 진행은 빨랐다.
구덩이를 파 옮기던 시체 중 하나를 바위 그늘 뒤로 가져간 기사와 더글라스.
사체를 눕힌 채, 곧 날카롭게 갈린 더글라스의 단검이 시신의 배를 갈랐다.
사람이 죽는 순간을 몇 번이나 지켜본 기사조차도 눈을 돌렸지만, 더글라스는 지금 광경에 눈을 돌리지도 않고 아직 부패가 진행되지 않은 사체의 내부를 이리저리 살폈다.
부검의 결과는, ‘사인으로 추정되는 뚜렷한 외상 없음’이었다.
*****
“…사체는 깨끗했습니다, 전하. 복강 내 피가 고인 곳도 없었고 다치거나 변색된 곳도 없었습니다. 의원이라면 무언가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본 바로는-”
“-동사의 징후만 더 확실해진 거로군.”
“…….”
주변으로 스산한 바람이 맴돌았다.
낮안개 기사단의 단장, 발커스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레온나토스 전하.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만, 저흰 창과 칼을 가진 상대라면 그 누구든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눈치채지도 못한 채 얼려 죽이는 자를 상대하는 법은, 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죽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온천지대 초입에서 척후를 자원했던 두 기사가 훨씬 망설였을테니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손도 못 써보고 전하를 지키지 못하는 것, 그 상황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진언 고맙네, 발커스 경. 다른 경들의 의견도 그런가?”
레온나토스의 물음에 주변의 다른 기사들 역시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의견 또한 단장 발커스와 같았다.
‘…물러설 때인가?’
아렌은 주위를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눈밭인 곳에 비하면, 이곳은 두꺼운 외투나 심지어 집조차 없어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온난한 장소였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정착하지 않고, 변변한 마을 하나 들어서지 않은 건 분명 오랫동안 되풀이되어온 운명석 계약자들의 횡포 때문이겠지.
아렌이 온천지대 출신 계약자, 눈의 사생아들이 모두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곳의 골칫거리였던 자들은 누군가에 의해 깨끗이 제거되었다.
이제 이곳의 모든 이들을 죽인 범인,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만 찾아내면 새로운 정착마을을 짓는 것도 꿈은 아니다.
설원 한복판에 개척마을을 지어 북부 탐험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고, 이곳에서 산출되는 운명석을 통제할 수 있으니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아렌이 말했다.
“하지만 전하. 이곳에서 대량 살육을 저지른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가 아직 살아있다면, 언제라도 같은 짓을 저지를 지 모릅니다. 다른 유랑족 마을이나 개척마을이 들어선 이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물론 그, 혹은 그들을 내버려 둘 생각은 없네. 언제고 처리해야 할 자들이니까. 하지만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우리는 몰라. 오히려 준비도 없이 지금 맞닥뜨린다면 불필요한 대량의 희생이 뒤따르겠지.”
“…확실히, 그 말도 맞습니다.”
레온나토스의 말은 타당했다.
기사들 역시 이곳에 좀 더 머무는 데 부정적이었고, 사야는 이미 아까부터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아렌은 되돌아가는 것이 아주 내키지 않았다.
단순한 아렌의 변덕일수도, 혹은 운명석에 의한 기이한 예감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이대로 내려가면 아주 크게 후회할 기분이 들어.’
그건, 한동안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충동이었다.
하지만 아렌은 지금 이 충동대로 황자와 기사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점술도 제대로 꺼내 들지 못하는 이상, 아렌의 발언이 가지는 무게는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냥 기분 탓, 이겠지? 여기에 계속 남아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를까, 돌아간다고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것 같은데.’
“좋아요. 돌아가도록 하죠. 이곳을 이렇게 만든 범인은 만반의 준비를 한 뒤 찾는 것이 낫겠죠.”
아렌의 말에 레온나토스와 기사들이 반색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을씨년스러운 곳에서 당장 떠나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렌의 말 한마디에 기사들과 황자까지 움직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랑족 소년 제이드가 말했다.
“형이,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야?”
“뭐? 내가? 그럴 리가 있나.”
“근데 왜 다 형 말을 들어? 형이 허락하니까 그대로 움직이잖아.”
“…그거야, 내 말대로 하면 결과가 괜찮았던 적이 몇 번 있었으니까. 그 영향이지.”
“흐음.”
스스로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렌은 소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이드, 넌 산맥 너머로 가고 싶다고 했지. 산맥을 넘고 난 다음엔 뭘 할 거야?”
“글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아렌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소년은, 나름의 결론을 내린 듯 밝은 얼굴로 말했다.
“우선은, 더이상 못 내려갈 만큼 남쪽으로 내려가 볼까?”
아이의 표정은 해맑았지만, 아렌은 어쩐지 그 표정을 보고 오싹함을 느꼈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
온천지대, 유랑족들이 금기의 땅이라 부르는 곳에서 나온 뒤 기사단은 오면서 박아뒀던 말뚝을 따라 이동했다.
아무 이정표도 없는 설원에서 직선을 그리며 드문드문 박힌 말뚝은, 기사들을 얼어붙은 산맥 협곡 관문으로 안내하는 유일한 징표였다.
“…다른 유랑족이 혹시 뽑아버리진 않겠지?”
“음, 아마도? 누군가 목적이 있어 박아뒀다는 걸 알 테니, 가만히 놔두지 않을까?”
개썰매에 탄 사야는, 기사단을 따라 중간쯤 온 지점에서 그만 헤어졌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혼자서 갈 수 있겠지? 당분간 눈폭풍도 치지 않을 테니까.”
그녀와 네 명의 유랑족 전사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향해 한껏 진로를 꺾었다.
“그럼 잘 가. 어쩐지 조만간 또 볼 것 같지만.”
썰매를 타고 점점 멀어지는 사야.
문득, 그녀가 뒤돌아봤다.
“……?”
사야는 아렌을 향해, 입모양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고]
[생]
[해]
‘…고생해?’
사야를 태운 개썰매는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아렌은 고개를 돌려, 기사들과 함께한 유랑족 소년 제이드를 바라봤다.
그의 복장은 옷이라기보다, 동물 가죽에 가까울 만큼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었고 거칠었다.
온천지대에 사체가 입고 있는 옷이 많았지만 제이드는 한사코 다른 이들의 옷을 벗기는 걸 거부했다.
“이봐. 이제 온천지대도 아닌데, 춥지 않아? 지금이라도 말하면 내 망토 빌려주마.”
“아뇨, 괜찮아요! 옛날부터 추위는 안 탔으니까!”
“이 자식, 씩씩한 것 보게? 유랑족이라 추위에도 강한 건가?”
강인한 기사들조차 몸을 꽁꽁 싸맸기에, 기사들은 소년의 말에 감탄했다.
살육의 참상 속에서 단 한 명 건진 생존자 아이를, 안전하고 따듯한 산맥 너머로 직접 안내하는 작업에 기사들은 만족하고 있었다.
아이는 일정한 간격을 따라 박혀있는 말뚝을 보며 말했다.
“이거를 계속 따라가면 길이 나와요?”
“그래! 이런 곳에서 이정표도 없이 마음대로 다니는 건 여기서 나고 자란 유랑족 정도니까!”
“저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길을 못 찾는걸요? 혼자서는 금기의 땅조차 벗어나지 못하죠.”
남으로, 따듯한 곳으로 가고 싶다. 유랑족 소년 제이드는 중얼거렸다.
기사들이 시험삼아 박아놓은 말뚝은, 길을 찾는데 제법 효과를 발휘했다.
예전 건국왕이 박아놓은 나무 기둥만은 못하겠지만, 이 말뚝에도 눈이 쌓이고 뭉치면 제법 도드라지는 구조물로 남을 것 같았다.
기사들은 소년을 데리고 계속 남하했다.
잠시 뒤.
거대한 얼어붙은 산맥의 남면과 그 사이의 갈라진 협곡이 보였다.
협곡 앞은 눈폭풍으로도 끄떡없을 만큼 잘 관리된 하나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이곳이, 남쪽으로 향하는 관문인가요?”
“관문은 최근에 막 만들었지만. 그보다, 유랑족들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몰랐어?”
“제 마을에 누군가는 알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몰랐어요. 애초에 알 필요도 없고요.”
“…그런가? 이곳보다 남쪽이 훨씬 따듯하단 건 모두 알고 있지 않나?”
“대신 산맥 너머의 대추장의 지배를 받아야 하잖아요. 오갈데 없는 저야 더이상 설원에서 못 살아가지만, 아까 여자애처럼 마을이 있는 사람들은 그냥 이곳에서 살아가면 돼요.”
“…….”
기사단은 관문을 지나 협곡의 길로 접어들었다.
관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몸을 굳혔다.
“전하! 오셨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는?”
“북부에선 정 붙일 곳 없으니, 남부로 가고 싶다더군. 별문제 없겠지?”
“물론입니다! 지금도 공사중이라 위험하기에 유랑족의 출입을 주의를 주고 있을 뿐, 꼭 가야 한다면 막지 않습니다.”
“그래. 앞으로의 일을 위해선, 이곳의 유랑족과 원만한 관계가 핵심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아이를 태운 말과 기사들이 일렬로 남쪽으로 향했다.
협곡 안쪽은 눈이 덮여있지 않았고, 공기도 조금 더 온후했다.
온천지대처럼 땅 위로 작위적인 열기가 올라오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기온.
흔들리는 말의 안장 위에서 소년 제이드는 눈을 감았다.
“…남부라. 좋은 곳이면 좋겠는데.”
중얼거리며, 소년은 왼쪽 손등에 있는 십자 흉터를 오른손으로 감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