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여기, 이쪽이에요.”
무장을 한 기사들을 처음 본 소년은 안내를 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너무 거리낌이 없는데?”
뒤따라가던 레온나토스조차 소년의 태도를 지적할 정도.
소년이 본 시체 무더기가 진짜라면, 이곳 어딘가에 그 참상을 만든 장본인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아이를 보며 측은한 듯 혀를 찼다.
“하긴, 아직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참혹한 광경을 봐버린 거야. 그러니 정상인과 다른 감각을 가지게 된 거겠지.”
‘…그런가?’
전혀 불가능한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아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렌, 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제가 보기에는-”
확실히, 그 소년의 반응은 다른 이들과 확연히 달랐다.
낯선 이들을 보고도 경계하지 않은 점이나, 잔뜩 울먹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화색이 도는 점조차도.
‘…아니, 굳이 저 소년만 특이한 건 아니긴 해.’
아렌이 지금껏 봐온 사람들 중에서도, 이따금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있었다.
대략 100명의 점괘를 보면 그 중 한두 명 정도는 화내야 할 때 웃고, 웃어야 할 때 무관심했다.
저 소년 역시 그 범주 안에 들어간다면, 단지 희귀할 뿐 특별한 일은 아니다.
‘황자 말 대로, 심한 충격 때문에 혼란스러울 뿐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소년이 안내한 곳을 확인하자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기사들은 코를 막으며 신음했다.
“-이건.”
호수라고 불러도 될 만큼의 거대한 온천 웅덩이가 있었고, 지열에 의해 뜨뜻하게 데워진 물은 북쪽에서 천천히 밀려오는 얼음판과 합쳐져 강물처럼 아래로 범람해 흘러 내려갔다.
범람해 흘러가는 강물들 주위에, 누군가가 원기둥 모양으로 쌓아둔 시체 무더기가 몇 개씩이나 보였다.
아렌은 숨을 삼켰다.
무더기 하나당 수십 명, 혹은 백도 거뜬히 넘길 만큼 컸다.
“이 사람들이 모두-”
“아마, 눈의 사생아들이네. 맞을 거야.”
어느새 다가온 사야가 아렌 옆에 섰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옷이 하나같이 낡았고, 맨발로 있으니까. 이곳이 온천지대라 맨발이 편하고, 오히려 신발이 거추장스러웠을 테니까.”
사야가 확인한 눈의 사생아들 사체들은, 별다른 외상은 없었다.
사체의 손등에는 하나같이 칼로 새긴 듯한 십자 상처가 있었지만, 그것이 사인이 될 수는 없다.
“우선 이대로 두면 병이 생길 수도 있으니, 시신들을 묻어야겠어.”
병사들은 말뚝을 박아넣기 위해 가져온 공구로 땅을 파게 될 줄은 몰랐다.
묻어야 할 것은 많았지만, 그만큼 땅이 질척질척해 삽이 쉽게 들어갔다.
“잠깐만! 물에서 떨어진 곳이라야 해요! 수원을 오염시킬 수도 있으니까!”
기사들은 고도로 숙련된 자원이면서도 아렌의 말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아렌이 시킨 일에 따르기만 할 뿐.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종종거리며 아렌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형아들은 누구에요?”
“…그걸 이제 물어봐?”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산맥 너머로 데려가달라고 하다니, 아이치고는 담이 상당히 크다.
‘하긴, 복장만 봐도 산맥 너머에서 왔다는 것쯤은 알겠지만.’
“저기 분들은 제국 황실 기사단 소속, 낮안개 기사단이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은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시지.”
“-황자? 추장의 자식을 말하는 거 맞죠? 저기 형아가 산맥 너머의 차기 추장인 거에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고.”
“우와!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어요!”
이제 몸 붙일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인지, 혹은 새로운 곳을 경험한다는 기대감인지는 몰라도, 소년은 당장 산맥을 넘고 싶어 몸이 달아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태도가 그럴수록 주변의 참혹함은 더욱 부각됐다.
“뭐야, 여기 어린아이까지 죽었잖아? 심지어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기사가 들춰업은 건 아직 부패가 진행되지도 않은, 옷이 깨끗한 소년의 사체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듯한 그 광경에 아렌조차 혀를 내둘렀다.
“저런 위험한 인물이, 아직 어딘가를 다니고 있다고?”
“이미 여기에 없을 수도 있죠.”
“…뭐라고?”
아렌의 말에 소년이 조용히 반론했다.
“이곳에서 대량 살인이 있었다는 건, 최근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겠죠. 원래 눈의 사생아들은 금기의 땅을 벗어나지 않아요. 어차피 딱히 자신을 받아줄 곳도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만약 범인이 새로운 부락이나 마을을 꾸리려 한다면?”
소년의 말에 사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렌? 이 정도면 다 둘러본 거지 않을까? 어디에도 범인은 없었잖아.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어.”
폭주하는 눈의 사생아가 설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면, 그 표적은 정처 없이 떠돌 유랑족 뿐이다.
사야는 자신의 부족에게 얼른 그 사실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사야만 보낼 수는 없는 게, 그녀들이 돌아가면 이미 설원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기사단의 발은 완전히 묶이고 만다.
사방이 비슷해 보이는 설원에서 제대로 길을 찾아간다는 건, 현지인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그래요! 돌아가요!”
소년 역시 사야의 말에 강력히 동의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왜 굳이 그 사람을 찾아야 하죠? 이곳에서 혼자 굶어 죽으려면 하세요! 아니면 설원을 혼자 떠돌다 얼어죽거나!”
소년 역시 이곳을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분위기였다.
하긴, 이곳에서 한번 지옥을 봤으니 추억 따위 남아있을 리 없다.
“…그게 아니면, 혹시 안되나요?”
자신 없이 쭈뼛거리는 소년.
“저같은 유랑족이 산맥 너머에 가서 잘 섞일 수 있으리라고는-”
“아, 그건 걱정 안해도 돼.”
아렌이 소년의 걱정을 일축했다.
“왜냐면, 사실 나도 유랑족이거든.”
“네?!”
“뭐라고?!”
뜻밖의 사실에 소년과 사야가 동시에 소리쳤다.
아렌은 그 반응을 흘리며, 소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앞으로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소년은 뜻밖의 사실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간단하게 대답했다.
“제이드, 제이드라 불러주세요.”
작고 깡말랐지만 심지는 굳어보이는 소년, 제이드에게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
기사들이 파놓은 구덩이로 시신들을 부지런히 옮겼다.
그 와중, 아렌은 현장을 감독중인 레온나토스를 몰래 불렀다.
“전하, 전하.”
“왜 그러지? 그렇게 소곤거려선.”
아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시신을 부검해보고 싶습니다.”
“부검이라고?”
“네. 시신에 손을 대, 무엇이 정확한 사인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부검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 문제는, 이곳엔 의원도 수사관도 없단 말이다!”
“네. 그 대신, 상처를 만들고 확인하는 데는 이골이 난 기사들이 있죠.”
“말도 안 되는 소리! 기사들이 사체의 생살을 헤집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어!”
레온나토스는 생각보다도 강인하게 아렌의 제안을 거부했다.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의 부검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도 미지수인데다, 기사단의 사기에도 영향을 줄 거라고!”
“하지만, 미친 눈의 사생아가 존재한다면 그가 어떻게 혼자서 이만한 학살을 벌였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아까 사야나 소년의 말대로, 설령 범인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생존해있기 어려울 거야. 아무리 준비되어있어도 혼자 힘으로는 오면서 겪은 눈폭풍조차 견뎌내지 못할 테니까. 그 범인은, 아마 다시 찾기 힘들 거다.”
“하지만 살아있다면 앞으로 세워질 개척마을에 두고두고 우환이 될 겁니다. 예전과 지금은 다르겠지만, 과거 건국왕의 정예병력이 이곳에서만 만 단위로 갈려 나갔다는 것을 생각해주세요.”
아렌의 걱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운명석 계약자의 능력은, 다른 계약자에게 통하지 않아.’
아티스 왕자가 아렌을 홀리지 못한 것이나, 아르테의 독심술이 아렌에게 무용지물인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는 이마만큼의 살인을 저지른 거지?’
살인마의 능력은 아마, 사람의 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주변 환경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 환경이 사람을 죽였을 것이다.
온천지대, 금기의 땅은 외부인에게 위험한 땅이다. 어떤 계약자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그 칼이 자신을 향할지 말지 전혀 미지수이기 때문에.
하지만, 한번 계약을 맺기만 하면 더이상 다른 계약자들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계약자의 힘은, 같은 계약자에게는 통하지 않으니까.
“우선은 물어보게만 해주세요. 누군가 지원할지도 모르잖아요?”
아렌의 강력한 부탁에 레온나토스는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레온나토스의 말대로였다.
기사단장 발커스, 그리고 다른 기사단은 아렌의 말에 하나같이 난색을 표한 것이다.
자신의 칼로, 시체를 헤집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역시, 무리인가?’
아렌이 단념하려는 찰나.
기사들의 작업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야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사람들, 죄다 옷을 반쯤 벗고 있네? 설녀라도 만난 건가?”
“…설녀?”
아렌은 다시금 시신들의 복식을 살폈다.
두꺼운 가죽옷을 겹겹이 입었기에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시신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죄다 상의, 혹은 바지 하나씩 부족했다.
마치 입고 있던 옷을 일부러 벗어던진 것처럼.
“정말이네. 아무리 살만한 기후라지만, 옷을 벗어? 너무 더웠던 건가?”
아무리 온천지대라지만 더위를 느낄 정도는 아니다. 바깥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물이라도 묻으면 마르면서 순식간에 열을 빼앗긴다.
“아냐. 반대로, 너무 추워서 벗었을걸?”
아렌이 최선을 다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간단히 말하는 사야.
아렌이 물었다.
“그게 말이 돼? 추운데 왜 옷을 벗어!”
“하지만 실제로 그러는걸? 사람은 추워서 동사되기 직전이 되면 옷을 벗어.”
평생을 눈과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지?”
“그거야 모르지?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걸 남자는 설녀에게, 여자는 설남에게 홀렸다고들 말해.”
‘…그럼, 추워서 죽었다고?’
하지만 온천지대는, 애초에 집 없이 바닥에서만 살아도 될 만큼 온후했다.
설령 동사하기 직전이었더라도 도처에 깔린 것이 온수가 담긴 웅덩이.
자연적으로 저만한 인원이 동사할 이유는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
‘…그런 능력인 건가?’
운명석을 통해 얻은 능력이 사람의 체온을 직접 낮추는 것이라면, 같은 계약자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온도를 낮춘다면, 그 환경 안에 있는 계약자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특별할 게 없어. 불을 뿜거나 바람을 날리는 계약자가 지금까지 없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창을 겨누고 있고, 그 창이 보이지 않는다면.
누구도 섣불리 그 창을 찌를 생각 못한다. 일격에 죽이지 못하면 오히려 반격을 당해 창에 찔릴 테니까.
아렌은 지금도 기사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는 시신들을 살펴봤다.
하나같이 어떤 상처도, 저항한 흔적도 없었다.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