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
말에 탄 40여 명의 기사들이 묵묵히 설원 위를 걸었다.
기사들의 뒤쪽, 여섯 마리의 개가 끄는 썰매 위에 풀썩 올라타 있는 유랑족 소녀 사야와 함께.
대열의 앞쪽을 가던 레온나토스는 뒤쪽의 사야를 곁눈질하며 소곤거렸다.
“…아렌. 저 소녀도?”
“네. 운명석 계약자인 모양입니다. 자신은 아직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요.”
겉모습은 그저 평범하기만 한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출발 직전 한 말은, 레온나토스는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들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까 이야기 한, 우리가 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글쎄요. 출발한 다음에도 몇 번 물어보긴 했지만, 그 뒤로도 별 말을 안 하더군요. 그만큼 밟을 수 없는 땅이 험준하다는 건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무장을 갖춰입고 잘 훈련된 기사단의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나 이런 평지에서, 기병은 보병을 거의 도살하다시피 유린할 수 있다.
‘변수가 있다면, 운명석 계약자가 얼마나 강한지인데.’
아렌은 유랑족 노파로부터 과거 있었던 일을 들었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산맥 남쪽에서 목격한 운명석 계약자들은, 물론 하나같이 상식 밖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잘 훈련된 군대에 대적할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티스 왕자의 경우라면 또 모르지만, 아냐, 그조차도 약점은 뚜렷했어.’
운명석 계약자들이 단신의 힘으로 훈련된 병사 수백 명은 우습게 쓸어버릴 수 있다면, 남부에서도 그런 자들이 왕왕 등장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렌은 그런 소문도, 기록도 접하지 못했다.
유독 산맥 너머, 온천지대에서만 강력한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운명석이 주는 능력은, 계약자의 소원을 이루기 가장 적합한 능력이라고 했지.’
온천지대의 계약자들이 다른 계약자보다 월등히 강하다면, 그 이유는 ‘그래야 하기 때문에’ 일 것이다.
곧 보게 될 온천지대 앞에 어떤 마경이 펼쳐져 있을지, 아렌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이봐.”
“…뭐야?”
수레에서 내려온 사야가 아렌 앞으로 총총 뛰어와 말했다.
“말에서 내려서, 눈을 파.”
“…뭐?”
“눈을 파라고. 타고 온 짐승에 수레까지 묻어야 하니 부지런히 파야 할 거야.”
“다짜고짜 말하지 말고, 이유를 말해봐!”
“눈폭풍이 몰아 칠 거야. 얼어 죽기 싫으면 서두르던가.”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다른 유랑족 전사들과 함께 눈을 팠다.
눈은 단단하게 굳어있었지만, 삽이나 작살로 찌르면 쉽게 덜어낼 수 있었다. 벽돌처럼 잘라낸 눈을 위로 쌓고, 가져온 천막에 물을 뿌려 위로 덮었다.
“얼른 따라 하는 게 좋을 거야.”
사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의 행동이 빨라졌다.
눈폭풍이 무엇인지는 유랑족들의 반응을 보면 알만했고, 타고 온 말이 있는 만큼 파야 하는 구덩이는 더 넓고 깊었다.
‘…과연.’
아렌은 왜 유랑족들이 눈바닥을 파 생활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상에 자리 잡은 건물로는 거센 바람을 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협곡 입구의 천막도 반쯤 파묻혀있었고, 앞에 바람벽을 설치했었지.’
기사들은 자신과 말을 위해 부지런히 땅을 파 내려갔다.
눈으로 된 땅은 한참을 파 내려가도 흙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절반쯤 파 내려갔을 때 이미 바람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몸을 지탱하기도 벅찬 강풍.
아렌은 이미 구덩이 속에 쏙 들어간 사야를 돌아봤다.
사야는 고개를 저었다.
“더 거세질 거야. 세 배는 더.”
“…어서! 모두 서둘러요!”
“아니. 이미 늦었어. 눈은 그만 파고 구멍 아래로 들어가.”
기사들은 말을 아래로 내려보내고, 자신도 들어갔다.
말은 기사들의 포령에 무릅을 굽피고 꿇어앉았다. 꿇어앉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처럼.
“물은 있지? 천막을 물로 적시고 구멍 위로 들어 올려.”
기사들은 안장 옆에 달아둔 수통으로 천막을 적셨다. 빙점 이하의 온도에도 말의 체온과 물통의 물은 녹아있었다.
“다음은, 버텨. 절대 천을 놓치지 마. 놓치면 죽어.”
점점 바람 소리가 날카로워지고, 소녀가 외침은 바람의 급류에 떠내려가듯 주변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고오오오!
설원에 이제껏 본 적 없는 바람이 불어닥쳤다.
지상 위에 있었다면 손도 못쓰고 떠내려갈 뻔했던 강풍은, 설원 표면에 있던 눈을 흩날리며 세상을 온통 하얗게 물들였다.
강풍은 기사들이 들고 있던 천의 온도를 금방 빼앗아, 꽝꽝 얼렸다. 동시에 바람이 품고있던 눈발이 천에 엉겨서 얼어붙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곧 천 위에 반쯤 얼어 딱딱한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그대로 단단한 지붕이 되어 눈구덩이 위를 지탱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렌은 감탄했다.
‘과연. 마을의 지붕이 이런 구조였나?’
구덩이 위로 눈만 빼꼼 내민 아렌.
고작 다섯 걸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시계는 엉망이었다.
영혼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폭풍이 지나간 후.
바람이 잠잠해지고, 기사들이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기사들의 모습은 틈새로 들이닥친 눈싸라기에 범벅이 되어, 눈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지만, 그걸 본 사야는 감탄했다.
“-당신들 대단하네? 누군가는 천막을 놓쳐서 그대로 얼어붙을 줄 알았는데. 모두 멀쩡한 거야?”
“보통 무사들이 아니라, 산맥 아래에서 가장 강한 축에 속하니까 당연하지.”
아렌의 말에 기사들의 어깨가 잔뜩 살았다.
“그래서, 다 죽는다는 게 방금 걸 말한 거였어? 눈폭풍이라 했나?”
“음, 글쎄?”
사야는 스스로도 확신이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뭔가를 알고 한 말이 아니었어?”
“난 자세한 건 전혀 몰라.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
소녀의 말을 들은 기사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이게 지금 놀리나, 는 듯한 표정들이었지만 정작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렌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내가 전에 느꼈던 환각 같은 거겠지. 운명석이 말해 준거지만,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뻐득뻐득하게 굳은 천을 접어서 갈무리한 후, 기사들의 행군은 계속됐다.
하늘은 방금까지 몰아친 폭풍이 거짓말처럼 맑았다.
아렌은 생각했다.
‘부디 저 능력이, 온천지대에서도 기사들을 지켜줄 수 있기를,’
*****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얀 땅을 묵묵히 걸어온 기사들은, 그 거리와 환경이 아니라 풍경에 지쳐 있었다.
그런 기사들 앞에, 자욱한 수증기와 함께 검은 땅이 보이자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눈밭이 아닌 진짜 흙을 보는 것만으로, 기사들은 망망대해 위에서 육지를 본 선원처럼 기뻐했다.
물론, 아렌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모두 조용해요! 주술사의 말이 맞다면, 우리에게 적대적인 주민이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아렌의 말에, 잠시 흐트러져있던 기사들이 얼른 태세를 정비해 주변을 경계했다.
이곳에 모여있다던, 유랑족의 부락에서 뛰쳐나간 유랑족.
눈의 사생아들이라 불리는 이곳의 주인들이었다.
유랑족이 한 땅에만 정착하는 것도 특이했고, 많은 이들이 모였음에도 무리를 이루지 않고 모두 독자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또 특이했다.
아직 온천지대의 초입이라 그런지 주변에 인적은 전혀 없었다.
“…고요하군.”
“네, 전하.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아렌의 손짓에 기사 두 명이 먼저 앞서갔다.
혹시나 눈의 사생아들을 만나도 레온나토스가 물러날 시간은 벌어주기 위한 일종의 척후였다.
그 대신 앞장선 두 기사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겠지만, 기사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한참을 앞서간 기사들은 주변을 꼼꼼하게 살핀 뒤,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아렌은 황자, 후발대와 함께 천천히 전진하며 사야에게 물었다.
“사야. 눈의 사생아들은 위험한가?”
“글쎄? 몰라?”
소녀의 대답에 힘이 빠질 뻔했지만, 다행히 사야는 자신의 대답을 부연했다.
“머무는 사람들은 처음 본 사람이 위험한지 아닌지를 금방 분간하나 봐?”
“-그 말뜻은, 위험한지 아닌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야?”
“그래. 나를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전부 다를 테니까. 하지만 다른 점은, 어떤 운명석 계약자에게 눈앞의 사람을 죽이는 건 한숨 쉬는 것보다 더 쉽다는 거지.”
즉, 만나는 눈의 사생아가 황자와 기사들을 공격할지 어떨지는 미지수라는 것.
물론 그럴 마음만 있다면 기사단의 포위망조차 무시하고 황자를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군. 이해했어. 부디 마음씨 착한 사생아라면 좋겠는데.”
기사단은 앞서 나가 있던 기사들을 거의 따라잡았다.
먼저 주변을 정찰하던 기사들은 본대와 합류하자 어색한 부분들을 쏟아냈다.
“지나치게 고요합니다. 동물도 사람도,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이 거주했다면 하다못해 움막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너무 깨끗합니다.”
기사들의 우려는, 사야가 일부 풀어줬다.
“집이나 시설이 없는 건 당연해. 여기엔 건물을 지을만한 재료가 없으니까.”
“…집이, 없어?”
“이곳에 건물을 지으려면 뭘로 지어야 하지?”
“그야, 원래 그랬던 것처럼 눈이나 진흙을 구워서… 아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온천과 지열로 이 주변의 눈은 죄다 녹아있었다. 눈으로 건물을 짓는 것은 무리다.
산맥 남쪽에서 그러는 것처럼 진흙을 구워 건물을 지어도 되겠지만, 애초에 진흙을 고온으로 구울 뗄감도 부족하다.
그냥 진흙을 말려 지으면 곳곳에서 엄습하는 습기로 금방 물러져 버릴 터.
“그럼, 눈의 사생아들은 어떻게 생활하는 거야?”
“나도 잘 몰라. 그래도 쓸만한 돌이 없지는 않을테니까, 금기의 땅 중심부로 갈수록 돌로 쌓은 움막이 있을걸? 거친 눈의 사생아도 더 잘 만나겠지만.”
눈의 사생아들의 행보는 유랑족들에게도 최우선 관심사기에, 이곳이 어떤 곳인가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확실히 이상해. 추위를 피하고자 중앙부일수록 사람들이 많은건 맞아. 하지만, 중심부의 충돌을 피하려고 외곽에 자리 잡은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아렌은, 다시금 온천지대의 전경을 바라봤다.
검게 드러난 땅과 곳곳에서 솟구치는 물과 수증기.
생명을 거부하는 혹한의 땅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뭐야, 이 불길한 기분은.’
아렌의 기분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은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느끼는지, 환호성을 지르던 아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로 무겁게 침묵을 유지하며 전진했다.
온천수가 스며든 땅은 뜨거우면서 질척질척했고, 몇 번이나 말의 발굽이 진창에 처박혔다 올라왔다.
설원을 걸을 때도 단단한 눈 위를 잘 버티던 말발굽이었다.
‘이런 곳에서 달렸다간 발을 다치기 십상이겠어.’
그러던 중.
“와악, 사람이다!”
바위 그늘 아래, 진창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아이 하나가 기사들을 향해 달려왔다.
기사들은 칼을 뽑아 대치했고, 살벌한 환영에 아이는 그대로 멈칫했다!
아이가 멈칫한 틈을 타 아렌이 물었다.
“멈춰. 함부로 접근하지 마.”
“크, 큰일이에요!”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 두 손을 앞으로 보이고-”
“사람이 다 죽었어요!”
“-뭐라고?”
“여기 있던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요!”
아이의 표정은 절박했다. 그리고, 사실이었다.
‘-어쩐지 석연찮은 기분도 들지만.’
설령 유랑족이더라도 인간인 이상, 기본적인 반사까지 막을 수는 없다.
소년의 말은 과장이나 숨김이 있을지라도, 그 안의 내용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어디지?”
아렌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황자가 직접 온천지대 심부로 가는 건 위험하다 생각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제가 안내할게요! 그 대신, 절 산맥 남쪽에 데려가 주세요! 제발요!”
아이는 거의 빌다시피 애원했다.
이 아이 역시 오갈 데 없어 온천지대로 흘러들어왔을 것이다. 한 사람 정도 산맥 너머로 보내주는 건 일도 아니다
“좋아, 그렇게 하마.”
“약속한 거에요!”
기사들이 가까이 있는 것이 퍽 안심되는 듯, 아이는 아까와는 또 다른 태도로 기사들을 인도했다.
아렌은 말에서 걸어 소년과 함꼐 나란히 걸었다.
아렌이 물었다.
“그런데, 손은 다친 거야?”
“아, 네. 조금.”
아이는 손을 감싸 쥐었다.
아이의 손에는, 칼로 새긴 듯한 십자 상처가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