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아렌. 몸은 좀 괜찮은가?”
아렌이 누워있는 황궁의 병실에 레온나토스가 찾아왔다.
황제와 독대하며 나왔던 내용을, 아렌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레온나토스.
마치 자신이 섬겨야 할 황자에게 직접 보고받는 형국이지만, 레온나토스도 아렌도 그것을 직접 문제로 삼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께선, 생각보다도 욕심이 많으시군요.”
네 명의 황자를 네 방향으로 보낸 저의를 듣고 아렌이 솔직히 한 생각이었다.
네 명의 황자가 황권에 욕심이 있는 만큼, 더욱 임무를 열정적으로 할 것이다. 황자들 중 황제가 되는 건 한 명이겠지만 그 전까지 제국은 네 배 더 빨리 발전한다.
“동쪽과 북쪽은 무주지나 다름없지만, 남쪽과 서쪽에서도 비슷한 강도의 임무가 주어졌다면 이웃국의 반발을 꽤나 살 텐데요?”
“아니. 오히려 남쪽과 서쪽에는 너무 간단한 임무를 줬다고 하시더군. 너무 쉬운 임무일수록 스스로 허들을 높여, 더 노력할 거라고.”
“그건, 그럴듯하군요.”
제4 황자 가웨인이 향한 서부는 별걱정 없었다.
호전적으로 인식될 가웨인은, 호전적인 이웃 황제를 우려할 도국에 매력적인 황제 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아렌에 의해 도국 연합의 두 구심점은 레온나토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가웨인이 받은 임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아렌이 충분히 기반을 닦아둔 후이기에 큰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남부도 마찬가지. 차기 아트마 대주교 후보라 불리는 심안의 아르테는 아렌과 같은 운명석 계약자 동지였다.
서로의 나라에도 알리지 않은 채 비밀 동맹을 맺은 아르테가 제1 황자 라이안에 호의적일 리 없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단 하나인데.’
이미 아르테는 몇 번이나 신분을 속이고 황궁 안에 드나들었다.
그 중 한번은, 직접 라이안에게 얼굴을 보이기까지 했다.
바로 얼마 전에 교국 사절단의 일반 수행원이었던 여자가 교국의 주교 복장을 하고 있다면 외교적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
‘…어차피 지금 생각해봤자 소용없지. 아르테가 알아서 잘하겠지.’
아렌은 일말의 걱정을 떨치듯 레온나토스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물었다.
“이미 폐하께도 말씀드렸지만. 설원의 온천지대를 확인할 거다. 제국의 병사들과 개척민들을 적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해.”
“그렇다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군요. 병사들을 더 데려가시겠습니까?”
“-아니.”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점령군이 아니야. 이 이상의 머릿수는 필요도 없거니와 효율적이지도 않아.”
“저도 동감입니다. 특히 온천지대의 경우, 머리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닐 테니까요.”
건국왕은 만 단위의 병력을 대동하고 북부로 향했지만, 결과는 기록에도 남기지 못한 참패였다.
기후가 원정군에 웃어주지도 않는 데다가, 상대는 기존의 모든 상식을 거부하는 운명석 계약자들이다.
“적어도 속도만이라도 우세하도록, 말에 찬 인원들로만 꾸리는 것이 최선이겠죠.”
“-말이라.”
하지만 기마가 가능한 인원은 그리 갑작스레 충원할 수 없다.
‘양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남은 건 질이지.’
아렌은 레온나토스에게 말했다.
“전하. 공사 인부들에게 제공하고도, 아직 은괴가 남아있겠죠?”
*****
수도로 내려갔었던 레온나토스가 다시 선페일 영지로 올라왔다.
굳이 내려가지 않았어도 상관없었을지 모르지만, 황제의 숨겨진 의도도 듣고 운명석에 대한 입장도 다시 정리할 수 있어서, 레온나토스는 남은 일말의 망설임조차 떨쳐버릴 수 있었다.
광부장은 황도에 다녀온 레온나토스를 맞이하다가, 기사들의 뒤로 줄줄이 뒤따르는 말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말들은 뭐요?”
“선페일 영지에서 자란 말들이다. 황궁의 군마보다도 추위에 더 잘 버틴다더군.”
“추위요? 지금 기사단이 쓰는 말도 별로 추위를 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서는 그렇지만. 산맥 너머라면 이야기가 다를 테니까.”
“…산맥 너머?”
“기사단과 함께 북부로 향하겠다. 광부장 터커. 말이 지나갈 길은 준비되었나?”
“…그거야, 일단은 준비되어있지만.”
터커는 광부들을 지휘하며 직접 사용하던 곡괭이 끝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직 마차가 지나려면 한참 멀었지만, 말이라면 그나마 간신히 지나갈 수 있긴 해. 이미 교대 인원이 일주일마다 지나고 있긴 하니까. 짐을 가져가더라도 짐말의 등에 싣는 게 훨씬 편하니까.”
“다행이군.”
레온나토스와 그 기사들이 북부로 향하는데 걸림돌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아렌은 신신당부했다.
“우린 어디까지나, 설원의 온천지대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겁니다. 괜한 다툼이 일어나선 안 돼요.”
“물론이지. 무엇을 위해 기사단을 대동하는 건데.”
일이 틀어지더라도 말의 기동력이라면 신속하게 그 자리를 이탈할 수 있다.
기사들은 자신의 애마마저 바꿔탄 채, 혹한 채비를 단단히 한 채 좁은 협곡의 길을 지났다.
걸어서는 이틀 정도 걸리는 길이지만, 말의 속보로 걸으니 반나절보다 조금 더 빠른 거리였다.
협곡의 끝에 다다른 아렌은 터져 나오는 탄성을 참지 못했다.
“…이만큼이나? 대단한데?”
아렌이 수도에 다녀올 동안, 협곡의 북쪽 끝은 어엿한 관문이 되어 있었다.
목책이 높게 서 있는 관문은 위아래로 닫히는 문이 있었고, 그 사이로 궁수가 서 있을 수 있는 난간이 있었다.
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뿌듯한 듯 보고했다.
“네. 이따금 유랑족들이 와 건물을 구경하고 가더군요. 지금까지 적대적인 유랑족은 없었습니다.”
“가끔씩은 물건들을 가져와 교환도 하니까요. 그들은 이 곳을 통해 아래로 내려갈 생각도 없었던 모양인지, 통제받는다는 생각조차 안 하더군요.”
“다행이군요. 유랑족의 적대감을 피하는 건 언제나 옳죠.”
아렌은 타고 온 북방 말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선페일 지역에서 나고 자란, 선천적으로 체모가 더 풍성하고 몸통이 두터운 말.
몸통이 두꺼워 혹한의 날씨에도 심부 온도를 조금 더 보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갑처럼 천을 둘러 추위를 지켜야 했지만.
아렌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온천지대로 가려면, 우선 전에 저를 안내했던 유랑족 마을로 가야 합니다.”
“장소를 기억하나, 아렌?”
“글쎄요… 당시엔 거의 눈을 가리다시피 한 터라.”
햇빛을 반사한 눈에 시력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어차피 눈을 뜨고 있었어도 주변을 분간할 지형지물은 없었다.
아렌이 기억하고 있는 건, 어디로 갔는지 대략적인 방향 뿐.
“마을은 이쪽으로 쭉 가면 있었습니다.”
‘…괜히 장소를 빙글빙글 돌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아렌의 말을 믿고 기사들이 출발했다. 기사들이 타지 않은 말 몇 마리는 뒤에 큰 썰매를 매달고 있었고, 그 썰매에는 기다란 나무 말뚝이 잔뜩 실려 있었다.
“가는 동안, 이 말뚝을 하나씩 받아두죠. 혹시나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아렌이 생각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지만,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는 않는다.
아렌은 카드를 뽑아 들고 점괘의 형식을 빌려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저흰 유랑족의 그 마을에 잘 도착할 테니까요.”
“그건, 아렌 네 점괘인가?”
“네. 한번 시험 삼아 말해본 겁니다.”
최악의 경우, 언령이 지켜주겠지.
아렌과 레온나토스, 기사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을 향해 출발했다.
*****
걸어서는 반나절 걸리는 길이었다. 말로는 그보다 훨씬 빨랐지만, 향하면서도 아렌은 내내 불안했다.
‘방향을 아주 조금만 틀려도 전혀 다른 곳으로 갔을 거야.’
참고할만한 이정표조차도 없다.
아렌과 기사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넣는 말뚝에만 의지한 채 한 방향으로 쭉 향했다.
다행히, 기사들은 제대로 길을 찾았다.
설원 위에 파인 참호와 방으로 사용했던 눈 구덩이들.
하지만, 그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방의 지붕을 이루고 있던 천은 이미 수거해가 거대한 눈구덩이처럼 보였다.
“-이곳이, 유랑족의 마을인가?”
“네. 하지만, 이미 이곳을 떠난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일정 시기마다 마을 위치를 옮기는 모양입니다.”
“그래. 괜히 유랑족이라 불리지 않을 테니.”
하지만, 이래서야 온천지대가 어디 있는지 처음부터 조사해야 한다.
아렌이 허탈한 한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 불렀어?”
좁은 참호 아래에서 유랑족 소녀, 사야가 얼굴만 쏙 꺼냈다.
그와 함께 유랑족 전사도 다섯이 있었지만, 40인에 달하는 기사단에 비하면 사소한 전력.
실제로 유랑족 전사 다섯은 기사들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아렌, 이 소녀는?”
“저를 이곳 마을로 안내해줬던 사야라는 자입니다. 유랑족 부족의 차기 추장으로 내정돼있지요.”
“호오.”
“근데 사야. 우리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어?”
“그래. 주술사 할멈이 이야기해줬거든.”
사야의 말에 레온나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술사?”
“유랑족의 추장입니다. 그들도 운명석의 계약자죠.”
“호오, 그렇군.”
소녀는 아렌과 레온나토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다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우리 옛 마을 터는 왜 찾은 거지? 뭔가 내게 필요한 게 있는 거지?”
“그래. 온천지대가 어딘지, 확인하고 싶어.”
“…거기에 가려고? 내가 전에 했던 말은 까먹은 거야?”
헤어지기 전, 사야가 한 마지막 당부였다. 온천지대는 발을 들이지도 말고, 찾으려 하지도 않을 것.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그곳을 직접 보고 싶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공존할 길은 없는지.”
“공존? 눈의 사생아들과 공존한다고? 이만한 전사들을 데리고 와서?”
“이만한 숫자는, 레온나토스 전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숫자야. 온천지대에 무엇이 있는지 우린 전혀 모르니까. 단언하지만, 우리가 무고한 유랑족들을 해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래, 아렌의 말이 맞아.”
아렌의 한걸음 뒤에 물러나 있던 레온나토스가 나섰다.
“아렌의 말은 내가 보장하지, 유랑족 소녀.”
레온나토스를 처음 의식한 사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높으신 분이야?”
“사야. 이 분이 바로 제국의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셔.”
아렌이 급히 설명했지만 사야에게 와닿지는 않은 듯했다.
“-흠. 산맥 너머 추장의 열두 번째 아들쯤 되는 건가? 장남도 아니고, 꽤 고만고만해 보이는데.”
고개를 갸웃한 사야는 이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온천지대는 이쪽 방향으로 쭉 가면 있어. 눈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걸어서 닷새면 도착할 거야. 그 말들이 잘 버텨준다면 더 빠르겠지만.”
읏샤, 기합과 함께 사야는 참호 아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도 따라갈래.”
사야의 돌발발언에 유랑족 전사들일 쩔쩔 매며 만류했다.
“사야! 위험하다!”
“이건 이방인의 일일 뿐이야! 우리가 관여할 필요 없다!”
“하지만, 높으신 분이라잖아요? 가다가 눈폭풍이라도 만나면, 산맥 너머의 추장은 심기가 무척 상하겠죠. 우리 잘못도 아닌데 잘못이 되어버릴지도 몰라요.”
사야의 말에 듣고 있던 아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눈폭풍? 그냥 폭풍과 다른 건가?’
“그래도, 마을에는 연락을 해야겠죠. 아저씨들 중 한 분이 제가 이 자들을 따라갔다고 얘기해주겠어요?”
아무래도 그녀가 따라올 분위기.
아렌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설원의 사람인 사야가 따라온다면 그보다 확실한 길 안내 요원은 없을 테니까.
“…사야 네 고집을 누가 말리겠어. 그래, 마을에는 뭐라고 전달하면 되겠냐?”
마을로 돌아갈 유랑족 전사 하나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별로 할 말은 없을 거예요. 주술사 할멈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유랑족 소녀, 사야가 말했다.
“제가 따라가지 않으면, 이자들은 전부 죽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