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운명석이 만월강 원류가 얼어붙은 산맥 너머에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얼어붙은 산맥 북쪽에 있다는 것만 알 뿐, 조사가 거의 진행되지 않은 곳이라 밟을 수 없는 땅 어딘가 있을 수원은 그저 상상의 영역일 뿐이었다.
“-그 강물이, 모든 운명석의 원산지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정확히는 얼음이 녹아 섞이는 형태인 것 같지만, 그렇게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고대 아티스 인들은 만월강에서 떠내려오는 흑옥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때의 유물이 지금도 남아있기에, 아티스 왕국의 마지막 왕자가 운명석과 계약한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아티스 인은 운명석에 대한 것을 잊었고, 그 끝은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멸망이었다.
“…우연치고는 절묘하군. 건국왕께선 북부의 온천지대를 끝내 취하지 못하고 물러났고, 수백 년 후 제국은 대확장 전쟁에서 온천지대의 하류, 만월강의 치수시설을 박살냈다라.”
“네. 그리고 그 땅을 취하지도, 괴뢰국으로 두지도 않고 내버려 뒀죠. 밖에서의 개입 없이는 절대 자립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 다음에.”
우연의 일치 일수도 있다.
하지만 제국은 운명석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삭제할 만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북부와 동부에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면.
“…만약 우리가 온천지대를 방문한다면, 동부로 간 테오드릭 형님의 일을 방해하지는 않겠지?”
“모든 일에 절대란 없죠. 하지만 아마 괜찮을 겁니다. 그보다도-”
북으로 향하는 협곡의 공사 현장에서, 아렌은 무의식중에 뒤쪽을 바라봤다.
남부, 제국의 황도가 있는 방향이었다.
“전하께서 받으신 임무는, 산맥을 넘는 길을 만드는 것 하나 뿐입니다. 개척 마을을 세우거나 유랑족과 교류를 쌓는 것 모두 길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죠. 하지만, 밟을 수 없는 땅 너머로 진출하는 것이 정말 황제 폐하의 뜻일지는 미지수입니다.”
제국이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운명석의 정보를 다시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 말 뜻은-”
“직접 물어보고 오는 게 어떨까요.”
아렌은 동네 장터에 다녀오는 것처럼 쉽게 말했지만, 이곳은 제국의 북쪽 끝이었다.
“…어쩔 수 없지.”
레온나토스도 결국 아렌의 말에 응했다. 황도까지는 먼 길이지만, 황제에게 직접 물을 내용은 서신이나 전언으로 다룰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협곡의 공사는 그대로 유지한 채 레온나토스와 아렌, 낮안개 기사단만 바삐 남쪽으로 향했다.
황제에겐 공사에 대한 중간 보고도 할겸, 북부 운명석에 대한 입장도 물어볼 예정이다.
“산맥을 넘는 길 자체는 시간만이 문제일 뿐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직 설익었다지만 길을 계속 유지할 방안도 마련되어있고요. 어쩌면 이번 방문을 계기로 폐하께서 임무의 완수를 인정해주실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
말에 탄 채 속보로 향하는 길.
아주 편안한 여정은 아니지만, 한두 마디 잡담이 어려울 만큼은 아니다.
‘뭐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아렌.”
“네.”
“최근, 점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나?”
“…….”
레온나토스의 예리한 관찰력, 은 아닐 것이다.
아렌이 이전과 달리 점괘를 선뜻 내놓지 않는 장면은 꾸준히 있었고, 아렌과 가장 가까이 있던 레온나토스이기에 눈치채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니까.
아렌은 괜히 얼버무리지 않고 말했다.
“…네. 언제부턴가 제 점괘에 확신이 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건 앞으로도 계속 그런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앞만 응시하던 레온나토스는 아렌을 돌아봤다.
“이참에 말해두겠지만 아렌, 난 널 점술가이기에 비서관으로 뽑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 영영 점술을 못 보게 된다 해도 전혀 기죽을 것 없다는 말이야.”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점술을 볼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제게 남은 얼마 안되는 무기니까요.”
레온나토스에게 말한 대로, 점술의 효과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너무 효과가 좋아서 문제였다.
‘-그러고보니. 테오드릭에게 해준 점괘가 있었지.’
테오드릭이 받은 임무는 만월강 동부의 치수시설을 되돌리는 것.
아렌은 생각한다.
‘테오드릭에게 해결책은 강에 있다고 했는데. 강에서 해결책을 찾았을까?’
*****
제국의 제9 황자 테오드릭은, 아티스 해방전선과 함께 만월강의 상류로 향했다.
강과 가까운 지대일수록 땅이 질고 습했기에 약간의 이동에도 제약이 심했지만, 아티스 해방전선은 아렌의 점괘라는 사실만으로도 만월강 상류로 가야 한다는 데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아렌 녀석, 이만큼이나 신뢰를 사다니. 5년이나 전인데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아티스 영토의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지대가 높아졌고, 침수된 곳도 적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험준한 바위 지형이 늘었다.
북쪽 앞에는 앞길을 가로막은 거대한 장벽, 얼어붙은 산맥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산맥에 가까워질수록 넓고 평탄하게 흐르던 만월강의 폭도 좁고 빨라졌다.
얕은 경사면을 오를수록 강물은 이제 급류가 되어 휘몰아쳤다.
강을 거슬러 가며 며칠째 둘러보고 있지만, 아렌이 말한 ‘옛 아티스를 되돌리는 방법’은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곳의 강을 막아 큰 저수지를 만든다면, 침수된 곳을 막을 수 있을까?”
“글쎄요.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급으로 따라다니던 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훨씬 아랫부분에, 원래 있던 둑의 흔적이 보였잖아요? 다시 그만한 규모의 둑을 만들지 않는 한 무리에요. 지금 기술력으로는 만들기 쉽지 않고요.”
“…그런가? 확실히 품은 들겠지만, 제국의 역량이라면 불가능하진 않을 텐데. 실제로 아티스에 존재했던 시설이잖아?”
도시 하나를 통째로 수몰시킬 수 있을 만한 거대한 저수지는 강의 범람을 막아줬고, 곳곳에 달린 수십 개의 수문은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물줄기를 보낼 수 있었다.
테오드릭은 막연히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미 제국에서 여러모로 알아본 핀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 치수시설의 상당수는, 이 지역에 사람이 정착하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더군요. 아티스 인들이 한 건 단지 그걸 조금 고쳤을 뿐이라고요.”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고대의 시설들은 많이 있었다.
태양교가 자신의 본산으로 사용하는 대신전이나, 바다 위 솟아있는 암초들 위에 걸쳐있는 아트마 교의 비원궁이 그 예였다.
아티스의 치수시설 또한 상고시대 이전, 기록에도 남지 않은 옛날 선주민들이 남긴 유산 중 하나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난리 났군. 여긴 내가 올 곳이 아니었나봐.”
테오드릭은 육체파다. 검술이나 전술, 전략 등 몸을 쓰거나 그에 준하는 활동에는 자신 있지만 정치나 내정, 건축토목에는 그리 밝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도 그 세밀함과 방대함으로 현대인들의 기를 죽이는 선주민들의 유물을 복원해야 한다니.
“…선대 폐하들께서는 왜 그초록 철저히 파괴해버린 거야. 후손이 고생하잖아.”
테오드릭은 지금 당장이라도 모두 다 포기하고 물러나고 싶었다.
이미 산세는 너무 험해져 더 이상 상류로 갈 수는 없고, 물줄기는 깎아지른 듯한 산맥 너머 협곡 사이를 구불구불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칼날같은 바위 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급류에 잠깐이라도 휘말리면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테오드릭은 무심결에 강물 아래를 나려다봤다.
바위 위,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걸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흰색 물보라인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곧 흰색 가죽옷을 걸친 시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유랑족인가?”
펑퍼짐한 흰색 가죽옷은 제국민들이 애용하는 옷차림이 아니다.
거센 물살에 시달려 여기저기가 부딪힌 채, 부르튼 살 사이로 뼈가 드러나 보였다.
“…상류에서부터 떠내려온 건가 보군요. 불쌍하게도.”
밧줄이라도 매지 않는 한 시체를 수습하기도 어렵다. 안면도 없고 부패할대로 부패한 시체에 굳이 그만큼의 공을 써야 하는 가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저만한 급류라면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겠군. 곧바로 의식을 잃었을 테니. 어쨌든,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 별다른 단서는-”
테오드릭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고, 테오드릭의 시선을 좆은 핀의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떠내려온 시체는, 방금 황자가 발견한 한 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체들은 한 눈에 띄는 것만도 다섯 구, 그리고 지금도 물살에 치이며 빠른 속도로 하류로 사라지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시체 무더기에서 거대한 삽으로 한 삽 푼 다음 강물에 뿌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테오드릭이 확인한 것만 20구 이상.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는 않은 광경이었다.
“…아렌 녀석, 강에 실마리가 있다고 했지. 설마 이게 실마리인가?”
테오드릭은 으스스한 광경에 압도되면서도, 한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만월강의 상류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레온나토스와 기사들은 이례적인 속도로 도로를 주파해 황도에 도착했다.
그즈음 해서, 아렌은 말 위에서 사실상 비실대기만 할 뿐이었다.
“아렌, 아직도 기운이 없나? 이제 곧 황도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몸이 낫질 않는군요.”
“것 참, 이상하군. 같은 것을 먹고 잤는데.”
평소 아렌이 강행군을 힘겨워한 적 없기에 더욱 의문인 레온나토스.
물론, 아렌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테오드릭이, 동부에서 뭔가 발견한 건가?’
아무래도 그 발견이 꽤나 극적이었던 모양이다.
발견이 별것 아니었다면, 아렌에게 오는 데미지가 이토록 크지 않았을 테니까.
아렌은 도착하자마자 의무실의 침상을 빌려 누웠다.
그 사이, 레온나토스는 스스로 황제를 만날 채비를 했다.
황궁 내원, 황제의 침상 앞.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황제, 브륀할트 8세는 레온나토스에게 말했다.
“흠. 오늘은 너 혼자인가.”
“네. 아렌은 여독이 심한 듯해 지금 의무실에 있습니다.”
“그런가.”
황제의 말은, 명백히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래, 산맥 너머의 일로 보고할 게 있다면서. 그런 중요한 보고를 아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그건….”
레온나토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렌을 부른다는 대답도, 아렌을 부르지 않겠다는 대답도 그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기에.
레온나토스의 대답을 한참 기다리던 황제는 씨익 웃었다.
“이거 미안하군.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농담이 좀 과했을 뿐이야.”
“아닙니다. 괘념치 마시지요.”
고개를 숙이면서도 레온나토스는 속으로 외쳤다.
‘거짓말. 방금 대화도 내 그릇을 가늠해본 거면서.’
병상 위에서 황금 가면을 벗고 있었지만, 황제는 여전히 황제였다.
이미 고비를 넘긴 몸, 황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북부의 운명석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민이라고? 어이가 없구나. 그것 또한 고려하라는 의미로 모든 것을 일임한 것인데.”
“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중대 사항인 만큼 확실히 다루는 것이 좋아보였기에.”
“…하긴. 신중은 황제의 덕목이기도 하지.”
레온에 대한 날을 조금 누그러뜨린 채 황제는 물었다.
“일단 네 판단을 들어보고 싶구나. 너는, 북부와 운명석에 대해 어떻게 다룰 생각이냐.”
레온나토스는 선페일 영지에서부터 황도까지 내려오던 긴 시간 고민했던 바를 말했다.
“저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