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아렌은 노파가 있던 방 밖으로 나왔다.
사야는 병사들과, 그들에 거의 기어 올라가다시피 한 유랑족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그래. 들을 만 한 이야기였어.”
“그거 다행이네.”
아이들은 병사들에게 눈으로 예쁘게 뭉친 관을 씌워주고 있었고, 병사들은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천진한 웃음을 짓는 아이들의 눈 관을 뿌리치지 못했다.
‘…아이들이 놀려먹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유랑족 아이들 또한 눈으로 된 관을 쓰고 있었다.
보통은 화관을 만들면서 놀겠지만, 이곳 설원에는 꽃 따위 피어있지 않다. 아이들은 자연히 평소 눈을 뭉쳐서 노는 듯했고, 추위에도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눈을 머리 위에 얹어놓고 있었다.
놀아주는 병사들만 죽을 맛이었다.
“식사를 대접한다니까, 먹고 가. 날이 추운 만큼 속이 든든해야지.”
억지로 머리에 눈 관을 씌워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힘든 만큼 식사 대접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잠시 후, 한 방에만 열다섯 명이 모였고, 나무 그릇 안에 고깃국이 담겨 나왔다.
누런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고깃국에서는 조금 누린내가 났지만, 진한 육향이 인상적이었다. 주먹만 한 고깃덩이가 두 개나 들어있어, 먹을수록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렌이 물었다.
“맛있는데? 이건 무슨 고기지?”
“물범.”
“…물범?”
“몰라? 이빨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고-”
“아, 물고기 종류인가?”
“아니. 물고기는 아냐.”
“…….”
소녀가 정확히 무슨 동물을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렌은 세상이 넓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주먹만 한 고기를 한 입 베어 물면서, 아렌은 노파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운명석으로, 과거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노파의 말에 따르면 운명석은 계약자의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운명은 시간과 같은 속도로 흐른다. 운명석으로 인한 계약 역시 현재에만 영향을 미칠 뿐, 과거나 미래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노파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 과거에 있잖아.’
그녀가 어떤 말을 해도 아렌이 곧 살아 숨 쉬는 반례였다.
‘노파의 말은 분명 참고할 만하지만, 맹신할 필요는 없겠어.’
“이봐, 사야라고 했나?”
국그릇에 코를 박고 들이키던 소녀, 사야가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낮은 코에는 누런 고기 기름이 묻어있었다.
“이곳에 불러준 건 고마운데, 왜 우릴 초대할 생각을 한 거지?”
“그냥.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건-”
그 운명석 때문에 얻은 예감인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마 그녀 자신도 잘 모를 것이다.
“그건?”
“-아무것도 아냐.”
아렌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게 있다면 미리 말해주겠어?”
“온천지대에 대해서는 들었어?”
“대강은.”
“절대, 그 부근에는 가지마. 귀신이나 괴물이 산다고 생각해.”
소녀는 당부했고, 이미 이야기를 들은 아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안다고.”
*****
아렌은 다시 유랑족의 안내를 받아 협곡의 입구로 되돌아왔다.
그곳에 남아있던 유랑족들은 병사들이 천막을 치는데 자진해서 도움을 줬는지, 혹한의 설원에서 도움이 되는 여러 요령들을 가르쳐준 듯했다.
천막의 앞에는 뭉친 눈을 쌓아 올린 벽이 서 있어서 정면의 바람을 막아줬고, 천막 부근에는 눈으로 파놓은 호까지 있었다. 주변의 냉기가 아래로 고여, 상대적으로 천막 내부가 더 따듯해지도록 하는 구조였다.
“오셨군요, 아렌 공. 유랑족들이 꽤나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저희 힘으로만 지었다면 이렇게 튼튼하지 않았을 거에요.”
“다행이군요. 북부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건 바람직하니까.”
다음 교대할 병사들이 도착하는 것은 앞으로 5일.
협곡의 길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당분간 일주일씩 병사들이 돌아가며 머물 예정이었다.
“그런데, 저 건물은 뭐죠?”
사람 키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좁고 높은 원통형의 건물이었다.
단단하게 뭉친 눈을 쌓아서 만든 엄지를 닮은 건축물은, 두 사람이 기어 올라가 내부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앞을 향해 뚫린 구멍은 전방을 모두 감시할 수 있을 만큼 길었으며, 온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않을 만큼 좁았다.
“아, 이것도 유랑족들이 도와준 겁니다. 저 위에서 감시하면 꽤 멀리까지 보이더군요.”
“저건, 길이 다 완료되고 제대로 된 자재가 들어와도 남겨두고 싶네요.”
산맥을 쉽게 넘을 수 있는 길이 생기면, 어차피 이곳에 관문은 필요했다.
유랑족이 힘을 모아 군사적 행동을 할 가능성은 낮았지만, 제국으로 향하는 요충지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들과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네.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우리와 얘기 나눈 자들은 한 부족일 뿐, 유랑부족은 그들 외에도 아주 많아요. 우리에게 적대적인 유랑족도 물론 있겠죠.”
“다음번 교대가 올 때는 들 수 있는 한 목책 재료라도 들여와야겠군요. 마차 한대 분량의 길이라도 먼저 뚫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그것도 전달해두죠.”
아렌은 방금까지 병사들과 걸었던 설원을 돌아봤다.
그곳은 무주지가 아닌 엄연히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들의 삶을 보고 맛본 후 느낌이 또 달랐다.
괴롭고 척박한 삶만 겨우 유지하고 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안주하며 잘 살아오고 있었다.
제국의 개척 마을이 어쩌면 그들을 교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지금ㅇ느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산맥 너머는 얼어붙은 산맥으로 보호되고 있었던 거야. 달걀 안쪽의 흰자와 노른자가 껍질로 보호되고 있던 것처럼.’
그리고, 그 껍질을 레온나토스 군이 부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렌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5일 후, 20명의 교대 병사가 올라왔다.
병사들은 협곡 끝에 마련된 시설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변변한 재료도 없이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번듯합니까?”
병사들일 놀랄 만했다.
눈으로 된 감시탑에 바람막이 벽, 벽뒤에 반쯤 파묻힌 채 보강된 천막은 거의 건물이나 다름없는 강도였다.
이곳에 목책만 둘러친다면, 한꺼번에 백 명쯤 몰려와도 쉽게 격퇴할 정도.
물론 제대로 된 도로가 선다면 그제야 마음껏 석재를 가져올 수 있을 테니, 제대로 된 관문을 세울 수 있는 건 그때부터일 것이다.
교대 인원을 두고 아렌은 다시 산맥 남쪽으로 내려왔다.
고작 일주일가량을 비워뒀을 뿐이지만, 산맥 남쪽의 공사는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 마차까지 지나게 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말 한 마리가 지날 수 있을 만큼의 길을 먼저 파내고 있었다.
앞으로 하루 이틀 뒤면 말을 이끌고 북부를 탐험할 수 있을 터였다.
“아렌, 왔나?”
광부장과 건축가들의 의견을 조율하던 레온나토스가 아렌을 반겼고, 아렌은 그곳에서 유랑족의 부락으로 갔던 일이나 식사를 대접받은 일, 그들의 족장 역할인 주술사를 만난 일을 말했다.
“-뭐라고?! 아렌 너 혼자만 즐긴 거냐? 어째서 날 부르지 않았지?!”
“왜냐면, 그때 산맥 남부에 계셨으니까요. 그리고 설령 같이 계셨어도 전하께서 가실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호위를 충분히 많이 데려가면, 나도 그들의 마을에 들를 수 있을까?”
“가능은 하겠죠. 그들이 겁먹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만요.”
아렌은 그곳의 주술사, 노파에게 들었던 말을 레온나토스에게 전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산맥 북부에 온천지대가 있다는 말을 들은 레온나토스의 눈이 빛났다.
“-온천지대? 그런 곳이 있다니, 천운 아닌가! 정착민들의 마을로 사용하기 그보다 좋을 수 없지!”
‘-이런.’
“전하. 미처 말씀을 못 드렸지만, 그곳에는 굉장히 호전적인 자들이 모여있다고 합니다. 그 수가 비록 소수지만, 군단조차도 괴멸시킬 가능성도 있습니다.”
듣기로 온천지대에 모여있는 자들의 수는 백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 역사에서 이미 그들은 건국왕의 군대를 괴멸시킨 전적이 있다.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이지만, 그곳에 모여있는 자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들은, 운명석과 계약한 자들입니다. 평소 가진 상식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알고 있네. 그들을 적대할 생각은 없어. 만약 그들과 공존할 수만 있다면, 유랑족이 제국에 편입되어 국경 확장에 더 도움 되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만나본 운명석 계약자들과는 모두 악연이었죠.”
“…….”
비록 레온나토스는 아렌만큼 운명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아티스 왕자, 비나그네를 실제로 마주했다.
운명석이 그 주인에게 부여하는 힘이 얼마나 상식 밖인지 잘 알고 있다.
“-이건 유랑족 노파에게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그들에게 기록이 따로 없어, 구전으로 전해진 것이기에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릅니다.”
아렌은 건국왕이 협곡 길을 닦은 뒤 밟을 수 없는 땅, 설원 원정을 나섰던 일을 말했다.
그가 만 단위의 병사로 온천지대를 점령하려 했고, 고작 100명도 안되는 인원에 패퇴했다는 사실마저도.
“물론 그때의 유랑족은 이미 과거의 사람들입니다. 지금 그곳을 점거한 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죠. 하지만 저흰 아직 운명석의 한계에 대해 모릅니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힘을 가졌는지, 그 한계가 어디인지조차 모르죠. 예측할 수 없는 상대가 가장 무서운 상대입니다.”
“…하지만 아렌, 그런 위험한 자들일수록 마을을 정착시키기 전에 만나야 해.”
개척민들만의 마을을 세울 때, 호전적인 자들이 뒤늦게 마을을 공격한다면 수없이 많은 생명이 스러질 것이다.
아직 정칙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그들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레온나토스의 말은 합당했다.
“…역시 전하, 다시 생각을 해보심이-”
“아니. 오히려 지금 맘을 굳혔다. 인부들이 말이 다닐만한 통로를 닦으면, 직접 그들을 만나고 오겠다.”
‘이건, 말릴 수 없겠군.’
일이 또 복잡해짐을 느꼈지만, 정작 아렌 역시 온천지대는 가보고 싶은 장소였다.
‘하긴. 북부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킨다면, 언제고 마주쳐야 하는 자들이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에 운명석이 흘러들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석이 아니라도 그 땅이 북부에서 사람 살기 그나마 좋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비록 유랑족 소녀는 절대 그들과 만나지 말라고 말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당부는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그리고, 아렌에겐 레온나토스가 온천 지대에 더 관심을 갑질만 한 요소를 알고 있었다.
“온천지대에서 녹은 빙하가 남으로 흘러서 만월강의 본류가 된다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