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건국왕이 북부로 향한 이유.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설원 북쪽 끝에 있는 운명의 산에 오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운명의 산이요?”
아렌의 물음에 노파가 답했다.
“그래. 운명의 산. 아무도 그곳까지 직접 가서 운명석을 캐낸 적 없어. 그곳에서 이따금 흘러나오는 조각을 가공해 소중하게 간직할 뿐이지.”
보통의 광물이라면 다른 곳에 존재할 확률을 염두에 두겠지만, 운명석은 다른 광물과 달리 특별하다.
흑옥은 운명석이 아니더라도 이미 보석이나 마찬가지이니, 여러 가지 형태로 가공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렌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잠시만요.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산이라면서요? 그곳의 운명석이 어떻게 남쪽으로 내려오죠? 강이 흐르는 것도 아닐 텐데요.”
“물론, 강은 흐르지 않지. 흐르는 건 얼음이야.”
“아, 강 위에 얼음이 떠 있다고요?”
“아니. 얼음이 그대로 흐른다고.”
“…?”
노파는 산맥을 통과하며 아주 천천히 흐르는 얼음 덩어리가 산맥을 조금씩 깎으며 검은 돌을 품는다고 했다.
운명석을 품은 채 남쪽으로 조금씩 흐른 빙하는 곧 화산지대를 만나 녹아 강이 되어 흐른다.
‘빙하? 얼음으로 된 강?’
아렌은 여전히 노파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캐묻지 않고 대강 넘어가기로 했다.
“수백년 전 너희의 추장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운명석에 깃든 힘도, 그 돌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지도. 하지만 머무는 사람들의 추장은 역사에 남을만한 기록적인 실패를 하고 난 후, 이곳을 떠나버렸지.”
애써 지어놓은 길도 파괴하고, 기록도 지워버린 채 자신의 북진을 산맥 남쪽 선페일 영지로만 한정지은 이유를, 아렌은 들어야 했다.
“기록적인 실패요?”
“너희의 추장은 두 가지 실수를 했지.”
가장 먼저, 건국왕은 운명의 산으로 직접 나아가려 한 모양이었다.
혹여나 방향을 틀리지 않도록 이정한 간격으로 말뚝을 박아가며, 평탄한 설원의 정북 방향으로 묵묵히 전진한 결과, 운명의 산을 직접 눈에 담을 수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천 명 규모의 선발대가 연락이 끊겼다. 선발대가 남긴 나무말뚝을 따라 수색조가 출발했고 다시 길을 잃었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 세 번째 구출대조차 행방불명되자 최종적으로 실종된 인원은 백 명의 백 배에 달했다.
건국왕은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건국왕은, 신기루같은 운명의 산을 쫓는 것을 관두고 빙하가 녹는 지점으로 향했다.
밟을 수 없는 땅의 동북부 지역은 지열 활동이 활발했고, 사람이 살기에 꽤 온후한 기후를 보였다.
“-그런 곳이 있었어요? 이 마을은 왜 거기 없죠? 거기가 비었다면, 저희 정착민들을 거기 보내면 되겠네요! 혹시 지금이라도-”
“아까 내가 하던 말을 못 들었나? 그곳에 향한 것이, 머무는 사람의 추장이 한 가장 큰 실책이었어.”
노파는 아렌의 말을 일축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검은 돌은 십중팔구 운명의 산에서 흘러들어온 운명석이야. 그리고, 마을과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부랑자들은 혼자서 추위를 견딜 수 없기에 산맥을 넘거나, 혹은 온천지대로 모이지.”
‘…과연.’
노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렌은 곧잘 이해했다.
모여드는 사람이 많고, 주변엔 운명석이 널려있다.
그곳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겠지.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폭도가 다루는 무법지대야.”
“…무법지대?”
진지한 이야기 중이었지만 아렌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왜 웃지? 우리라고 법이 없을 것 같나? 우리에게도 법은 있어. 자네들의 법과 다를 뿐이지.”
‘-과연.’
북부 설원의 온천지대는 온갖 운명석 계약자들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무리를 이루거나, 혼자서도 충분히 강한 자들.
설원 곳곳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다른 유랑족들은 그 주변을 피했고, 온천지대 주변에서 힘을 얻은 자들 역시 그 인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온천지대를 점거한 계약자들은 기껏해야 수십명.
그것을 점거하기 위해 건국왕은 만 단위의 병력을 쏟아부었고, 그들은 거의 괴멸당했다.
호기롭게 출진했으나 잃은 병사의 수가 3만은 족히 넘었으니, 산맥을 막고 길을 지우고 싶을 만했다.
노파가 하려던 말은, 결국 너희도 운명석에 눈독 들일 게 아니냐는 것.
아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흰 오직 북부의 개발에만 관심 있으니까요. 운명석 따위 생각 없습니다.”
“그 말도 지금뿐이겠지. 우리들과 접할 기회가 많으니 운명석에 대해 금방들 알게 될 테고, 산맥 너머의 족장은 욕심이 아주 많지. 열 개가 넘는 강과 백 개가 넘는 호수, 백 개보다도 열 배 더 많은 산봉우리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가진 것이 많을 수록 그 욕심도 더 커지겠지. 아닌가?”
“…….”
아렌은 노파의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만약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된다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른 황자들이라면? 그들이 운명석에 눈독 들이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위함한 자도 있지.’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이었다.
라이안은 그 스스로도 운명석 계약자이면서, 다른 운명석 계약자를 극도로 거부했다.
라이안이 산맥 북부에 있는 운명의 산과 유랑족들을 알면, 북부는 완전히 괴멸될 것이다.
노파가 말했다.
“물론, 어디에 정착하고 어디로 가는지를 결정하는 건 자유이니 내가 막을 권리는 없지만. 그 끝이 암울하기만 하군. 그것도 아니면, 네가 얻은 능력이 꽤 대단한 건가?”
“…하하.”
아렌은 애매하게 웃었다. 정작 자신도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고 있지 못했으니까.
처음엔 과거로 되돌아온 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미래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가 보였다.
그리고 요즘은, 자신이 점괘의 형식으로 말한 것들이 모두 이뤄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아렌은 눈앞의 노파를 쳐다봤다.
‘운명석에 대해 나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이야. 물어볼 기회일지도.’
자신이 실수하는 것이 아니길 빌며, 아렌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실은 산맥 남부에서도 운명석 계약자를 몇 만나보긴 했습니다.”
“그런가? 산맥 남쪽에도 당연히 계약자는 있겠지만, 직접 만나기는 쉽지는 않았을 텐데.”
“운이 좋았죠. 그런데, 그중 특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호오.”
“계약자인것은 맞는데, 자신은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삶을 살다가 죽었는데, 눈 떠보니 과거로 와 있다면서. 지금이 두 번째 삶이라고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돌려서 하고 있다고 눈치채기에 십상인 말.
하지만 설령 눈치채도 상관없다고 각오한 채 한 말이었다.
아렌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노파는 눈을 찡그렸다.
“자네가 속은 것 아닌가? 그건 불가능한데?”
*****
황권 경쟁 후보 중 가장 호전적인 황자, 제4 황자 가웨인이 서부로 향했다.
그가 받은 임무는 도국 연합 안에 친제국 성향을 세 곳 이상 만들 것.
‘…다른 황자들이 무슨 임무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난 틀렸어.’
가웨인은 시원하게 임무를 포기했다.
어떤 수단까지 사용해도 되는지는 명시되어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제국의 막강한 육군으로 도시국가를 초토화시킨 후, 괴뢰정부를 세우는 방법조차 가능은 했다.
하지만 도국의 주력은 해군이다. 잔존 병력이 바다로 진출한 후 해상을 봉쇄했을 때 도시를 점령한 제국군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점령군에게 남는 건, 해상이 봉쇄된 폐허뿐인 도시뿐.
제국의 식민지로서 유용하려면 평화적인 방법의 흡수합병이 제일이었다.
‘세 치 혀로 도국을 홀랑 삼킬 수 있었다면 진작 그리했겠지. 뼈아프지만, 이번 임무에서 득점은 포기해야겠어.’
가웨인이 먼저 들른 건 박제된 지식의 도시, 카르도나였다. 레온나토스의 가신인 아렌이 활약한 도시이기도 했다.
“카르도나의 우피치 가문의 차녀, 듀란 우피치입니다. 도국 카르도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가웨인 제4 황자전하.”
카르도나의 외성문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던 건, 우피치 가문의 차녀인 듀란 우피치였다.
“이곳에서 이루셔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모두에게 좋은 성과로 남았으면 합니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아는 건가? 카르도나가 헬데움에 비해 기민함은 부족하다더니, 그것도 틀린 말인가보군.”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가 바로 기민함이니까요.”
“으음.”
다른 모든 도국에 마찬가지지만, 가웨인은 카르도나에 역시 별 기대하지 않았다.
‘이미 헬데움과 마찬가지로, 카르도나는 아렌 녀석이 구워삶은 곳이야. 달리 기대할 건 없겠지.’
가웨인의 이성은 포기를 말했다.
하지만, 승부욕이 강한 가웨인의 본능은 이성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건 좋아하나?”
“좋은 거래일수록 간결하고, 사기일수록 장황한 법이죠.”
“좋은 말이군. 만약, 제국의 황태자 후보 중 누군가를 지지해야 한다면, 그게 나일 수는 없겠나?”
“…과연, 조금은 무모해보일 만큼 솔직하신 분이군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답니다.”
“어째서지? 카르도나는 대륙 제일의 상업 국가 아닌가? 상인이라면 의리보다도 이득에 되는 쪽에 붙을 텐데.”
“네. 그렇죠.”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건가?”
상인은 견적을 내는 데에 익숙하다. 만약 헬데움의 입장 역시 그와 같다면, 대륙 제일의 상인 둘이 모두 레온나토스의 승리에 배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시 무리인가?’
가웨인이 다시금 포기하려는 찰나.
“잠깐. 만약 황권 경쟁의 후보를 지금부터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가. 누가 되었든 황제가 된 다으음,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누가 되었든 그와 협력할 수도 있을 텐데.”
“물론, 저희가 지원한 자가 황태자가 되지 않는다 해도, 저희는 당연히 새로운 황제와 관계를 쌓을 것입니다.”
황제가 가웨인에게 준 임무는, 도국이 ‘자신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원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제국.
즉, 누가 황제가 되어도 도국의 지원 약속만 받아내면 된다.
‘…마치 다른 세 황자를 이길 자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건 심히 거북하지만. 하는 수 없지.’
“다행이군. 이 이야기는 차후에 마저 하는 것으로 하고, 내 병사들의 여독을 풀고 싶으니 이만 짐을 풀고 싶군.”
“물론입니다. 모든 병사를 수용할 수 있는 여관 여덟 곳을 수배해놓았습니다. 다시 한번 카르도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가웨인은 듀란의 안내에 따라 카르도나 시내를 거닐었다.
곳곳에서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으로 엉망이 되었던 부두와 선박이 빠른 속도로 복구되는 소리는, 타격이 있었음에도 아직 도국 연합의 패권국 지위를 놓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카르도나만이라도 날 지원해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텐데.’
“어떤가, 내게 물어볼 말은 없는가?”
여관까지 안내받으며 무심코 흘린 말에 듀란은 선뜻 물었다.
“그렇군요. 그럼, 아렌은 잘 있습니까?”
그녀의 말에, 가웨인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