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아렌은 유랑족 소녀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이곳이, 위험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무는 사람들이잖아? 이곳에선 제대로 겨울을 날 수조차 없을 거야.”
‘머무는 사람들’은 정주민족, 즉 아렌과 병사들을 말하는 듯했다.
“머물 땅이라면 남쪽에 더 많을 텐데, 왜 굳이 여기에 올라온 거야?”
“…자세한 건 말 못 하지만 이유가 있어. 우리는 여기 임시 거처를 만들 뿐이야. 잠시동안 이곳 출입을 막으려고-”
“막아? 여길? 왜?”
“지금 저 아래는 위험해. 거의 산만한 흙을 퍼내고 집채만 한 바위를 뽑아내고 있으니까.”
“땅을 훼손한다고? 왜?”
질문이 많은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와 문답이 오갈수록 그들을 둘러싼 유랑족 전사들의 경계가 누그러지고 있었으니, 아렌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왜냐하면, 계곡 아래에 길을 만들고 있으니까.”
“길?”
“…….”
소녀는 ‘길’이라는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렌은 당황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군. 도로라는 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니까.’
자연에도 길이 없지는 않다. 짐승이 한 곳으로만 다녀 자연히 다져진 땅이나, 지형이 평탄해 지나가기 좋은 곳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주변 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미래에 지나갈 길을 닦아놓는 건, 오직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설원 위에서만 살았다면 자연히 길에 대한 관념도 없겠지.’
눈보라가 한차례 불어올 때마다 지상의 모든 흔적을 지어버리는 설원은, 필연적으로 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아렌과 소녀의 대화가 이어지자, 유랑족 전사와 병사들 사이의 긴장감도 차츰 옅어졌다.
여전히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은 아니지만, 그건 상대의 돌발 돌발행동을 경계해서다.
한층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아렌이 물었다.
“전에 여기 들렀을 때는 아무도 볼 수 없었는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우연인가?”
“아니. 원래 이 주변은 잘 오는 곳이 아니야. 평원 외곽이기도 하고, 괜히 서 있는 눈기둥들이 기분 나쁘거든.”
소녀는 설원 위에서 북으로 늘어서 있는 눈기둥을 흘깃 보면서 말했다.
“며칠 전 이 부근을 들렀을 때, 그동안 본 적 없던 발자국이 남아있었어. 며칠간은 바람도 안 불고 날씨가 쾌척했거든? 그 이후 신경 쓰여서 이 주변을 계속 둘러본 거야.”
“…그렇군.”
설명을 들으면서도 아렌은 눈앞의 소녀와 유랑족들과의 만남을 궁리했다.
‘만약, 이 자들을 제국에 편입시킬 수 있다면, 한층 수월하게 국경을 넓힐 수 있을까?’
황제의 시험에 북방으로의 국경선 확장은 들어가 있지 않다.
하지만, 아렌은 북방으로의 도로 건설이 국경 확장 의지의 천명이라고 믿고 있었다.
괜찮은 계획 같았지만, 걱정되는 것은 한가지.
‘유랑족이, 국가에 대한 개념을 알까?’
유랑족이 제국과 다른 나라에서 경원시되는 건, 국가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화폐의 가치에 대해 알지 못하고 물건을 훔치거나, 세금의 의무를 웃어넘기거나.
아렌이 불현듯 떠올린 계획은 제국 사람을 산맥 너머로 이주시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어.’
그때, 유랑족 소녀가 말했다.
“지금부터 별일 없으면, 우리 마을에 올래?”
“마을에?”
“이방인이 산맥을 넘은 건 오랜만이니까. 그리고, 왠지 너와는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어.”
“…?”
어리둥절한 아렌은 뒤를 돌아봤다.
한발 뒤로 물러나 있던 병사들은 이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병사들이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대강 감이 오지만, 아렌은 지금이 그들의 생각만큼 그리 풋풋한 상황이 아니라 확신했다.
‘…저 여자도 눈치챈 건가?’
유랑족 소녀를 마주했을 때, 아렌은 어쩐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지금 선뜻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뭔가, 이상해.’
소녀는 이어 말했다.
“응? 어때? 마을에 오면, 주술사님도 만나게 해줄게.”
“주술사?”
소녀에게서 느껴진 기이한 끌림과 별개로, 아렌에게도 흥미가 돋는 제안이었다.
유랑족이 말하는 ‘마을’이 무엇인지도 궁금했고, 주술가와의 만남도 무언가 건질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아렌 혼자였다면 미련 없이 동행했겠지만.
“미안하지만, 그리 쉽게 말할 수 없어.”
아렌은 병사들의 입장도 생각해야 했다.
그들의 임무는 이곳에 초소를 만들고 감시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아렌을 지키는 것 또한 그들의 임무였다.
아렌이 유랑족을 따라가면 병사들 또한 아렌을 따라갈 테고, 그건 곧 여차할 때 그들의 목숨 또한 위태로롭게 하는 일이었다.
“-왜냐면, 우린 여기 천막을 설치해야 하거든. 일손이 부족해지면 그만큼 작업이 느려질 것 아냐?”
하지만, 아렌은 유랑족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돌려 말했다.
“내가 초대받으면 병사들 몇 명도 따라와야 할 테니, 그동안 부족한 일손을 그쪽에서 충당해주겠어?”
“…….”
천막 설치를 빌미로 한 말이지만, 내면의 뜻을 보자면 인질 교환이었다.
아렌과 호위들이 무사하지 못하면, 이곳에 병사들과 함께 남은 유랑족들 또한 무사하지는 못할 거라는, 일종의 안전장치.
소녀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하. 머무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겁이 많구나?”
“겁이 많은 것보다, 신중하다고 해주겠어?”
“…그래, 좋아. 제안대로 하지 뭐.”
소녀는 빙글 돌아 뒤의 유랑족 전사들에게 말했다.
“이곳에 세 분 정도만 남아주시겠어요? 저희가 돌아올 때까지만 머무는 사람들하고 같이 계셔주세요.”
소녀의 말에 전사들은 별다른 대꾸도 없이 순순히 따랐다.
소녀의 지위가 전사들보다 명백히 위인 것은 아니었지만, 최대한 존중하며 따라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곳에 남는 전사들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는지, 순순히 작살을 내려놓고 병사들에 향했다.
아렌은 병사 둘을 대동한 채 물었다.
“그럼, 너희들의 ‘마을’은 어디 있지?”
“저쪽으로 반나절 정도?”
“…금방이네.”
편도로 이틀이나 걸리는 길도 지나온 아렌이었다. 그 정도 거리면 그렇게 멀지도 않다.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벗어나 너무 멋대로 움직이지는 마.”
“뭐야, 벌써 포로 취급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소녀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희 머무는 사람들은, 이따금 눈이 멀기도 하니까.”
“…….”
소녀의 말에 아렌과 병사들은 바짝 긴장해야 했다.
*****
“따라오느라 수고했어. 이제 다 왔어.”
“…어디?”
아렌이 두리번거렸다.
유랑족 전사의 등 뒤에 거의 바짝 붙어서 뒤따라간 아렌은, 그 덕에 거의 바깥 풍경을 보지 못했다.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게 하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런 조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이곳 설원은 사방이 모두 비슷한 풍경이었으니까.
전사들이 아렌과 병사들의 주위를 가린 건, 태양 빛을 반사하는 설원의 반사광을 막기 위해서였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눈을 다치는 것처럼, 밝게 빛나는 설원의 빛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산맥 남쪽 정주민 출신들의 눈은 머지않아 멀어버린다.
그동안 전사들에 시야를 보호받은 아렌이 실로 오랜만에 설원을 둘러봤지만, 마을처럼 보이는 건물은 없었다.
“정말 멀지 않아. 지금 바로 보이지는 않겠지만.”
“…?”
아렌은 소녀의 말을 곧 이해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던 설원 아래에 좁고 깊은 참호가 보였다.
수십 갈래로 뻗어나간 참호는, 그 사이사이로 천과 가죽으로 지붕을 덧댄 거주 공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눈을 파서, 그 아래에서 생활해?”
“다시 떠날 때까지는. 왜, 유랑민이라고 얼음을 베고 눈을 덮으면서 지낼 줄 알았어?”
“그건 아니지만.”
풀썩, 아렌은 눈참호 아래로 뛰어내렸다.
참호 안쪽의 공기는 바깥보다 조금 더 찼지만, 바람을 막아줬기에 체감온도는 훨씬 따듯했다.
‘…과연. 우리도 천막 대신 써볼까?’
아렌은 진지하게 고려했고, 소녀는 그사이 아렌 일행을 눈 참호의 가장 중심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이봐. 인사해. 주술사 할머니야.”
소녀는 별다른 소개도 없이 곧바로 주술사를 만나게 했다.
방 한복판에 앉아있던 노파는, 마찬가지로 흰 가죽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의 낡은 정도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심했다. 그래도 헤진 곳에 가죽을 덧대 추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무의 나이테처럼 유랑족 또한 오래 살았을 수록 옷에 자연스레 표시가 남는 것 같았다.
“이방인이군. 사야, 왜 이들을 데려온 거냐.”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
소녀의 말에 노파는 굵은 눈썹을 씰룩였고, 곧 반쯤 감은 눈으로 아렌을 응시했다.
“그렇군. 그래, 호오…”
혼자 납득한 노파는, 곧 손을 휘휘 저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물러나렴, 사야. 그리고 다른 이방인들도.”
“응.”
사야라 불린 소녀는 군말 없이 나가려고 했지만, 아렌의 호위차 따라온 병사들까지 동조할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망설이자 노파는 이어 말했다.
“여기 이 자도 단둘이 있기를 원할 텐데.”
“…….”
아렌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발언.
하지만, 그녀의 말 대로였다.
“미안해요. 잠시면 되니까 그렇게 해주세요.”
“…아렌 공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비로소 물러난 병사들.
이제 눈에 반쯤 파묻힌 방 안에는 노파와 아렌, 둘 뿐이었다.
“그래서, 뭣 때문에 단둘이 된 거죠?”
“이런, 이렇게 되고도 아직 내숭인가?”
백발이 성성한 노파의 눈빛은, 마치 광인의 그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노파의 말에 아렌은 잠시 당황했지만.
‘…아, 그렇군.’
곧, 노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당신도 계약자로군요.”
“그런단다, 말귀가 느리지만, 머무는 사람치고는 준수한 편이군.”
소녀를 만났을 때의 기이한 감각은, 지금 노파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잊고 있었지만 아렌은 지금에야 떠올렸다.
‘아르테를 만났을 때도 비슷했지.’
그 감각은, 운명석 계약자를 마주했을 때 느껴졌던 그 감각이었다.
*****
주술사라 불린 노파도 운명석 계약자라는 것을 알게 된 아렌은 더는 질문을 사양하지 않았다.
“사야라는 여자도 운명석 계약자인가요?”
“아마도 그럴 거야. 본인은 아직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분위기로 보아 유랑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고, 각 부족은 주술사라 불리는 사람이 족장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족장이 되는 조건은, 운명석 계약자고?’
아렌은 주술사라 불린 노파가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궁금했지만, 그건 상대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묻지 않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들이, 아렌을 이곳으로 불러온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럼, 젊은 머무는 양반. 어찌 이 먼 북쪽까지 오신 건가. 산맥을 넘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을 텐데.”
“그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산맥 아래를 지나는 좁은 협곡이 있었으니까요.”
“…거기를 발견한 건가?”
“네. 그곳에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놓을 겁니다. 그리고, 산맥 근처 땅에 개척 마을을 놓을 예정입니다만.”
아렌은 숨김없이 말했다. 개척 마을이 들어선 후 유랑민들의 반발을 사는 것보다, 먼저 이야기한 후 그들의 협력을 얻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노파는 눈을 찌푸렸다.
“저런, 머무는 사람은 옛일을 잘 기억하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는데. 과거에 있었던 일을 깡그리 잊은 건가?”
“…아쉽게도, 그런 모양이네요.”
사라진 기록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기록인지는 모른다.
아렌은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