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은 교국의 국경을 넘었다.
제국과 교국 간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진 않았지만, 여전히 예전만은 못했다.
최근 제국이 은을 자급하기 시작하면서 더이상 일방적인 무역 흑자를 올리지 못해 앙금이 아직 남아있는 탓이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말 위에서 라이안의 보좌관이 참았던 불만을 쏟아내었다.
“받은 임무가 겨우 ‘교국과의 관계 개선 도모’라니. 폐하께서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왜 그러나. 아마도 네 황자 중 가장 간단한 임무일 텐데.”
라이안이 대답했지만, 보좌관도 그 대답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간단한 임무일수록, 공을 세우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임무는 네 황자가 공정하게 정한 걸세.”
“그렇죠. 나이의 역순대로요! 약간의 귀띔만으로도 전하께 남부를 남겨두는 건 간단한 일입니다!”
“폐하께선 그런 분이 아니시네.”
라이안이 보좌관의 의혹을 일축했다.
단순히 황제를 두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황제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굳이 다른 황자들에게 몰래 전하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능히 남부를 내게 유도하실 수 있으니. 애초에 그렇게 짜인 판이었겠지.”
엔지를 북부로 보낸 레온나토스가 북부를 고르는 것은 예측 가능하고, 레온나토스를 강하게 의식하는 테오드릭이 레온이 들렀던 동부를 고르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가웨인은 라이안에게 연고가 있는 서부를 넘겨줄 수 없을 테니, 자연히 라이안에게 남는 건 남부다.
“그렇습니다! 공정한 척했지만, 실은 다른 세 황자에게 좋은 임무를 몰아주기 위한 무대였을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강하게 항의해야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라이안은 말머리를 돌릴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게 계획된 판이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무엇을 논하든 무의미한 억측만 남길 뿐이야.”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보좌관은 더이상 라이안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이 아는바, 라이안은 결코 느긋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데는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터.
어디까지나 자신은 의견을 내는 입장. 결정하는 건 라이안이다.
보좌관은 자신의 역할을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정말 작은 나라군. 국경을 통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해안선이 보이는군.”
“아트마 교국은 해안선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으니까요.”
“그렇군. 저게 비탄의 해안인가.”
라이안과 그의 부대는 거센 파도가 치는 남부 바닷가, 비탄의 해안에 도착했다.
비탄의 해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해안선은 온갖 기암괴석으로 어지러울 정도였다.
산처럼 높이 솟아오른 바위부터 누운 칼처럼 날카로운 암초까지.
보기엔 아름답지만, 정상적인 항해는 불가능한 거친 바다였다.
그리고, 바다 한복판에 송곳처럼 솟아오른 수십 개의 바위산들 위에, 왕관처럼 얹힌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제국의 황궁을 연상케 할 만큼 장엄한 건물이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수십 가닥의 뾰족한 암초는 너무도 연약해 보였다.
한시도 쉴 새 없이 내리치는 파도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 도리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문헌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라이안과 보좌관은 그 광경에 감탄했다.
“…대단하군요. 어떻게 지었는지보다,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지가 더 경이롭습니다.”
“저것이 아트마 교의 총본산, 비원궁인가? 과연 이름값은 하는군.”
심드렁한 말투였지만, 비원궁을 보는 라이안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하군. 말 그대로 사람이 지은 것 같지 않은 모습이야.’
임무를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가장 유력한 황자인 만큼 다른 황자에 더 유리해도 감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원궁의 실제 모습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 사람이 짓지 않은 건가’
별 볼 일 없는 회담이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재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라이안의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가 비원궁을 응시했다.
*****
북부의 얼어붙은 산맥을 통과하는 도로의 공사가 드디어 시작됐다.
길의 토대는 이미 만들어져 있고, 그곳에 오랜 세월 쌓인 흙과 바위를 치우는 작업뿐이었지만, 문제는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에 있었다.
사실상, 흙산을 하나 퍼내는 정도의 작업량이었다.
취업하기 위해 선페일 영지로 몰려든, 취업하지 못한 광부들이 대거 고용되어 터커의 지휘하에 토사를 옮겼다.
협곡에서 퍼낸 흙과 바위는 협곡 입구 옆에 차곡차곡 쌓여, 성벽과 관문을 만들 재료로 쓰일 예정이었다.
산맥 북부는 유랑족의 땅, 혹여나 유랑족 도적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대비는 필요했다.
“…하지만, 어마어마하구만.”
공사를 지휘하던 터커는 혀를 내둘렀다.
“기록에 남을 만큼 큰 지진이 있던 것도 아닐 텐데, 고의로 한 것이 아닌 한 이만큼의 바위가 무너질 수 있나?”
“그럼, 광부장의 말은 누군가 일부러 길을 막았다는 말인가?”
“그건,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터커는 레온나토스를 데리고 한창 공사 중인 협곡의 벽면으로 향했다.
수직이나 다름없는 가파른 경사의 협곡 벽면을 유심히 살피던 터커는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그럼 그렇지. 저기. 그리고 저기를 봐봐.”
“…어딜 보라 말해도, 내 눈에는 모두 같은 바위벽인데.”
“정말? 못 알아보겠다고? 벽면에 나무 말뚝을 박아넣고, 물을 부은 흔적이잖아!”
공사 경험은 없지만, 레온나토스도 방대한 양의 서적을 읽었기에 갖은 지식을 알고 있었다.
바위에 나무 말뚝을 박아넣고 물을 흘리면, 수분을 머금은 말뚝이 밤새 팽창해 돌을 깨트린다.
“일부러 바위를 무너뜨려 길을 막았다고? 이 길을 봉인이라도 하려던 건가?”
“음, 글쎄… 그랬다면 더 확실하게 길을 막았겠지. 성벽이라도 쌓고, 경비병을 두든가 해서. 하지만 이렇게 방치해두기만 하니 그냥 다니기 불편한 협곡처럼 보이잖아? 실제로도 황자 나리는 산맥 건너편에 갈 수 있었고 말야.”
“…하긴.”
산맥 너머, 설원을 돌아다니는 유랑족의 일부는 지금도 산맥을 넘어 남으로 내려온다. 마차나 대규모 인원이 건너는 길이 없을 뿐, 소수가 어렵사리 건너는 루트는 여러 곳에 존재한다.
“그럼, 직접적으로 왕래를 막기보다, 이곳에 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하고 싶었던 건가?”
레온나토스의 의문엔 필연적으로 ‘왜’가 뒤따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렌은 왠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아마, 운명석과 같은 이유겠지.’
과거 제국의 누군가에게 운명석과 산맥 북부는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운명석에 대한 기록이 제국 전역에서 말살된 것처럼, 건국왕의 최대 업적인 도로조차 기록에서 사라졌다.
“레온나토스 전하.”
“아, 아렌인가? 이제 출발하려고?”
“네.”
“별일은 없겠지만, 부디 무리하진 말게.”
아렌은 스무 명가량의 병사들과 함께 산맥 북부로 갈 채비를 마쳤다.
비록 전에 들렀을 때는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산맥 저편은 오랜 세월 유랑족의 영역이다.
혹시나 그들이 이쪽 길로 들어서나 공사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인원을 잠시 통제하는 것이 서로에게도 좋았다.
아렌과 스무 명의 병사들은 협곡의 좁은 길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여전히 곳곳에 언덕과 장애물이 있는, 험지에 더 가까운 길이었다.
병사 하나가 아직 어린 아렌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비서관 각하. 괜찮으십니까?”
“저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 정도는 단련되어 있고, 한번 지나왔던 길이니까. 저야말로 죄송하네요. 책임자가 필요하다지만, 발커스나 더글라스가 더 좋았을 텐데.”
“무슨 말씀입니까.”
아렌의 말에 병사는 손사래를 쳤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비서관 각하가 같이 가주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는데요.”
병사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름난 점술가가 자신들과 함께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병사들은 안전을 보장받은 것처럼 든든하기만 했다.
아렌은 병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 점술가, 정작 반쪽짜리가 되었지만.’
좁은 협곡 안에서 꼬박 이틀이 걸리는 여정 후, 아렌은 다시금 끝없이 펼쳐진 설원에 도착했다.
이곳이 처음인 병사들의 얼굴은 더욱 상기되었다.
“이곳이, 얼어붙은 산맥의 건너편, 밟지 못하는 땅.”
“네. 그런데 지금 밟고 있네요.”
“오오! 저 길을 완성하는 건, 레온나토스 전하의 이름이 대대로 남는 업적이 될 겁니다!”
‘…그렇게 잘 된다면 좋겠지만.’
새로 생긴 정착촌이 5년 후에도 건재할 확률은 4할가량.
일년내내 눈이 쌓인 극한의 지형에 만들어진 정착 마을이 잘 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태양교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이곳에서의 계획을 모두 다 결실 볼 필요는 없다.
협곡의 길을 계속 유지할 수단과 그 다방면의 계획이 준비만 되어있다면 황궁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다
그게 타당하고 빈틈없을수록 황제는 흡족해하겠지.
병사들은 가져온 나무기둥과 천을 이용해 간이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교대할 병사들도 사용해야 하니, 사실상 건물이나 마찬가지로 튼튼하게 짓는 병사들.
그동안 아렌은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며 설원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때였다.
-꾸물.
“…어라?”
아렌은 눈을 비비고 떴다.
아무것도 없던 설원의 한 부분이, 방금 움직인 기분이 들었다.
‘…착각인가?’
햇빛을 반사한 설원은 여전히 눈부셨다.
무언가를 잘못 봤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꾸물꾸물.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잖아!”
설원의 한 구석이 꾸물대면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사람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렌과 또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새 하얀 머리는 양 갈래로 땋았고, 옷은 머리와 마찬가지로 흰색 모피가 남은 가죽옷을 입었다.
가죽옷은 눈처럼 하얗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눈이 묻어있어 멀리서 보면 정말 흰 눈 같았다.
“-누구냐!”
“유랑족인가?!”
천막을 치던 병사들이 뒤늦게 깨닫고 달려왔다.
병사들에게 적의는 없었지만, 상관인 아렌을 보호해야 하는 만큼 커진 목소리에 소녀는 위축됐다.
소녀는 물러났고, 동시에 주변의 눈밭이 벌떡 일어섰다.
그건, 소녀와 비슷한 차림을 한 열다섯 명의 유랑족 전사들이었다.
“포위됐다!”
“대열을 다듬어!”
사방으로 창을 겨눈 병사들과 언제든 작살을 던질 준비를 한 유랑족들.
일촉즉발의 상황을 막아선 건 아렌이었다.
아렌은 소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 하냐고?”
“각하, 위험합니다!”
병사들이 다급히 외쳤지만, 아렌은 개의치 않았다.
유랑족은 작살을 던지지 않으리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에게 적의는 없어. 그저 겁을 먹었을 뿐.’
“저건, 천막을 치는 거야.”
“…천막? 여기서 살려고?”
겁을 먹었던 소녀는 유랑족 전사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거, 안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