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태양교의 젊은 신도들이, 개척 마을을 마음에 들어해?”
교단의 신전에 들어온 후, 잠시 휴식을 취하던 레온나토스는 곧 아렌의 보고를 받아들고 눈을 크게 떴다.
“네. 교단의 젊은 개혁파로서, 자신들의 이념을 마음껏 펼칠 새 땅을 기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통파는 그들 개혁파는 눈엣가시 같았을 테니, 이주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죠.”
잘만 된다면 별다른 충돌 없이 자신들의 마음에 안드는 인원을 눈에 안 보이는 먼 곳에 치워둘 수 있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건-”
“네. 일종의 분파나 다름없고, 원래 본산인 이곳에선 개혁파를 이단으로 제시해 지원을 끊을 가능성도 크죠. 하지만 한동안 저희의 눈이 북부를 감시할 테니 태양교로서도 무모한 짓은 함부로 못 할 겁니다.”
아렌은 태양교 개혁파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교단의 상층부는 완전히 물갈이되지 않았고, 단지 고드프리가 사라져 조금 온건해졌을 뿐이니까.
태양교의 주인으로서 대주교가 있는 형태가 아니라, 오직 경전만을 믿고 따르려는 개혁파의 성미에는 한참 못 미칠 수밖에.
“…그들이 산맥 너머로 이주해준다니 감사하지만, 그들은 아직 그 불모지를 보지 못했어. 역시, 감언이설로 그들을 속인 것 같아 맘이 편치 않군.”
“전하. 저흰 딱히 그들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저흰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고, 선택 또한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이 한 것이니까요.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본인이 지는 것이 바람직하죠.”
“하지만-”
“만약 전하께서 여전히 죄책감을 지울 수 없다면, 황제가 되신 후 개척민들에 최대한의 지원을 제공하면 될 일입니다.”
“…….”
“그렇게 생각하면, 전하께서 황제가 되셔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는 셈이군요.”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되고자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만월강 동부 엣 아티스 땅의 폐허였다.
과거 제국이 치수시설을 완전히 망가뜨려 수몰시킨 땅.
아렌은 문득 그곳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곳엔 테오드릭이 갔었지. 지금쯤, 잘하고 있겠지?’
*****
동부, 제국령과 옛 아티스 영토를 나누는 별다른 국경은 없었다.
동부를 북에서 남으로 고고히 흐르는 만월강이 곧 경계였고, 제국은 다스리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만월강 서부만을 자신들의 땅으로 삼았다.
강을 건너간 테오드릭은 얼마 가지도 못한 채 끝없이 늘어선 늪지를 황망하게 바라봤다.
평탄한 저지대인 아티스 동부는, 시야에 닿는 모든 곳이 질퍽질퍽한 늪이었다.
“…이런 곳에서, 레온나토스 녀석은 대체 어떻게 다닌 거지?”
테오드릭의 중얼거림. 대답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분은 대군을 지금처럼 대군을 이끌고 오지 않으셨어요. 기껏해야 50명 안쪽의 기사단이 전부였죠.”
원래 아티스 동부 출신인 레온나토스의 가신, 핀이 대답했다.
레온과 아렌이 동부의 안내 역으로 테오드릭에게 붙였지만, 그 자신도 이미 테오드릭이 레온나토스의 편이라는 건 모르고 있었다.
핀에게 테오드릭은 레온나토스의 황권 경쟁자일 뿐.
다만 성심성의껏 도우라는 말을 들었으니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유가 궁금하지만, 아렌 나리 말을 들었을 때 손해는 없었으니.’
만월강을 넘은 후부터 자신의 안내자를 자처한 핀에게 테오드릭이 물었다.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고?”
“네. 요즘도 서신을 주고받으니, 아마 머지않은 곳에 있을 겁니다. 어차피 아트레움으로 가시죠? 도와줄 사람을 구해오겠습니다.”
“…사람을? 어디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핀은 병사들을 그나마 걷기 쉬운 옛 제방 둑 위로 안내한 후, 거의 뛰다시피 늪지대를 통과해 사라졌다.
한번 발을 디디면 무릎까지 빠져드는 늪지대에서, 핀은 마치 단단한 돌바닥을 뛰는 것처럼 움직였다.
“…세상에.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테오드릭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말한 대로 아티스의 옛 수도, 아트레움으로 향했다. 어차피 당분간은 만월강 서쪽의 상황을 살펴야 했기에 다른 대안도 없었다.
한동안 안개가 자욱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계속됐다. 예전에는 수도 근처의 안개가 사람을 홀렸다고도 하니 평범한 안개조차도 또 다르게 보였다.
“…전하.”
얼마를 걸었을까, 테오드릭의 부관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보인다.”
제방 둑 위, 양손에 무기를 든 수십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마치 도적 떼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 주변에서는 도적질도 해먹을 짓이 못 된다. 만월강 서부에는 지나가는 상인도, 거둬들인 수확물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직 유민들이 생존만을 위해 근근히 살아가는 곳. 힘으로 겁박해 강탈할 재산조차 없다.
모여있는 사람들 가운데, 도와줄 사람을 찾으러 간 핀의 모습이 보였다.
핀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테오드릭과 병사들은 그제야 긴장을 약간 풀었다.
“…저들인가?”
“네. 제가 몸담고 있던 아티스 해방전선입니다. 이름은 조금 그래도, 제국이 만월강 서부를 다시 복구해준다면 기꺼이 협력할 사람들이죠.”
“그것도 다 레온나토스와 협의한 내용인가?”
“그건, 그분께 직접 들으시길.”
“…….”
스스로를 아티스 해방전선이라 소개한 사람들은 죄다 언제 지어졌는지도 모를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들이 바로 날 때부터 만월강 서쪽에 있었던 원주민들이다.
테오드릭은 그들에게 ‘만월강 동부를 재건하는 방법’을 듣고 싶었지만, 그들조차 그 자세한 방법은 몰랐다.
“어떻게 하면 다시 땅을 마르게 하나고? 그런 기똥찬 방법을 알면 우리가 직접 했겠지. 안 그래?!”
누가 봐도 산적 용모인 아티스 해방전선의 두목, 거구의 파투스가 비아냥댔다. 만월강 동부를 황폐화시킨 것이 제국인 만큼, 파투스는 아직 제국에 반감이 남아있는 듯했다.
테오드릭도 그 사실을 알기에 파투스의 무례를 당장 문제삼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으면, 언제 어느 길로 가면 가장 좋은지 정도는 얼마든지 답해줄 수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해도, 우린 여기 처음 들렀단 말이다.”
“뭐야, 황궁에서 직접 고치라고 보내준 것 아닌가? 아무 준비도 안해왔어?! 일 처리를 그런 식으로 하나, 아앙?!”
“…….”
테오드릭은 화를 꾹 눌러 참았다.
“…단서라면, 하나 있다. 강에 답이 있다고. 하지만 고작 열여섯 살짜리 점쟁이가 낸 점괘인데. 역시 네놈들 성에는 안 차겠지?”
별 기대없이 테오드릭이 툭 내뱉은 말.
하지만 아티스 해방전선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린 점쟁이? 그거 아렌 말인가?”
“강에 해답이 있다고? 진작 말하지!”
“만월강의 여러 지류가 많으니까, 거기부터 차례대로 훑어보자고!”
테오드릭 앞에서는 대놓고 엇나가던 자들이, 아렌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묘하게 협조적으로 나왔다.
손바닥 뒤집듯 뒤바뀐 태도에 테오드릭은 귀신에 홀린 표정이었다.
“…당신들, 아렌에 대해 아나?”
“물론이지. 그 신통방통한 점쟁이 아냐? 어린 황자랑 같이 찾아왔잖아.”
“그 자식- 아니, 나름대로 높으신 분이었나? 그 양반 담력이 보통이 아니던데? 어린 황자가 나중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더만.”
“…….”
레온나토스가 임무 차 들렀던 짧은 시간에조차, 해방 전선의 사람들은 아렌과 레온나토스의 관계를 알아차렸다.
황궁의 법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니만큼 더욱 선입견 없는 눈으로 둘을 봤기에 가능한 평가였다.
물론, 레온나토스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자신과 협약한 아렌을 알고 있는 테오드릭으로선 쉬이 납득이 가는 평가였다.
파투스가 물었다.
“그런데, 레온나토스 나리가 안오고 당신이 왔네? 레온나토스 나리들은 북부로 갔다면서? 그곳의 임무도 만월강 동부 간척만큼이나 심각한 일인가?”
황자들이 받은 임무는 다른 황자들조차도 모르는 비밀이다. 테오드릭은 얼버무렸다.
“그렇지 뭐.”
“것 참, 힘들겠구만. 그러고 보니, 만월강의 상류도 얼어붙은 산맥 너머에서 시작되지, 아마?”
“…그렇군, 그러고 보니.”
파투스가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
하지만, 테오드릭에게는 큰 의미가 담긴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 또한 폐하의 뜻인가?’
황권에 가장 가까운 네 황자에게 동시에 주어진 임무.
어쩌면 그것들에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테오드릭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
아렌은 곧바로 대본전에 가 태양교 대주교를 만나 담판을 지었다.
태양교 내부에서 산맥 북부로 향할 개척단 지원자를 받는다면 흔쾌히 보내줄 것인가를 물었고, 대주교는 별문제 없이 승낙했다.
태양교 개혁파가 향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넌지시 흘리자 오히려 반색하는 것도 같았다.
‘…좋아. 이걸로 우선 한 단추는 끼운 건가?’
태양교의 개척단과 광부들이 산맥 북부에 터를 잡는다면, 이들을 위한 마차가 정기적으로 이동할 것이다.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가득 싣고 북으로 간 마차는, 다시 그곳에서 파낸 광물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길은 계속 유지될 것이며 산맥 북부에서의 정착 마을도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렌은 문득 대주교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곳’에 잠시 내려가 봐도 되나요?”
“…‘그곳’이라 함은-”
“그 사람, 아직 살아있습니까?”
“…….”
아렌이 말한 ‘그곳’은 태양흔, ‘그 사람’은 그곳의 바닥에서 굳어버린 제5 황자, 고드프리를 말했다.
대주교로서도 거북한 화제.
그는 단둘이 있는 대본전에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실은, 아렌 공께서 수도로 내려간 이후에도 얼마간 계속 식량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촛불이 꺼지듯 목숨도 쉽게 꺼지더군요.”
“그렇군요. 제 눈으로 봐도 될까요?”
“그 모습을, 굳이 말입니까?”
“네.”
“…….”
대주교는 무언으로 끄덕였다.
아렌은 대본전에서 태양흔으로 곧바로 연결된 길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신전 최하층, 지금껏 실수로든 고의로든 수없이 떨어져 내린 사람들이 산 채로 굳어있던 구멍.
태양흔의 밑바닥이었다.
등불을 높이 들어 올리자 아렌은 익숙한 모습의 시신을 발견했다.
온몸이 비쩍 말라, 미라 상태나 다름없는 고드프리 황자의 신체였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을 경배하듯, 엎드린 채 굳어 있었다.
“…결국, 그대로 빠져나오지 못한 건가? 다른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태양흔은 운명석의 능력치고도 여러모로 특이했다.
운명석의 능력은 해당 계약자가 죽으면 자연히 풀린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아트레움의 아티스 왕자가 그랬고, 황자 라이안이 죽인 비나그네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 태양흔은, 원래 계약자가 오래전 죽고 없는데도 여전히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짐작 하는 이유는 하나.
‘…이 능력의 소원을 빈 사람에게, 자신의 생과 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운명석은 아무 능력이나 주지 않는다. 운명석과 계약할 때, 그 사람이 무의식중에 가진 소원과 관련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계약자, 혹은 운명석으로 부여된 능력이 힘을 잃을 때는 그 소원이 이뤄지거나, 혹은 절대 이뤄지지 않게 되었거나. 그 두 가지 경우뿐.
“만약, 다른 곳에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현상이 있다면, 그것도 운명석의 힘이라 보는 게 옳을까?”
“…….”
어둠 속에서 아렌은 중얼거렸고, 엎드린 고드프리는 답이 없었다.
아렌은 어깨를 으쓱한 채, 고드프리의 시체를 내버려 두고 다시 좁고 가파른 복도와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