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태양교 대주교는 느닷없이 사원을 찾은 레온나토스를 다소 호들갑스럽게 맞이했다.
“오오, 이런 누추한 곳에 황자 전하께서 직접 찾아오시다니… 제국의 충실한 종이 황자전하를 뵙습니다.”
대주교는 과거 이곳에 유배되다시피 내려온 고드프리에게조차 절절매었다.
지금 방문한 건, 그 고드프리를 유배보낸 장본인이자, 현 제국의 유력한 황태자 후보인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였다.
비록 지금은 고드프리에 의해 헛된 꿈을 꿨던 과거에서 벗어났지만, 고드프리보다 몇 단계는 위인 권력자를 눈앞에 두자 저절로 몸과 마음이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나서 반갑군, 대주교. 조금은 지나친 환대같지만, 지금의 호의는 잊지 않도록 하지.”
레온나토스는 나이가 지긋한 대주교에게도 당당히 하대했다.
평소의 레온나토스라면 그에게 당연히 존대로 말했겠지만, 레온나토스에게 하대를 주문한 건 아렌이었다.
[태양교의 대주교는 과거 있었던 일 때문에라도 우리에게 고자세로 나오지 못할 겁니다. 그 입장 차이를 이용하는 게 옳겠죠.]
고드프리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역모나 다름없는 행각을 황궁에서 벌였고, 고드프리의 폭주를 방관했다.
레온나토스는 그 일들을 불문에 부치는 대신 그들의 은광을 제국에 바치도록 했다.
레온나토스에게 지급된 제3 은광은 그 거래에 대한 황제 나름의 포상이기도 했다.
아렌이 그들의 약점을 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저들의 저자세는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만한 신전을 가졌다니. 부끄럽지만 태양교의 총본산이 이런 곳이었는지는 와보고서야 알았네.”
“무리도 아니시지요. 이곳은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생활보다 생존이 더 우선인 곳이니까요.”
대주교는 자신들의 빈궁한 처지를 슬쩍 흘려봤다. 알토란같았던 3곳의 은광을 모두 제국에 바쳐야 했던 데서 오는 은근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레온나토스는 알면서 그 불만에 침묵했다.
아렌에게도 지금 상황은 곧바로 이해됐다.
‘한 곳에서 세 곳의 은광이 연달아 발견되었다면 그 근처에 큰 은맥이 있다는 뜻이겠지.’
이 지역에 계속 뿌리내리고 있는 한, 다른 광맥을 찾아 개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다시 황실이 개입해 또 어떤 구실로 강탈해갈지 모르는 일.
태양교가 또 다른 은광의 개척을 망설이는 이유다.
“…본의 아니게 교단의 재정 상황을 빈궁하게 만든 것 같군. 하지만 따지자면 귀 교단이 황궁에서 저지른 폭거가 원인인데.”
“물론입니다, 전하. 단지 사실만을 담담히 고했을 뿐, 어떠한 의도도 없었습니다.”
대주교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죄를 덮어주고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포교를 용인했지만, 그들이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제국에 의해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레온나토스가 말했다.
“…그것과 관련해, 아렌이 하고픈 말이 있다더군.”
레온나토스의 눈짓에 뒤로 물러나 있던 아렌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황자를 응대하면서도 뒤에 물러나있는 레온나토스를 강하게 의식하던 대주교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아렌이 말했다.
“태양교에게, 다시 한번 도약의 발판이 마련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대주교는 아렌에게도 공손했다.
황궁 유력자인 레온나토스 황자의 최측근이기에 그리 어색한 장면은 아니지만, 눈앞의 황자 본인이 있는데도 그 가신에게 똑같은 태도를 보이는 건 역시 조금 어색한 일이다.
대주교는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태양흔에서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아렌을, 일종의 성자쯤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렌 역시 그 오해를 알면서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착각쯤이야 멋대로 하라지.’
아렌의 눈치를 보면서도, 대주교는 아렌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도약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빙빙 돌리지 않고 말씀드리죠. 레온나토스 전하와 제가 북부에 온 이유는, 지금껏 등한시되었던 북부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그것이 본 교단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건국왕이 깔아놓은 관도 이후, 제국의 초점은 언제나 동부나 서부, 남부로만 향해 있었다.
이제야 제국이 북부를 신경 쓰는 이유는 오직 선페일 지역에서 발견된 은광 때문이다.
은광의 원래 소유주였던 태양교로서는 심사가 뒤틀리는 사안이다.
아렌이 이어 말했다.
“황명을 받든 레온나토스 전하의 주관으로, 곧 얼어붙은 산맥을 지나는 길이 만들어질 겁니다. 걸어서 오를 수 있는 산길이 아니라, 마차로 지날 수 있는 제대로 된 도로입니다.”
“…말씀대로라면 엄청난 대공사가 되겠군요. 그런데, 그것을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선페일 지역의 은광은 속속 더 발견될 겁니다.”
“…!”
“단기간에 비슷한 지역에서 세 곳이나 은광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땅에 원래부터 광맥이 풍부했고, 이제야 겨우 개발되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태양교가 선페일에서 은광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건-”
대주교는 쉽게 말하지 못했다. 이미 태양교는 자신들의 은광을 모두 제국에 바쳤다.
그런데 다시금 은광을 가지려 한다는 건, 기껏 달래놓았던 제국을 다시금 자극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여기 계신 레온나토스 전하가 황제가 되신다면 응당 태양교의 은광 채굴을 윤허하실 겁니다. 전에 지은 죄는 과거고, 지금은 지금이니까요.”
하지만, 아렌은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다른 황자가 황위에 올랐을 때, 태양교의 은광 채굴이 허락될까요?”
“…그러니, 황권 경쟁에서 레온나토스 전하를 지지하라, 그 말씀입니까? 그 말씀이라면 지금도-”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레온나토스 전하에 대한 지지는 항상 반기지만, 지지와 승리가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음 황제가 누가 될지 모르는 만큼 태양교가 산맥 남쪽에 광산을 개발하는 건 큰 모험입니다.”
“…….”
“하지만, 북부라면 다르죠. 그곳은 제국의 시선에서도 벗어나 있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개척해야 하는 만큼 온전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유리합니다. 어쩌면, 태양교의 새로운 신천지가 될지도 모르죠.”
아렌의 감언이설에 대주교는 속지 않았다.
“말도 안됩니다. 지금껏 길이 없었다 하나, 산맥 너머의 기후가 이곳 선페일 영지보다 좋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곳은 유랑족들이나 어슬렁거리는 땅인데요! 큰 희생이 있을 겁니다!”
“물론 쉽지 않겠죠. 하지만 착하기 어려운 곳일수록, 더욱 교단의 개척지로 삼기 적합합니다. 더 어려운 공사일수록 사제들의 신앙심이 시험대에 오를 테니까요. 진정 신실한 자를 추려낼 수 있는 땅이 되겠죠.”
사람을 움직이는 여러 가지 요인 중 가장 맹목적인 것이 신앙이라고, 아렌은 확신했다.
대주교가 설파하는 교리가 그럴듯하다면, 신도들은 기뻐하며 기꺼이 산맥 너머 북부로 향할 것이다.
“…지금, 교단의 이익을 위해 신도들을 사지로 내몰라는 말입니까?”
“사지라니요. 산맥 이북이야말로 태양교 신도에게 보장된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 말로 신도들을 홀릴 수는 있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요. 전 생각이 다릅니다.”
이제, 아렌이 대주교를 구워삶을 때였다.
“산맥 남과 북을 잇는 도로가 무사하기만 한다면, 북부 개척민들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습니다. 누구도 정착하지 않은 땅인 만큼 개발되지 않은 광물들이 그득그득 있겠죠. 오랜 기간 사람이 살아온 산맥 남부의 광맥조차 이토록 풍부한데요.”
“…….”
“그리고, 제국의 국경과 정착지를 넓히기 위한 태양교의 노력이 알려진다면, 위험한 종교라는 기존의 선입견 또한 일신할 수 있겠죠. 다시 중앙으로 교세 확장을 도모할 교두보가 될 겁니다.”
“그건-”
눈썹이 짙은 노인, 태양교 대주교의 표정이 흔들린 걸 아렌은 놓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대답은 며칠 뒤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주교의 고민은, 그저 형식상의 표현일 뿐이었다.
아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군. 거의 넘어왔어.’
*****
“…아렌, 마음이 좋지 않아.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나?”
대주교가 있는 대본전을 나온 후, 레온나토스가 소곤거렸다.
레온은 산맥 이북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봤다.
“그곳으로 정착민을 밀어 넣다니, 그들을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산맥 북쪽의 고난에 대해 솔직하게 밝힐 거고, 그럼에도 지원하는 사람들만을 보낼 생각입니다.”
“거짓 교리를 미끼로 삼아서? 신도들을 북으로 내보내는 건 신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닌가!”
“전하께선 신을 믿으십니까?”
“믿지 않아! 신이 존재하더라도, 적어도 저들이 말하는 그런 신은 아니라 믿어. 하지만 저들의 신을 믿지 않는다고, 그 신을 사칭해 저들을 속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단 말이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태양교 신도 또한 존재하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존재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 존재를 보증하는 건 교단의 대주교뿐이죠. 대주교의 뜻이 곧 교단의 뜻, 나아가 신의 뜻이 되었습니다. 제가 태양교 대주교께 제안한 것과 그리 다르지도 않지요.”
“…아렌.”
“이미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정말 저들의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신도들을 사지에 몰아넣지는 않겠죠. 아니, 설령 정말 사지라 하더라도 저 신도들은 그것 또한 신의 뜻이니, 기꺼이 죽을 겁니다.”
“…….”
레온나토스의 눈이 커졌다. 아렌 또한 일부러 위악적으로 말했기에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물론, 저 역시 저들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정착에 필요한 최대한의 지원을 돕겠습니다. 저 역시 저 북부 끝이 궁금하거든요.”
흔히 말하는 당근과 채찍이었다.
태양교 대주교에게 적용된 당근은, 태양교가 중앙으로 다시금 진출할 가능성.
채찍은, 지금도 사원 깊은 곳 태양흔 바닥에 엎드린 채 굳어 있을, 제5 황자 고드프리였다.
레온나토스에게 보이면 좋을 리 없는 만큼 그 자초지종을 알고 있을 아렌에게 강하게 나올 수 없다.
“…어렵군, 정말 어려워, 아렌.”
여러모로 레온나토스의 양심에 부합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임무가 황권 경쟁에 매우 중요한 분기점인 이상, 레온나토스의 계획에 심하게 반대할 수는 없었다.
“황궁을 나온 후 너무 강행군이었습니다. 조금 쉬시면 머리도 맑아지시겠죠. 사원에서 방을 제공했으니, 우선 여독을 푸시죠.”
황궁을 나온 후 쉴 새없이 북부로 올라왔다. 그리고 협곡을 직접 걸어 산맥 너머를 눈으로 확인까지 한 황자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잘 정리된 침대에 누운 황자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후우, 그럼.”
강행군을 한 건 아렌도 마찬가지. 하지만 침대에 드러눕기 전,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아렌은 태양교의 평신도가 주로 기거하는 아래층에 내려왔다.
“아, 아렌!”
곱슬머리의 평신도가 반갑게 맞았다. 예전 신세를 졌던 태양교 개혁파, 콜론이었다.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네요.”
콜론은 정기적으로 아렌에게 태양교 소식을 전하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최근 보고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전통파와 개혁파 사이의 묘한 신경전은 아직도 여전한 듯했다.
‘개혁파는 교단 내에서도 소수지만, 그 대부분이 아직 젊은 청년층이야.’
어딘가 새로운 곳을 개척할 만큼 진취적이며, 체력 또한 충분한 자들.
아렌은 콜론에게 은근히 말했다.
“혹시, 나와 다른 곳에 터전을 잡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아직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곳이요.”
아렌이 물었다.
산맥 너머, ‘밟지 못하는 땅’에 대한 언급으로는 썩 적절한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