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아렌의 시야가 단숨에 확 트였다.
어두운 협곡 사이를 지나자마자 보이는 건, 끝없이 펼쳐진 설원.
오직 설원 뿐이었다.
“…이건.”
이미 알고는 있었다.
산맥 너머에는 1년 내내 눈으로 뒤덮인 설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문헌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거의 없고 어디까지나 기록일 뿐, 실상은 다를 가능성에 아렌은 걸었다.
하지만 기록은 사실이었고, 아렌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아직 가을인데 벌써 이만큼의 눈이라니.’
시간을 건너뛴 듯한 광경이지만, 발아래 단단히 뭉쳐있는 눈이 지금 보는 것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렌은 발밑의 눈을 몇 번 더 눌러 다졌다.
바닥의 눈은 단단하면서도 두꺼웠다.
마치,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녹지 않았던 것처럼.
좁은 협곡을 통해 불어오던 차가운 칼바람은, 이제 더 넓은 면적에서 더 차가운 온도로 아렌과 기사들을 에워쌌다.
산맥 북쪽에 내린 눈에는, 차가운 북풍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북부의 찬 바람이 산맥에는 가로막히는 건가? 그래서 산맥 북부는 설원이 되고, 산맥 남부는 농사가 가능할 정도로 온화한 거지.’
이래서야 북부를 개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름답군.”
설원을 처음 본 레온나토스는 주변의 광경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티끌 하나 없이 하얀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 모습은 확실히 장관이었다.
이토록 평평하고 하얀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달리 없었다.
‘확실히, 멋진 광경이긴 해.’
그 풍경 덕분에, 지금 고민이 더 깊어지긴 하지만.
“전하. 눈에 보이는 한 별다른 특이점은 없어 보입니다. 이 인원만으로 더 멀리 탐험할 수도 없으니, 이대로 돌아가시죠.”
“…그래야겠지. 남아있는 병사들이 걱정할 테니 말야. 그런데 아렌, 저 건 뭐지?”
지평선 부근을 계속 훑던 아렌은 설원 한복판에 있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거대한 눈 기둥을 가리켰다.
지상이 온통 하얀색이었기에, 땅 위로 3미터는 솟아오른 눈기둥은 얼핏 봐선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렌은 눈기둥에 가까이 다가갔다.
장정 세 명이 달라붙어도 다 안지 못할 만큼 두꺼운 눈기둥은, 동굴의 석순이나 거대한 동물의 송곳니처럼도 보였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누군가 쌓은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또 표면이 지나치게 매끄럽습니다.”
인위적이지만, 자연스럽다.
모순적인 말이지만 아렌은 어떻게 그 모순이 생겨났는지 알 것 같았다.
아렌은 기사 하나에게 칼을 빌려, 눈기둥을 중간부터 푹 찔러갔다.
칼이 중심부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칼끝에 단단함이 느껴졌다.
‘…역시.’
아렌은 눈기둥에 박아넣은 칼을 뽑아, 빌렸던 기사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언제 누가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눈 기둥의 정체는 누군가가 박아넣은 커다란 나무말뚝입니다.”
“나무말뚝?”
“네. 이 형태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말뚝 위에 계속 눈이 쌓이면서 지금의 눈 기둥 모양이 된 겁니다.”
“일부러 눈 기둥이 되도록 세워뒀다고? 이런 아무것도 없는 설원 한복판에? 그럴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 눈기둥이 필요합니다. 이건, 일종의 이정표니까요.”
아렌은 시선을 설원 저편으로 돌렸다.
온통 하얀색의 바닷속에서 요철을 찾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렌은 또 다른 눈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눈밭에는 길을 깔아도 곧바로 파묻혀버리고 말겠죠. 표지판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그러니 나무 기둥을 꽂아 이정표로 삼은 겁니다. 눈밭에 생긴 요철로 대강의 방향만은 알 수 있게끔.”
아렌의 말에 레온나토스도, 기사들도 설원의 북쪽에 시선을 돌렸다.
먼 곳의 눈기둥일수록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들은 북으로 일렬로 나 있는 더 많은 눈기둥들을 곧 찾아낼 수 있었다.
눈기둥은, 시야에 닿지 않는 설원 저편까지 늘어서 있었다.
‘눈기둥을 세운 사람은, 건국왕인가? 산맥을 넘는 길을 만든 것도 모자라, 저 너머까지 향하러 한 건가? 무슨 이유로?’
건국왕이 별다른 목적도 없이 북부로 먼저 향한 이유는 지금도 역사상의 미스터리였다.
아렌의 추측은 건국왕이 운명석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의 참모인 솔티르가 운명석과 계약해 후대에 ‘현자’라 불릴 만큼의 위대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산맥을 넘지 않아도 운명석은 구할 수 있다. 산맥 이남에 존재하는 모든 운명석을 직접 산맥을 넘어 공수한 것이 아니니까.
‘건국왕이 곧장 북부로 향한 이유라.’
흥미가 동했지만 지금 당장 밝히기엔 무리였다.
“전하. 이만 돌아가시지요. 설원 북부의 탐방은 협곡 안쪽 길을 모두 정비한 이후, 말을 데려온 다음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 지금은 가진 짐도, 말도 없으니. 게다가, 어쩐지 머리가 아프군.”
설원을 오래도록 응시한 레온이 현기증을 호소했다.
햇빛을 강하게 반사한 눈밭의 새하얀 풍경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어두운 곳을 이제 막 통과한 황자의 눈에 부담을 준 것이다.
이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아렌 역시 눈 부근이 지끈지끈 아파 오는 건 매한가지였다.
“…모두 기다리고 있겠군요. 돌아가시죠.”
건너편의 풍경은 이미 확인했다. 길이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도 확인했으니, 이제는 돌아갈 차례였다.
“아렌, 괜찮겠나? 이대로라면 길을 재건할 순 있겠지만, 유지할 수는 없어. 관리할 동력도, 명분도 부족해.”
산맥 북부의 땅은 농사짓기도 부적합하고, 산림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다.
같은 산맥이 맞닿아있으니 선페일 지방처럼 광물이 풍부할 수도 있겠지만, 광맥을 찾는 작업을 할 거면 산맥 북부보다 남부가 훨씬 편안하다.
사람들이 협곡의 길을 드나들만한 실리적인 이유가 현재로선 턱없이 부족하다.
“그건…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어두운 협곡 안쪽에 발을 들이며, 아렌은 다시 뒤쪽에 펼쳐진 설원을 바라봤다.
“방법은, 어쩌면 생각날 것도 같거든요.”
*****
“뭐야, 이게 대체! 한참 동안 기다렸잖아!”
계곡 안쪽을 잠시 살펴보겠다던 레온나토스와 아렌은 들어간 지 나흘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일주일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찾으러 오라고 말해두긴 했지만, 그 말이 실제로 쓰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미안해요, 터커. 기약 없이 기다리게 했네요.”
“광산을 거의 일주일이나 비워뒀다고! 이만 돌아가게 해준다면 좋겠는데!”
“…터커, 꼭 돌아가야 하나요?”
“뭐야?!”
아렌은 방금 자신들이 넘어온, 겨우 기어서 올라갈 만한 잔해의 언덕을 가리켰다.
“저흰 이 협곡을 다시 길로 바꿔줄 인부와 감독관을 찾는데요.”
“…그래서 뭐! 내가 여길 맡아준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어!”
“작업이 가능할 거라고 했죠?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온 인부들이 있어 인력도 충분하다고도 했고요.”
“그거야, 그렇지만-”
“흙과 돌을 다루는 데는 터커만한 사람이 없겠죠. 우리에겐 실력있는 감독관이 필요해요.”
다소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이지만, 터커의 표정을 살핀 아렌은 터커가 승낙할 것임을 확신했다.
“…끄응, 어쩔 수 없나? 아렌 나리한테는 빚도 있으니.”
아렌은 그가 운영하는 광산이 무너져내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비록 광부로 위장한 태양교 공작원의 짓이었지만, 광산과 광부를 총괄하는 터커는 자신의 책임이나 마찬가지라 느꼈다.
자신의 실책으로 죽을 뻔했던 아렌의 부탁을, 터커는 거절하지 못했다.
“…정말 일을 시작할 거면, 이 주변에 숙소부터 세워야 해. 주변에 변변한 마을도 없으니 인부들이 먹고 잘 시설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저희가 데려온 기술자들도 있으니까.”
“협곡 안 상태를 봐야겠지만, 속도를 높인다면 길을 다 뚫는 데 1년이 걸리진 않을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길을 유지할 방안은 있어? 건너편을 봤을 것 아냐. 마을을 만들 만한가?”
“…….”
터커도 레온나토스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광부장 터커의 질문에 레온나토스도 귀를 기울였다.
돌아올 때 아렌에게 물었지만, 아렌은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렌은 터커에게도 그때와 같은 대답을 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뭐가 말이야. 이까짓 길, 한번 뚫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거냐? 그래도 공을 들여서 갈고 닦는 길인데 몇 년 안 가서 다시 망가지는 꼴은 못 봐!”
“그런 뜻이 아니라요.”
“…?”
도로는 제대로 쓰일 것이다.
사람은 주기적으로 왕래할 것이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요금으로 길도 주기적으로 보수될 것이다.
아렌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계획대로 잘 진행되기만 한다면.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꼭 실리를 추구할 때만은 아니라는 거죠.”
*****
아렌은 터커에게 정식으로 협곡 사이의 길을 정비해달라는 의뢰를 했다. 제3 은광은 임시로 다른 광부장이 들어가게 되었지만, 터커는 광부장으로 있을 때보다 3할은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었으니 그로서도 이득이다.
그 후 아렌은 레온나토스와 함께 태양교의 총본산, 대사원으로 향했다.
산의 경사면을 따라 늘어선, 어떻게 지었는지 가늠도 안 되는 거대한 건축물.
태양교의 신전은 밖으로 보이는 모습뿐 아니라, 산맥 안쪽으로 파 내려간 부분이 훨씬 깊어 그 규모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선페일 지역에 들렀다면 가장 먼저 이곳에 올 법하지만, 레온나토스가 태양교 대사원을 의도적으로 피한 이유는 하나였다.
“…여기서, 고드프리 형님이 돌아가신 건가.”
“네. 안타깝게도.”
이 안의 어둠속에서 제5 황자 고드프리는 아렌의 목숨을 노렸고, 정작 자신이 어둠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온몸이 굳은 채 어둠 속에 그대로 매장된 기분이 어떤지, 아렌은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일부러 묻지 않았지만, 형님의 시신은 어떻게 됐지?”
“아마도, 아직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그 자리에?!”
“네. 그게 저들의 전통인 지라.”
“…그런가. 그게 저들의 보통인가?”
고드프리는, 아렌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아래로 추락했다.
추락하는 중간, 고드프리의 몸이 공중에 둥실 떠올랐고, 아렌은 그의 몸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간신히 고드프리에게 매달려 있었다.
무사히 착륙한 후, 고드프리의 몸은 멋대로 움직여 바닥에 납죽 엎드려 절한 자세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의식이 또렷한 상태 그대로.
그 구덩이는 운명석 계약자였던 어떤 광신도가 쳐놓은 덫이었다.
그 구덩이의 신비는 교단 대주교에게만 대대로 내려지는 극비였고, 대주교는 같은 운명석 계약자이기에 그 신비가 통하지 않는 아렌을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여기 들른 이유는 뭔가. 형님의 시신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아뇨. 그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얼어붙은 산맥 북부로의 개척에, 태양교의 힘을 빌리면 어떤가 싶어서요.”
“태양교를? 저들을 북부로 보낸다고? 농사조차 힘든 불모의 땅인데?”
“어차피 저들은 여기서도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
실리로는 도저히 사람을 북부로 보낼 수 없다.
그건 이미 눈으로 확인한 사실.
그러니, 실리 외의 다른 요인이 필요했다.
“건국왕께서는 협곡 사이의 길을 만든 후, 설원에서도 북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세우셨습니다. 적어도 이정표가 남아있는 곳까지는 계속 전진하신 거겠죠. 적어도 설원 넘어 북쪽에, 뭔가가 있다고 여긴 것이겠죠.”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렌도 모른다.
그리고, 몰라도 상관없었다.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쫓기로는 종교만 한 것이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