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산맥을 통과하는 길이라고?”
광부장 터커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이 나오자, 뒤에 물러나있던 레온나토스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처음 보는 얼굴에 터커는 눈을 찌푸렸다.
“뭐야, 당신은 또 뉘쇼?”
“무엄하다! 네 앞에 계신 분은 제국의 열두 번째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이시다.”
레온의 옆에 서 있던 더글라스가 엄하게 말했지만, 터커는 알아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흐음, 열두 번째 황자라. 어쩐지 아직 어리시구만. 아렌을 곁에 둔 건 또래라서였나?”
“이놈이 아직도!”
다시 한번 언행을 지적하려는 더글라스를 레온나토스가 제지했다.
“그만두게, 더글라스 경. 이곳은 황궁이 아니고, 광부 역시 궁인이 아니네. 황궁의 법도를 알 리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자야.”
“오, 잘 알고 계시는군. 배워먹은 것이 변변찮으니, 실수하더라도 방금처럼 부디 이해해달라고.”
“…….”
레온나토스의 두둔에 터커가 금방 동조했지만, 더글라스는 더는 터커의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레온이 터커의 말투를 문제 삼지 않은 건 그게 맞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광부장, 아까 한 말이 정말 사실인가?”
“아까 한 말이라니, 아, 마차가 지날 수 있는 북부로 가는 길? 그야 있지.”
“하지만 황궁에선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었는데!”
“물론, 지금은 길이 막혀있기는 해. 하지만 기록조차 없다고? ”
레온나토스의 말에 오히려 터커가 어리둥절해했다.
“이 주변 사람들도 거의 잊고 있는 모양이지만, 황자님은 기억해야지 않나? 산맥을 넘는 길도 건국왕이 만들었으니까.”
“…….”
처음 듣는 소리.
레온나토스는 혹시나 해서 아렌을 돌아봤지만, 아렌도 고개를 저어야 했다.
‘-이상하군.’
흙먼지가 잔뜩 묻었음에도 터커의 속내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 터커는, 의심의 여지 없이 엄연한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터커의 말은 거짓이 아냐. 하지만 그런 기록은 황궁 서고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제국 안에서 운명석에 대한 기록과 마찬가지로, 산맥 너머로 향하는 길에 대한 기록도 의도적으로 말살되었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잠시 제쳐두고 레온나토스는 다시금 물었다.
“광부장. 산맥을 넘는다는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직접? 여기서 며칠이나 걸리는데, 여길 비우면 기한에 제때 맞출 수나 있을지 모른단 말이야. 여길 비워도 되려나?”
“부탁하네. 개인적 용무인 만큼 이곳에서 받을 급료의 두 배를 지불하지.”
금액을 듣자 터커의 우려도 금방 가셨다.
“커흠, 흠. 뭐, 그렇다면야.”
*****
터커가 안내한 곳은 선페일 영지에서도 서쪽, 도국 연합과 더 가까운 곳이었다.
장벽처럼 높이 솟아오른 산맥의 사이에, 칼로 벤 듯한 골짜기가 좁고 깊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골짜기 사이엔 무너져내린 흙과 토사가 있어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여기에, 길이 있었다고?”
“그렇다던데. 이 부근 마을 사람이면 대부분 알고 있어.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고, 거의 다 설화처럼 알고 있지만. 골짜기 아래를 지나는 좁은 길이었지만, 원래도 낙석이 빈번했던데다 크게 산사태가 난 이후 관리가 끊겼다고 하더군.”
그러고보니 주변의 바닥은 왕의 길과 같이, 평평한 돌로 포장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비록 그 위에 흙이 덮이고, 잡초가 자라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골짜기를 막은 토사는 가장 낮은 부분도 2층 건물을 훌쩍 넘는 높이였다. 집채만 한 바위도 몇 개나 보였다.
“…이 토사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면, 그걸 다 파내는 것도 엄청난 대공사겠는데.”
레온나토스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아렌에겐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네. 하지만 산비탈을 올라가며 길을 내거나, 굴을 파 산맥을 관통하는 것보다는 훨씬 일이 쉽겠어요.”
“하긴.”
아렌은 터커를 돌아보며 본론을 꺼냈다.
“터커. 우린 이곳의 토사를 전부 파내고 다시 길을 만들어야 해요.”
“여기를 다? 농담이겠지?”
“슬프지만 빈말도 농담도 아니에요. 터커라면, 이곳에 있던 길을 다시 복원할 수 있나요? 주변의 인부들을 아낌없이 끌어 쓸 수 있다면요.”
광부장 터커는 조금 고민하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겠지만, 가능은 하겠지. 아직 선페일에 새 은광이 발견되지는 않았고, 소문을 뒤늦게 듣고 찾아온 뜨내기 광부들이 많으니까. 언젠가 다시 새 은광이 발견될 테고, 그전까지는 광부들도 소일거리로 여기지 않을까? 충분한 보수만 있다면야.”
레온나토스에게 당면한 과제, 산맥을 관통하는 길을 만드는 것은 어찌어찌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길을 만드는 게 무슨 효과가 있는 거야?”
“글쎄요? 제국이 국경선을 좀 더 북쪽으로 밀어 올리려는 것 아닐까요?”
“원래 만들어져 있던 길이야.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자연히 끊어졌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지당한 말씀.’
하지만,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냐 아니냐에 레온나토스의 황권이 달려 있었다.
그 사실은 되도록 떠벌리지 않는 편이 낫다.
‘괜히 말했다간, 황자의 약점이 될 뿐이야.’
“흠, 그런데도 일을 맡길 건가? 아렌 나리? 일이 험하니 인부들 임금으로도 제법 돈이 들 텐데?”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3 은광에서 나오는 은을 무게로 지급할 테니까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터커는 이번엔 레온나토스를 쳐다봤다.
“인부들에게 임금이야 당연히 주는 거지. 그런데, 길을 다 뚫고 나면 어쩔 건데.”
“길을 다 뚫고 나면…?”
“그래, 황자 나리. 골짜기가 저리 험하니 낙석은 지속적으로 있을 테고, 누군가는 상주하면서 정기적으로 길을 정비해야 할 텐데, 그 비용도 여전히 황자 나리가 지불할 건가? 관리를 멈추는 순간 이 길은 길로서의 가치를 잃을 거야.”
“-그렇군.”
전에 했던 말과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결국 길이 계속 유지되려면, 그 길을 누가, 얼마나 많이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사람이 지나지 않는 길에 가치는 없으니까.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군. 산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해.’
“…걸어서라면, 지나갈 수 있을까?”
아렌은 건물 높이로 쌓인 토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말없이 두 발로라면, 무너져내린 토사 위를 기어 올라가 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렌? 방금 뭐라고?”
“전하. 혹시 괜찮다면, 이 위를 지나 반대편을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무너진 토사 위를?”
“네. 어느 정도의 공사가 필요한지도 확인하고 싶고, 산맥 반대편의 상황도 확인하고 싶습니다. 반대편이 개척이 불가능한 땅이라면, 길의 용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렇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레온나토스는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네, 아렌.”
하지만 그 대답에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거기에, 나도 따라가는 게 조건이지만.”
*****
협곡은 마차 네 대가 한꺼번에 지나가도 될 만큼 넓었다.
물론 그 기준은 길로서의 넓이고, 지형지물로서의 계곡 넓이로는 소스라칠 만큼 좁았지만.
협곡은 거의 수직으로 파여 있었다. 하늘에서 누군가 칼로 그은 듯 반듯한 협곡 아래로, 아렌과 레온나토스, 더글라스와 기사 다섯이 나란히 지나가고 있었다.
“전하, 길이 험합니다. 굳이 따라오실 필요는-”
“아니 될 소리. 군주된 자로서 어찌 신하의 위험을 방관하겠나.”
“이미 이 장소는 충분히 위험합니다. 물가나 숲속이라면 주변을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위험을 막을 수 있겠지만,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낙석은 방비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 낙석을 맞아 죽을 수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그런 곳에 아렌 너도 있지 않나. 위험해서 못 가는 곳에 가신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지.”
“…….”
아렌은 더는 설득을 포기했다.
레온나토스는 황궁 안에서도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험준한 지형을 만나도 성큼성큼 넘어갔다.
사람 키만한 바위를 넘어가며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그런데 아렌.”
“네, 전하.”
“자넨 왜 산맥 너머에 가려고 하는 거지?”
“…그야, 황제 폐하께서 주신 임무 때문입니다.”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평소에도 얼어붙은 산맥 너머에 관심이 있지 않았나.”
“…….”
‘그렇게 티가 났나?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실로 궁한 아렌이지만 레온나토스는 그리 큰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었다.
“역시, 너도 유랑족 출신이기 때문인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렌은 일단 긍정했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역시 그런가. 실은, 나도 북부에 조금 흥미가 있었다.”
“전하가요?”
“그래. 역시 이상한가?”
무너진 흙과 바위로 이뤄진 언덕을 넘으며 레온나토스가 말했다.
벌써 몇 개나 되는 언덕을 넘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지면에 다다랐고 원래 마차가 지날 수 있었을 바닥에 발이 닿았다.
지면 곳곳에 주먹만 한 크기의 돌이 널부러져 있었고, 좁은 계곡 사이로 차디찬 칼바람이 몰아쳤다.
“라이안 형님이 말씀해주신 검은 돌 말이다. 그 돌이 산맥 너머 북부에서만 나온다고 하니 흥미가 동하더군.”
‘…그때 말인가?’
수확제가 한창이던 때, 라이안은 굳이 황궁으로 비나그네를 끌고와 목을 쳤다.
그 당시 다른 황자들은 라이안이 도국의 첩자를 죽였다, 그 정도로만 받아들였지만, 레온나토스는 동부 아티스에서도 검은 돌, 운명석과 얽혀 있었다.
“어쩌면 북부, 저 주변을 떠도는 유랑족이라면 검은 돌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유랑족이 많다면 일단 사람이 살아갈 만한 땅이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사람이 살 수 있다면, 개척도 가능은 할 것이다.
아렌은 하늘을 올려다 봤다.
좁게 갈라진 하늘은 물결치지도 않고 직선으로 좁게 늘어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 도로를 만든 사람은 건국왕이지만, 그가 이 협곡을 깎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마치, 길을 내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협곡이야. 이만한 장소가 기록에도 남지 않는다면, 역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건데. 왜지?’
제국이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정보는 또 있었다.
북방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한 힘을 가진 검은 돌, 운명석.
그것에 대한 정보 역시 제국에서는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었다.
‘산맥을 넘는 길과 흑옥, 둘 모두 잊혀졌다는 게 정말 우연일까?’
협곡 사이 길은 비교적 평탄한 지점과 낙석으로 가로막힌 곳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하늘이 좁아 줄곧 밤 같은 길을, 아렌과 레온나토스는 줄곧 걸었다.
협곡 사이에서 두 번의 숙영을 마친 후.
“-밖이다.”
아렌과 레온나토스는 협곡 사이를 통과했다.
-화악.
좁고 어두운 곳에 익숙한 아렌의 시야는 단숨에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