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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42화 (142/227)

#142화

아렌은 떠나기 전 테오드릭이 한 이야기를 다시 곱씹었다.

‘…언젠가부터 외유가 많아? 황궁이 날 밀어내려 한다고? 우연이겠지?’

아렌은 북부로 향하는 왕의 길 위에 있었다.

북부로 향하는 여정은 이번이 두 번째.

익숙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기억에 남은 풍경들이 속속 보일수록 아렌의 감회는 새로웠다.

‘…그때랑 거의 비슷하군. 뒤만 안 돌아본다면.’

그 당시에 북부로 향하는 인원은, 이만큼의 대규모가 아니었다.

레온나토스, 그리고 아렌과 동행하고 있는 인원은 기사들과 병사, 동행한 기술자까지 모두 300명이 훌쩍 넘는 대인원이다.

뒤따르는 보급 마차만 해도 스무 대가 넘었다.

레온나토스는 이번 북부행이 초행이었다.

“아렌, 넌 어느새 이번 길이 두 번째인가?”

“네. 원래라면 길 안내는 맡겨달라고 말씀드려야겠지만, 보시다시피.”

선두의 기사들과 아렌, 레온나토스 앞에 펼쳐진 길은 곧게 뻗은 외길이었다.

건국왕 브륀할트 1세와 그의 부관, 현자 솔티르가 가장 먼저 깔아놓은 길.

정작 그 길의 끝, 선페일 영지에는 제국에 도움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아렌. 이제와서 폐하가 얼어붙은 산맥을 넘는 길을 만들라 하신다. 그 이유를 알겠나?”

“네. 선페일 지역의 상황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선페일 지역은 춥고 척박한 땅만 널리 펼쳐져있어 농사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가장 변경에 떨어져 있으니 상업도, 국경을 맞댄 다른 나라조차 없으니 군사적 요충지도 아니었다.

건국왕 브륀할트 1세가 가장 먼저 건설한 길임에도, 지금껏 요긴하게 사용되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얼어붙은 산맥 아래에서 나오는 막대한 은으로 제국의 재정은 단숨에 탄탄해졌고, 선페일 지역의 중요도 역시 급상승했다.

은은 개인에겐 사치품이지만, 국가에겐 필수품이나 마찬가지.

선페일 은광 이전에는 그 은의 대부분을 아트마 교국으로부터 수입해와야 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만 해도, 제국으로선 큰 호재였다.

“전하가 소유하신 제3 은광으로부터는 격주마다 보고받고 있습니다. 자연히 선페일 지역의 다른 동향도 쉽게 접할 수 있죠.”

앞으로 새로이 발전할 북부의 영주를 임명할 기회가 레온나토스에게 주어졌을 때, 레온나토스는 선페일 주민들 중 투표를 통해 영주가 될 만한 자를 정했다.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선페일의 주인은 몇 년을 주기로 계속 바뀔 테니, 한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한 명이 독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가, 아렌. 넌 도국 연합에도 가보지 않았나? 도국 연합 역시 선페일처럼 시민들 사이에서 시장을 뽑는다던데. 괜찮은 제도였나?”

레온나토스의 물음에, 아렌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도국의 시장이 선출직이라고 하나, 사실 제국과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모두 기존의 유력가문 출신이었고, 유력가문의 자손이면 차기, 혹은 차차기 시장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니까요. 다른 점이 있다면, 귀족은 혈통으로만 정해지지만 도국의 유력가문은 돈과 명예를 통해 유력가문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특정 가문만 시장을 반복해? 선페일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면 안 되겠지. 누구든 영주직 후보로 오를 수 있게 하면-”

“한 선거마다 후보가 수백, 수천 명 난립하겠죠. 아래 사람의 사다리를 걷어차선 안 될 일이지만, 제대로 된 후보를 걸러내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결국, 소수의 사람만 영주가 되는 건가? 얄궂군.”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다 비슷한 법이죠. 요직일수록 가장 적임자를 세우고 싶을 테니까.”

‘…그건 남말할 처지가 못 되지.’

네 황자가 네 방향에서 받은 각기 다른 임무.

황제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이 임무가 끝나면, 차기 황제가 정해지는 건가?’

다른 황자들이 어떤 임무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레온나토스가 받은 임무와 동급으로 어려운 임무일 것이다.

테오드릭이 받았던, 만월강 동부를 개간하라는 임무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년, 어쩌면 수십 년 걸릴 작업일지 몰라. 그동안 가장 유력한 황자 네 명을 변방에 박아둘 생각은 아니겠지.’

아마 황제가 원한 건 임무를 수행할 아이디어,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인력과 자금.

황자의 계획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만 확인시킨다면,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도 무리는 없다.

“그런데, 산 위에 어떻게 길을 개척할지는 정하셨습니까.”

“글쎄. 우선 산세가 어떤지부터 아는 것이 우선일 테니, 직접 방문해봐야 알지 않을까?”

아렌이 말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니?”

선페일에서 발견된 은광이 가져다준 건, 부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선페일 일대에는, 땅을 파고 돌을 깨는 데는 도가 튼 인부들이 널려있으니까요.”

*****

지난한 행군이 계속됐다.

뒤따르는 마차 바퀴 하나만 말썽이라도 대열은 길게 멈춰 서야만 했고, 십수 명 인원이 빠르게 통과한 저번의 여정과는 그 속도부터가 차이 있었다.

어느덧 계절이 지나,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무렵.

북부에 다다르자, 벌써 때 이른 서리가 하얗게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보고받고는 있었지만, 어쩌면 북부는 지금보다도 더욱 발전할지 몰라.”

선페일 지역에서 북부로 내려가는 상단을 하루에도 두세개씩은 지나쳤다.

하나 뿐인 길 위를 지나던 상단은 무장한 병사들을 보고 멈칫했지만, 곧 관군인 것을 알고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저만한 상단이라니. 선페일은 보고받은 것보다도 더 부유한 곳인가?”

“설령 지금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은 시기에 그리되겠지요.”

만약 지금 얼어붙은 산맥 너머로 가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선페일 지역은 개척의 전초기지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과거에도 산맥 너머를 개척하려는 시도는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산맥 너머를 수월하게 오가는 길도 없었고, 개척민들을 지원할 보급로도 너무 길었다. 선페일 영지에서 개척자들을 부양할 수 없으니 수도나 그 부근까지 보급선이 길게 늘어졌던 것.

“이전에도 산맥을 넘을 수는 있었을 겁니다. 마차, 혹은 대규모 보급선이 일상적으로 지나갈 길이 아니었을 뿐. 선페일의 지금 경제력이면 개척단을 부양할 수도, 길을 만들 재력과 인력도 확보할 수 있겠죠.”

“그렇겠지. 확실히 길을 만드는 것에는 무리가 없어. 문제는, 그 길을 ‘왜’ 만드냐는 것이지.”

“길을 만드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군요.”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만 있어도 고용주를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만으로도 노동의 능률은 급변한다.

‘…하지만, 길이 뚫리는 것만으로 북부의 개척이 가능한가?’

문헌에 나온 얼어붙은 산맥 북쪽은 사철 눈이 녹지 않는 극한지라 적혀 있었다.

선페일 지역만 해도 보리 농사까지는 가능했기에, 고작 산맥 하나로 그만큼 차이가 나지는 않을 테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길 너머 끝 쪽의 지평선 부근에 희끄무레한 실선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지평선 부군의 흰색 실선은 얼어붙은 산맥의 능선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선페일 영지에 들어서 있었다.

*****

“저게 얼어붙은 산맥인가? 저곳을 지나는 길이라니-”

어려운 임무임은 알았지만, 막연히 머리로만 생각했던 레온나토스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산이라기보다 장벽처럼 북으로 향하는 길을 완전히 막아선 산맥은, 그 중턱 부분부턴 눈이 내려앉아 완전히 새하얬다.

“우선은, 도움이 될 만한 사람부터 만나보죠.”

레온나토스는 선페일의 거점도시 다운힐에 들어섰다.

영지민 중에서 선출된 시장은 레온나토스 일행을 격하게 반겼다.

이전 변질되었던 태양교의 압제에서 구하고, 무능한 영주를 축출한 레온나토스는 그들에게 마치 신화 속의 구세주처럼 보였으리라.

하지만 그조차도 레온나토스가 여기 온 목적을 듣자 난색을 표했다.

“산맥을 넘는 길, 말입니까? 그야 이곳이 더 발전한다면 모두 기뻐하겠지요. 하지만…”

“물론 인부들에게 정당한 대가는 지불하겠다. 가능한지 어떤지만 알고 싶네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무리 번듯한 길이라도 사용하거나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망가집니다.”

“그것도, 알고 있네.”

레온나토스가 대답했지만, 아렌의 속은 복잡했다.

‘…결국 황제가 길을 만들라고 한 말은, 산맥 너머로 지속적인 왕래를 해야 한다는 건가?’

우선 레온나토스는 안내를 받아 산맥을 중턱까지 오를 수 있는 샛길에 올랐다.

능선을 구불구불 타고 올라가는 좁고 가파른 길은, 마차는커녕 말조차 제대로 오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두 발로 직접 경사를 올라갔지만, 오를수록 레온나토스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큭, 이래서야.”

경사면의 벽을 깎아 만든 듯한 잔도조차도 중턱 부근에서 무너져내려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산양이나 겨우 올라갈 법한 험한 경사면뿐.

적어도 마차 정도는 지나갈 수 있어야 산맥 너머로의 보급이 원활하다. 그저 산맥을 넘을 수 있다는 것 정도로는 교류가 활발히 일어나지 않고, 기껏 만들어진 도로도 금방 다시 끊길 것이다.

“여긴 안 되겠군, 아렌.”

“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소수의 인원이 먼저 산맥을 넘는 길을 찾으려 했지만, 중턱에서 포기해야 했다.

레온나토스는 자신의 소유인 제3 은광에 향했다.

그곳에는, 광부장 터커와 정체를 숨긴 제2 황자, 엔지가 있었다.

엔지는 멀리서 레온나토스와 병사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겁했다.

“허, 헉! 레온, 네가!”

황태자 후보인 동생이, 병사들을 데리고 벽지까지 찾아왔다.

엔지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건, 더없이 불길한 상상뿐.

“기어이 날 죽일 셈이냐? 굳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뜨려서!”

“…형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여기 온 건, 황제 폐하께 받은 임무 때문입니다.”

“이, 임무라고? 설마?!”

“아닙니다.”

눈을 감고 조금 단호하게 말하자, 그제야 엔지는 조금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래, 그렇겠지? 설마하니 살 구멍을 알려줬다가 단숨에 빼앗다니, 그런 잔인한 수를 쓸 필요가 없겠지.”

어흠, 마른 헛기침을 한 엔지가 머뭇머뭇 말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레온네토스 네 호의는 감사하게 받아들이마. 네가 아니었다면 내 죄를 뉘우칠 기회조차 없었겠지.”

“형님, 전 단지 사후보고를 받았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수도에 계신 황제폐하와, 여기 있는 아렌이 주도한 것이죠.”

“…또 또 아렌, 그 자식인가?”

‘뉘우친다는 말은 어디로 팔아먹은 거야?’

이제는 아렌이 주는 것 없이 미운 엔지였지만, 아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렌이 은광산에 들른 건, 엔지를 만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다.

“…어이, 아렌 나리 아냐!”

갱도 아래에서 광부장 터커가 올라왔다.

땅속 깊은 곳까지 은을 찾아 파 내려간 터커는, 흙과 돌을 다루는 데 있어선 선페일 영지 안 제일이라 봐도 손색없었다.

‘이번 임무를 위해서, 반드시 포섭해야 할 인물.’

“이 벽지까지 무슨 일이야? 병사들까지 대동해선. 아예 여기 눌러앉기로 한 거야?”

“비슷해요. 몇 달은 여기에 줄곧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거든요.”

“…몇 달이나?”

“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마차와 함께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의 입에서 ‘없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 길을 만들기 위해 고용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터커는 태연하게 말했다.

“있지, 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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