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각 황자들은, 자신이 맡은 영역으로 원정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각자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는 비밀이지만, 숨겨진 동맹관계인 테오드릭의 사정은 달랐다.
아렌은 테오드릭을 불렀고, 그는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이 받은 임무를 말했다.
“…만월강을 건너는 교량 건설과 그 너머의 개간이라고요?”
사실상, 아티스의 옛 땅을 되찾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땅에 존재했던 왕국을 멸망시키고, 더불어 인근 땅을 경작조차 못하도록 황폐화한 것이 바로 과거의 제국이었다.
개간은커녕 만월강 인근으로의 접근조차 엄금했던 황제로서는 뜻밖의 임무였다.
‘…그럼, 남쪽과 서쪽도 마찬가진가?’
이웃한 국가와의 교류, 혹은 확장의 전초단계를 주문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어느 쪽을 택할지 황자에게 선택하게 했거나.
테오드릭은 자신이 받은 임무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그나저나, 뭔가 해줄 조언은 없나? 6년 전이라지만 그런 일이 있었던 곳인데,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는데.”
테오드릭도 아티스 옛 수도에 있었던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일찍이 그 원인을 제거했으니까요.”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사실 테오드릭이 걱정해야 할 건 사람을 홀리는 안개와 망자가 아니다.
수십 년간 수몰된 채 방치된 땅이 회복되려면, 마찬가지로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할 지 모른다.
물론, 테오드릭이 그 세월을 내내 동부에 박혀 있을 수는 없는 일.
황제가 원하는 건 수십 년간 이어질 토목 계획을 잘 수립하는 것이다.
그 일을 잘 해낸다면 황태자 후보로서의 테오드릭의 입지가 크게 올라,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테오드릭이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얄궂은 일이군.’
아렌의 눈에 비친바, 테오드릭은 여전히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당장 내일에라도 동부로 출발할 기세인데, 만월강을 넘은 뒤의 대책은 있습니까?”
테오드릭은 자신 없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첫입에 배부를 순 없으니 우선 무작정 부딪쳐보는 게 먼저 아닐까? 우선 내가 아는 가장 유능한 건축가들을 데려가긴 할 건데.”
“…실은, 레온나토스 전하의 가신 중에도 아티스 강 너머 출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법 지리에 밝죠. 만약 데려가신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거 고맙지. 현지 사람을 빌려준다면 주변 답사와 시행착오를 몇 배나 줄일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만월강 동부 출신인 핀의 고향이기도 했다.
큰 마을이나 도시 없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만월강 동부 유역의 사람들에게, 제국의 관리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을 것이다.
핀이 레온나토스의 가신이 된 것 역시 고향을 제국처럼 발전시키기 위해.
핀을 이번 테오드릭의 임무에 동참시키는 건 그의 목적에도 부합한다.
아렌은 첨언했다.
“레온나토스 전하의 구상은, 만월강 너머까지 모두 제국의 땅으로 편입하는 것입니다. 배척하는 것도, 제국의 식민지로서 차등을 두는 것도 아니라요.”
“만월강 너머라면… 동부 해안까지? 한 번에 너무 광대한 땅을 차지하는 건 아닌가?”
“레온나토스 전하는 제국의 국익 때문이 아니라, 아티스 왕국을 멸망시킨 당사자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거라고 생각하십니다.”
아티스 왕국을 멸망시킨 건 대확장 전쟁 당시의 제국이었지만, 제국은 치수 시설이 완전히 망가진 아티스 왕국을 재건하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해안선을 맞대고 있으면 타국의 침략에 대응하기 어려워서였지만, 실상은 전쟁 말기 수도 아트레움에서 폭주해버린 운명석에 의해서였다.
아렌과 레온나토스가 아트레움의 운명석 계약자를 제거한 다음에야, 제국은 만월강 동부를 제국령 안에 포함시킬 생각을 한 것이다.
“아마 직접 보면 놀라실 겁니다. 제국이 아티스 동부를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했는지를. 확실히 준비해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핀의 도움을 받으셔도 좋고요.”
“나야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설령 일이 잘못되어도, 어차피 난 황권 경쟁에 관심 없는 몸이다. 더 망치지만 않는다면 내 후임의 누군가가 뒷일을 제대로 해주겠지.”
“…역시 너무 일찍 포기한 것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철회한다면 저는 상관없는데요? 어차피 레온나토스 전하도 모르는 일이고.”
“웃기지 마!”
테오드릭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한번 뱉은 말을 그리 쉽게 물릴 것 같아? 게다가, 그때 난 내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지. 황제라니, 그딴 과분한 꿈은 이제 깼어.”
‘…꿈이라.’
“그보다도, 넌 괜찮은 거냐?”
“네? 저 말입니까?”
“그래, 네놈 말이다. 요즘 황궁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걸 본 적이 대체 언제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확실히.’
최근 부쩍 외유가 많은 아렌이었다.
황제의 명으로 태양교의 본산이 있는 선페일 영지의 감찰에 동행한 후, 수확제를 보내고 곧바로 레온나토스의 명으로 도국에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돌아온 상황이 지금이었다.
그리고 다시, 황제의 명으로 북부로 떠나게 된 것이다.
아렌을 황궁에서 떨어뜨리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럴 이유도 없고 보낸 사람도 황제와 레온나토스, 각기 다른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만 놓고 본다면 황궁이 마치, 아렌을 강한 자성으로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분위기가 싱숭생숭해지자 테오드릭이 환기하듯 물었다.
“그나저나, 모처럼의 원정인데 아렌 네 점괘라도 하나 받을 수 없겠나?”
“…제 점괘요?”
평소라면 그리 무리인 부탁도 아니다.
여느 때처럼 카드를 펼친 다음 한 장을 고르게 해, 그 카드에 맞는 아무 말이나 늘어놓으면 그만이니까.
점술을 믿는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일어난 사소한 사건조차 점괘에 끼워 맞춘다.
점술을 믿는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도 쉽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어쩐지, 아렌은 지금 점괘를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별일 생기지 않는다’라는 점괘를 내놓았을 때.
그걸 들은 직후 테오드릭이 검을 뽑아 자신의 배를 가르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점괘와 실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아렌의 추측이 맞다면 자신의 배를 찌르더라도 아렌의 점괘에 따라 ‘별 일 아닌’ 상처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점괘와 실제 사이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네게 오는 부담도 커지겠지.’
사경에 이르렀던 황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아렌이 빈사에 이르렀던 것처럼.
사소한 점괘가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잠깐만.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아렌은 테오드릭에게 말했다.
“어쩌면, 아티스 동부에서의 작업은 생각보다도 더디게 진행될지 모릅니다.”
“…뭐야, 점괘냐? 카드도 안 펼치고, 지금 갑자기?”
“그때는, ‘강물’이 해결책을 찾는 실마리가 될 겁니다.”
“강물?”
“네. 유념하시길.”
아렌은 무엇 때문에 작업이 느려지는지도, 무엇으로 작업 효율을 높이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아렌이 말한 건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였다.
예전의 점괘 방식이었다면 무엇이 방해되고 무엇이 해결책인지 직접 제시했을 것이다.
붉은 것을 조심하라거나, 높은 곳을 피하라거나, 등등.
방금 아렌이 한 방법으로 한 다리 건너서 주의를 주면, 설령 점괘에 언령이 작용해도 아렌에 닥치는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
‘잘 될지 어떨지는, 방금 생각한 거지만.’
시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
다른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레온나토스 역시 가신들과 떠날 채비를 했다.
대규모 공사까지 예견되는 만큼 레온나토스는 채비를 단단히 했다.
낮 안개 기사단 39인과, 200명이 넘는 정예 근위병.
근위기사 더글라스까지 포함된, 황궁 내에 레온나토스의 가신은 거의 다 동원된 대인원이었다.
남은 건 원정에 적합하지 않은 인원과, 아렌이 없는 동안 낙일관을 지켜준 몰디나 정도.
“그럼, 다녀올게요. 없는 동안 낙일관을 부탁해요.”
“무운을 빌죠. 당신의 점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쉽네요.”
몰디나는 아렌의 일을 점치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적당한 이유를 둘러댔지만, 사실은 아렌이 운명석 계약자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몰디나는 아르테, 라이안의 점괘도 보지 못한다.
‘한때는 몰디나도 운명석 계약자가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건 아르테가 확인해줬다.
몰디나는 아르테의 점괘를 볼 수 없었지만, 아르테는 몰디나의 속마음을 볼 수 있었으니까.
“제 점괘를 볼 수 없으면 레온나토스 전하의 점괘를 보는… 그것도 무리겠죠?”
몰디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도해봤지만… 아마 아렌 당신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요?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어차피 아렌이 곁에 있잖아요? 아렌 당신이 점을 보면 될 텐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렌은 다소 떨떠름하게 말했다.
*****
네 명의 황자가 거의 동시에 황도를 떠났다.
가장 마지막에 출발한 건 제1 황자, 라이안.
제일 웅장하고 화려한 행렬이 깃발을 앞세우며 황궁을 벗어났다.
멀어져가는 라이안의 행렬을 눈으로 마중한 채, 내원 시종장은 황제가 누워있는 내원의 병상으로 돌아왔다.
“지금 막 라이안이 황궁을 떠났습니다, 폐하.”
“빠르군. 가장 수가 많은 만큼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을 텐데.”
마치, 언제든 원정을 떠날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네 황자가 모두 황궁에 도착하면, 제국의 새 주인이 누구인지 비로소 결정되겠지.”
내원 시종장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실은 누구를 밀어줄지 이미 마음을 정하지 않았습니까?”
“…후.”
황제, 브륀할트 8세는 병상에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레온나토스 전하를 북부로 보내신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거죠.”
“그때 그 자리에 없었나, 형님? 난 분명 나이 역순대로 고르게 했는데.”
“레온나토스에게 선택지가 많아보였지만, 실은 외통수였죠.”
“…….”
“그리고, 정말 관심있는 건 레온나토스보다, 그 옆의 어린 가신 아닙니까?”
“역시, 형님 눈은 못 속이겠군.”
황자의 비서관이자 점술사인 아렌은, 여러모로 황궁 안에서 특이한 입지였다.
다른 인물이 황자의 행동을 좌지우지한다면 곧바로 황족능멸죄에 해당하겠지만, 점술의 탈을 쓰면 이야기가 다르다.
점술가의 말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 여흥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진지하게 믿고 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잘못 또한 실행한 본인이 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점술가가, 실제로 말도 안되는 점괘를 여러 번 내린 실력있는 점술가라면 더욱 그렇다.
“그 녀석을 전에 북부로 보냈을 때는, 산맥을 넘을 생각을 하지 않더군. 맡은 임무를 너무 성실히 행하더군.”
“감시관까지 붙이셨으니까요. 왜 일탈하지 않았느냐 묻는 건 지나친 처사죠.”
“그래.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겠지.”
아렌은 레온나토스와 함께 산맥을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제의 의도와 마주할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라이안을 상대할 수 있지.”
황제의 얼굴을 비추는 촛불은, 황제의 숨결에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