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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40화 (140/227)

#140화

‘그래. 차라리 마음에 들어.’

황제가 석연찮은 이유로 일방적으로 레온나토스를 지지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이유모를 호의에는 항상 ‘왜’가 따라붙으니까.

차라리 지금처럼, 레온나토스만 특별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는 편이 나았다.

“음. 별로 실망한 기색은 아니군.”

“네. 다른 황자들과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좋죠. 레온나토스 전하의 실력은 충분했고, 필요한 건 무대뿐이었으니.”

“…원래도 실력의 싹은 보였지만, 투쟁심이 부족한 아이였는데. 어느새 그렇게 커버렸더군.”

항상 무거운 가면 뒤에서 아이들을 바라봤지만, 그도 조금 특별하기만 할 뿐, 아이를 가진 아버지였다.

“아렌, 네가 그렇게 키운 건가?”

“키우다니요. 레온나토스 전하는 저와 같은 나이인데.”

“참, 그랬지.”

열여섯의 아렌을 눈앞에 두고도 황제 브륀할트 8세는 천연덕스레 말했다.

“속에 구렁이 다섯 마리는 삼킨 것 같아서, 눈으로 보고서도 가끔 아직 십 대라는 걸 잊는단 말이지.”

황제가 물었다.

“최근 황궁 안에 묘한 소문이 돈다고 들었다. 이번에 ‘처리’한 엔지와 관련해서.”

“…제가 퍼트린 소문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저절로 자란 소문들입니다. 어쩌면, 다른 황자들도 손을 썼을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리고, 그것도 네 계산 안에 들어 있었던 것 아닌가?”

“…….”

“황궁 안을 자진해서 혼란에 빠트리다니. 그것도 스스럼없이.”

“하지만 폐하께서도 별로 상관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 말이 맞아.”

황궁 안을 안정시키려면, 황제가 나서서 라이안을 황태자로 책봉하면 그만이다.

그러지 않고 라이안의 대항마가 될 황자를 자꾸만 육성하는 것은, 황궁 안의 안정보다도 제대로 된 황자를 뽑는 것을 더 위로 두고 있어서다.

“엔지는 날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 야망과 벌인 사건에 비해, 세부 내용이 너무 허술했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유도된 것처럼.

아렌도 동감이었다.

“맞습니다. 벌인 행동과 각오 사이에 적지 않은 괴리가 있었어요.”

‘그리고, 원래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을 짓이기도 했지.’

주변의 부추김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 자신은, 유도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의 교묘한 부추김이.

아무리 사소한 말이라도 지속적으로 들려오면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수백, 수천만 번 바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결국 바위를 뚫듯.

당시 엔지 주변에 있던 가신들을 조사해봤자 이미 늦었을 것이다.

엔지가 역모 혐의로 죽었다고 알려진 만큼, 가신들 역시 계속 황궁에 남아있긴 힘드니까.

‘…하지만, 역시 보통이 아니군.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죽이려 한 자인데, 그를 용서한다니.’

황제가 엔지를 용서해준 건, 그가 아들이라서가 아니다.

엔지가 역모죄로 순순히 처벌당하면, 황궁 안의 세력 균형이 너무도 손쉽게 라이안에게 가버리기 때문이었다.

‘라이안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막고 싶은 것, 은 아닌가.’

단지, 그가 너무 쉽게 황제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할 뿐.

“그나저나, 아쉽군. 아렌 네 점괘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그렇다고 억지로 점을 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송구스럽습니다.”

권위와 협박을 앞세워 무작정 점괘를 요구한다면 아렌도 결국 못 이기고 점괘를 뱉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 아렌의 점괘가 정말 제대로 된 점괘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황제가 원하는 건 누구나 뱉을 수 있는 평범한 점복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운명석 계약자 아렌이 내놓는 특별한 점괘였으니까.

황제는 병상에 누운 채 양 팔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양팔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내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무슨 약한 말씀입니까, 폐하. 아직 한창이십니다. 적어도 15년은 거뜬하실 텐데요.”

아렌의 말은 허언이 아니다.

실제로 황제는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도 여전히 황제였다.

비록 곁에 황태자가 된 라이안을 두고 있긴 했지만.

“…15년이라. 묘하게 구체적인 숫자로군. 그것도 네 점괘인가?”

‘아차.’

“-특별한 의미가 있진 않습니다. 단지, 그 정도는 능히 거뜬하실 것 같아서.”

“흥, 그런 걸로 해두지. 하지만, 점괘를 내놓지 못하는 점술가라.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겠지?”

“네. 지금은 잠시 천기(天機)를 잃었지만, 머지않은 시기에 되찾을 겁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의 언령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완전히 미지수였다.

언령을 적당히 조절해가며, 몸에 부담이 없는 정도가 어느 만큼인지 가늠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황제처럼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자의 점괘를 보는 것은 위험했다.

아렌이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으면서, 점괘에 언령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관찰하기 쉬운 사람이 가장 적합했다.

그런데, 병상에 누워있던 황제의 얼굴이 순간 짓궂게 변했다.

“…정말 괜찮겠나? 점괘를 내놓지 못하게 되어도?”

“네?”

“실은, 각 황자에게 곧 임무가 주어질 예정이거든.”

*****

황궁 안에 머물러 있던 외부의 사절들이 모두 돌아간 후.

황제는 자신의 병상 앞으로 네 명의 황자를 동시에 불러들였다.

라이안과 가웨인, 테오드릭과 레온나토스.

황명으로 네 황자 앞에는, 각기 다른 네 가지 임무가 마련되어 있었다.

자세한 임무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제국의 동서남북, 네 방향 중 한 곳에서 맡는 임무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네 방향이라면.’

동쪽의 엣 아티스 왕국 땅, 물에 잠긴 황무지.

서쪽의 라두크 도국 연합.

남쪽 국경의 아트마와 평화의 진리성전.

그리고 북쪽의 선페일 지방과 그 너머, 얼어붙은 산맥.

평소에도 각 황자들은 필요에 따라 여러 곳에 파견되었다. 열 살의 레온나토스도 동부 국경에 파견된 적 있으니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각기 다른 네 장소에 각각 한 황자씩 동시에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과연. 이제 제대로 황태자 감을 정해보겠다, 이건가?’

황자에 대한 자질검증을 보다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테오드릭이 손을 들었다.

“…저, 폐하. 왜 이 자리에 제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루카스 형님도 있지 않습니까?”

자신보다 동생임에도 레온나토스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명실상부한 황태자 유력 후보 중 한 명이니까.

하지만 제2 황자 엔지와 동급으로 평가받았던 제3 황자, 루카스 대신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을 어색하게 느끼고 있는 테오드릭이었다.

“루카스 말인가? 루카스는, 이제 더 이상 황권 경쟁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하더군.”

‘루카스가?’

의외였다.

그와 가장 치열하게 경쟁했던 건 바로 위의 제2 황자, 엔지.

그가 어이없는 이유로 사라지자 루카스 또한 황권 경쟁에 흥미를 잃은 듯했다.

원래도 황권에 큰 관심이 없었으니, 루카스가 포기한 자리에 자연히 테오드릭의 이름이 올라갔다.

‘-얄궂은 일이군.’

테오드릭으로선 어안이 벙벙할 일이다.

겨우 마음을 정리하고 황권을 포기했는데, 갑자기 이런 기회가 찾아오다니.

‘이 일로 다시 황권에 미련을 가지는 일은-’

아렌은 테오드릭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보곤 고개를 돌렸다.

‘-그럴 리 없나?’

테오드릭의 당황한 얼굴에는, 다시금 찾아온 기회에 대한 열의가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밭과 같아서, 이미 경작을 포기하고 방치해버린 땅에 씨를 뿌려도 쉽게 싹이 돋아나지 않는 것과 같은지도 모른다.

테오드릭이 겨우 납득하자 황제는 이어 말했다.

“네 황자는 각기 다른 한 방향을 정해, 그곳에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누가 어느 방향을 고를지는, 가장 나이가 어린 자부터 선택하는 게 공평하겠지.”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레온나토스에게로 향했다.

뜻밖의 말을 들은 레온나토스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황자들보다 조금 뒤 가신의 자격으로 있는 아렌을 의식하며 레온나토스가 말했다.

“…혹시, 가신들과 상의 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불허한다.”

황제는 선을 그었다.

어디까지나 황자 자신이 선택하라는 뜻.

이 정도 선택조차 혼자 힘으로 하지 않는다면, 차후 꼭두각시가 되기에 딱이다.

“…그렇다면.”

각 방향에서 무슨 업무를 하는지는, 레온나토스는 모른다.

하지만 이미 북부의 은광으로 제2 황자 엔지를 빼돌린 상황.

다른 황자를 그 방향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아렌이 선택할 방향은 한 곳뿐.

“그럼 전, 북부를 고르겠습니다.”

“음.”

고개를 끄덕인 황제.

아렌은 알 것 같았다.

‘…선택을 유도당했군. 자연스레 레온나토스에게 먼저 기회를 줬고, 레온이 고를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어.’

그다음 순번인 테오드릭은 아티스 폐허가 있는 동부, 제4 황자 가웨인은 서부를 골랐다.

마지막의 라이안에게 남은 선택지는 자연히 남부, 아트마 교국이었다.

아렌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드릭은 레온나토스가 동부에서 한 모험을 귀담아들었었지. 이 기회에 그곳이 어떤 곳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가웨인이 서부를 고른 것도 이해된다.

이미 제1 황자와 도국 연합 사이는 끈끈했다.

이번 임무에서마저 라이안이 서부를 고르게 해 그사이를 더 돈독하게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반면, 마지막으로 남은 라이안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라이안은… 만족스러운가?’

아렌은 몰래 라이안의 안색을 살폈지만.

“…….”

남부로 향하게 된 라이안의 표정을 읽기란 여전히 쉽지 않았다.

*****

레온나토스와 아렌은 집무실로 돌아와 황제의 인장으로 밀봉된 서신을 뜯었다.

“…….”

북부를 선택한 레온나토스가 받은 임무는, 얼어붙은 산맥을 통과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서신의 내용은 아렌도 뜻밖이었다.

‘…길을 만들어? 산맥 너머로 향하는?’

이전에도, 산맥 너머로 향하려는 시도는 몇 번이나 있었다.

산맥 너머에서 살아가는 유랑족들도 소수 아래로 넘어오기도 하는 만큼, 산맥을 통과하는 길 자체는 존재한다.

그럼에도 황제가 ‘길’을 만들라고 한다는 건-

“…마차와 군대가 지날 수 있는 본격적인 관도를 의미한다고 봐도 되겠지?”

레온나토스의 물음에, 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건 곧, 산맥 너머 북쪽 땅에 대한 개척을 의미했다.

‘그게, 의미가 있나?’

물론, 근본적인 의문을 벗기엔 역부족이었다.

제국이 지금껏 얼어붙은 산맥 너머를 정복하지 않은 건,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탐험가도 대륙 북쪽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오직 설원과 빙판만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에서는, 생활은커녕 생존조차 사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은 이번 임무가 그리 싫지 않았다.

모든 운명석은 북쪽 끝, 산맥 너머에서 내려온다고 알려졌다.

북부로 연결되는 길을 건설하면, 운명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산맥을 넘는 관도를 만드는 일에 얼마나 많은 인력이 소요될지는 미지수지만, 걱정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역시 북쪽의 임무는 저희가 적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렌?”

아렌은 생글 웃으며 답했다.

“공교롭게도 저흰 선페일 영지에 일을 도와줄 사람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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