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아렌이 황궁에 퍼트린 소문은 라이안과 황제가 악역, 레온나토스가 선역인 내용이었다.
물론, 단지 진실과 거짓을 뒤섞는 게 목적인 이상 선역과 악역의 위치는 뒤바뀌어도 상관없다.
아렌의 생각대로, 소문은 곧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져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레온나토스가 악역이고, 사실은 가웨인이 흑막이라는 설.
최근 존재감이 희박했던 테오드릭이 위기감을 갖고 내지른 회심의 음모라는 설.
사실은 엔지가 정말 죽은 것이 맞고,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가짜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역 음모론 설까지 돌았다.
이쯤되면 가장 먼저 나돌았던 소문을 가려내기조차 어렵다. 황궁 가장 아래에서 일하는 궁인들 사이는 여러 소문들로 금세 어지러워졌다.
아렌에게는 반가운 일이다.
‘그래. 황궁 안은 지금처럼 조금 어지러운 정도가 딱이지.’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은 누구보다 잔잔한 삶을 원했지만, 그 끝은 누명과 죽음이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혼란이 더욱 안전한 상태라는 것을, 아렌은 한번 죽어보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황궁 안에 소문이 나도는 사이, 어느덧 황제의 위문차 방문했던 사절들은 하나둘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방문을 허락한 건 여전히 제국이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들이 머무르는 동안 나돈 흉흉한 소문으로 황궁 안의 복잡한 정세까지 모두 보여준 꼴이 되고 말았다.
아렌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세밀 메렌치와 듀란 우피치를 맞이했다.
세밀이 질린 듯 물었다.
“황궁 안은, 항상 이런 분위기야?”
“음, 대체로요? 지금이 유독 심하긴 하죠.”
“…….”
세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듀란이 말을 이었다.
“역시 고생이 많네요. 이참에 카르도나에 취직해보겠어요?”
“굳이 그렇게까지야. 직장이 다 똑같죠, 뭐.”
도국 연합의 구심점 도시들의 유력자인 그녀들과 레온나토스는 이미 한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고작 한두 차례 만남에서 얼마나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레온나토스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렌은 못내 아쉬웠다.
“역시,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더 전하를 만나뵙는 게 낫지 않아요? 아니면 전하의 서신이라도 준비해서-”
“됐어. 어차피 제안은 이제부터 할 거고, 레온나토스 황자를 만나본 건 반쯤은 형식이었으니까.”
도국 연합의 위문단은 두 도시만 온 것이 아니다.
이전엔 헬데움과 카르도나가 도국연합의 명실상부한 맹주였지만, 또 다른 맹주국이었던 레데의 전쟁으로 인해 그 위치가 위태로운 상태.
두 도시가 주춤한 틈을 타 새로운 맹주 자리를 노리는 다른 도국들 역시 황궁 안에 있었다.
“다른 도시들도 결국, 한 황자를 어떤 형식으로든 지지할 거야. 제국의 황자와 연을 만들어둬서 나쁠 것도 없고, 혹시나 그가 황제라도 된다면 제국 전체와 강력한 동맹을 맺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거기에, 아렌은 카르도나에서 전쟁 영웅이나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레온나토스 황자를 지원하는 건 사실상 당연한 일이겠죠. 다른 도국들도 뻔히 예상할 테고요.”
말하자면, 황자들끼리의 경쟁은 도국들의 간접 대리전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비록 그 지위가 위태롭다지만 도국 연합의 패권국 두 도시가 레온나토스를 지지한다는 건 꽤나 좋은 신호였다.
“그럼 가볼게. 라이안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게 되면 꼭 연락해!”
“천년궁의 맹인 사서, 꽤 경이롭더군요. 어수선하지 않을 때 한번 초청하죠. 그럼.”
듀란과 세밀이 방을 나갔다. 그들은 사절단과 함께 오늘내일 중으로 황궁을 떠날 터.
교국의 사절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르테에 얼굴이라도 비출까 했지만, 아렌은 금방 단념했다.
평소에도 아렌이 혼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건 눈에 띄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
“…….”
아렌이 어디를 가든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이 꽤 부담스러웠다.
아렌이 황궁 안에 퍼트린 소문은, 조금씩 내용을 바꾼 채 다시 퍼져나갔다. 소문의 변형속도가 너무 빨라, 이제는 아렌이 따라갈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몰래 소곤거려야만 하는 소문치고는 너무 변화가 빨라. 소문 뒤에는 다른 황자들의 대응도 있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겠지.’
여러 버전으로 나뉜 소문들을, 저마다 자신에게 웃어주게 퍼트리는 형국이었다.
이미 황제 시해범이 잡혀 참수당한 이후이기에 황궁 안의 독기가 한풀 꺾여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아직 황제 시해범이 잡히지 않았던 때에는 너무 삼엄해, 괜히 의심을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시기에야말로 점괘에 더욱 의존한다.
지금 아렌이 점판을 열면 사람들로 미어터질 것이다.
하지만.
‘다시 코피 흘리며 쓰러지는 건 사양이야.’
무심코 황제가 생환할 것이라 예언해버렸던 때, 아렌은 황제가 살아났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픽, 쪼개진 장작개비처럼 쓰러려버렸다.
그리고 일주일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정말 비유가 아니라 죽을 수 있다.
능력의 시험은 물론 필요하지만, 별것 아닌 일에 부작용이 있을지 모를 점괘를 남발할 수는 없었다.
‘…계기가 필요해. 꼭 필요한 일이면서, 내게 부담이 크지 않을 점괘가.’
*****
황궁 안에서 지나치다 만난 황제들은 노골적으로 아렌을 외면했다.
아렌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한 톨의 온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번 엔지 황자의 축출은 사실상 아렌의 지목으로 이뤄진 일, 라이안과 손을 잡고 미래의 경쟁자를 직접 제거했다는 의혹이 황자들 사이에서 도는 것이다.
‘…어느 정도 사실이니 더 괴롭군.’
적어도 황궁 안에서 아렌에게 중립 이상의 시선을 보내는 황자는 몇 없는 모양이었다.
“네 짓이냐?”
심지어, 황궁 외원의 복도를 지나가다 만난 가웨인조차 다짜고짜 물어왔다.
“…무엇이 말입니까?”
“황궁 안에 떠도는 소문 말이다. 정말 진위가 있는 말인가 말이다. 소문의 진원지가 너라던데.”
“글쎄요. 이젠 황궁 안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저입니까?”
“모를 일이지. 아니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게 나을 텐데.”
“그럼 지금 말씀드리죠. 아닙니다.”
“소문을 퍼트린 것이? 아니면 엔지 관련된 일이?”
“둘 다 말입니다.”
“…….”
“…….”
복도 한중간에서 가웨인은 아렌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고, 아렌 또한 그에 응했다.
눈을 피하지 않은 채 한참 지켜본 둘.
먼저 포기한 건 가웨인이었다.
“-젠장, 보통은 이 정도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내던지는데.”
“다른 사람 윽박만 질러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법이죠.”
“…맞는 말이다.”
가웨인은 피식 웃었다.
“최근 황궁 안에 도는 소문들은 들었나?”
“…소문이라. 황궁 안에 소문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말하는지는-”
“폐하의 시해범은 죽은 줄 알았던 고드프리. 엔지는 사실상 조력자일 뿐이었다고.”
그건 또 새로운 버전이지만, 엔지가 누명을 덮어썼다는 소문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엔지가 억울하다면, 그를 섬기던 부하들 역시도 훨씬 홀가분하게 합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것도 모르겠군. 엔지 녀석이 생전 남겨놓은 서신에, 자신의 사후에 레온나토스를 도우라 명시되었다던데.”
“-그렇습니까?”
“이것조차 시치미냐?”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엔지 전하가 생전 레온나토스 전하를 몰래 흠모하신 모양이죠.”
“…….”
가웨인은 고개를 저었다.
“징글징글한 놈이군. 됐어. 더는 묻지 않으마.”
그리곤,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 요즘은 점을 안 보나?”
“…원인 모를 코피로 쓰러졌던 게 바로 얼마 전이라, 당분간은 좀 조심하고 싶습니다.”
가웨인의 눈이 빛났다.
“뭐냐. 마치 그 코피와 점괘가 관련 있는 듯한 말투인데.”
“-관련 없을 수 없죠. 사람을 마주하고 극도로 집중해야 하는 일인데.”
“…그런 건가?”
가웨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렌을 주시했다.
실로 궁색한 둘러대기였지만, 의심하는 가웨인조차 점괘와 코피 사이를 연결 짓는 건 힘들 것이다.
아렌은 가웨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물었다.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셨더군요. 한번 방문하셨습니까?”
“…아, 그래. 물론이지.”
‘…뭐지?’
대강 한 질문이었는데, 가웨인의 대답에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나?’
아렌은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을 캐내기 위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폐하의 병상은, 자주 찾으십니까?”
“황궁 내원 아닌가. 함부로 발을 들이기 적합지 않은 곳이라서, 한두 번 정도다만.”
‘진실.’
“폐하께 황궁 안 소문에 대해 여쭤보셨습니까? 폐하라면 소문의 진상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 수도 있을 텐데요.”
“글쎄. 이제 막 병상에서 눈을 뜬 분께 무슨 말을 하겠나. 환자는 최대한 심신을 안정하는 것이 제일이지.”
‘진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반대로, 황제 폐하께서 전하께 따로 말씀하신 것도 없겠군요.”
“그야 물론이지.”
“…….”
가웨인은 적당히 대답했지만, 아렌은 약간의 어색함을 곧바로 잡아냈다.
“…과연, 그렇군요.”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렌은 다시 황궁 내원으로 불려 들어왔다.
표면상의 이유는 내원 시종장의 부름이었지만, 실상은 아직 병상에 있는 황제와의 단독 알현이었다.
아렌이 내원에 자주 드나든다는 건 이미 황궁 전체에 알음알음 퍼진 사실이었고, 사람들은 아렌의 방문을 레온나토스의 대리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아렌은 이미 선조치 후보고 수준으로, 모든 사안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었지만.
내원 시종장은 태연하게 내원에 발을 들이는 아렌을 보면서 어이없어했다.
“…담도 큰 놈이군. 아무리 이쪽이 부렀다지만, 부른다고 덥석덥석 들어오나?”
“하지만 오지 않으면 그건 더 큰 불충 아닙니까?”
“누가 오지 말라고 했나? 황제 폐하께서 친히 부르신 자리가 얼마나 영광된 자리인지 자각하라는 말이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냐.”
“제가 황제 폐하의 부름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폐하께서 저를 불러주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만.”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아렌은 가볍게 묵례한 다음 황제가 누운 병상 앞으로 갔다.
황제는 전보다 아주 조금, 하지만 확실히 안색이 좋았다.
점점 더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황제는 병상에서 조금 몸을 일으켰다.
“왔나, 아렌.”
황제가 아렌을 급하게 부른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갔다.
“갑작스럽지만, 네게 점괘를 부탁해도 되겠나?”
‘…역시.’
황제는 이미 아렌의 점괘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렌에게 대현자 솔티르의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보아, 아렌이 운명석 계약자인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야.’
“아뢰기 황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황명이라도 말이냐?”
“점괘란 미래의 장막을 살짝 들추는 일입니다. 하고자 한다고 마음껏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닌지라.”
“…하긴. 아쉽군.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렇군요. 실은, 저도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쭈어? 짐에게?”
“병상에 계실 때, 가웨인 전하도 따로 불러내신 적이 있으시더군요.”
“그야 물론이지.”
“거기에, 몰래 지시까지 내리시지 않으셨습니까?”
“…잘 아는군.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거짓말.’
황제가 지금은 다친 짐승이지만, 그는 조금만 방심하면 숨통을 물어뜯기는 맹수다.
황제는 아렌만을 불러 이것저것 공작한 것이 아니었다.
가웨인, 혹은 다른 황자들까지 불러 그들에게도 각기 다른 일들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황제는, 어느 황자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가 레온나토스를 도와 가웨인의 대항마로 삼으려 한 이유는, 가웨인이 너무도 돋보였기 때문에.
황제는 오직, 더 치열한 황권 경쟁을 통해 가장 완벽한 황태자를 옹립할 생각뿐이었다.
‘최적의 황태자를 위해선, 황궁 안의 혼란 따위는 사소한 것이라는 건가.’
제국의 최고 권력자다운 제멋대로의 생각.
하지만 아렌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