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황제의 전언은 사실상, 제2 황자 엔지를 용서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엔지는 이미 한번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지만, 실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자 버렸던 생존본능이 다시 살아 꿈틀대기 시작했다.
한번 버렸다가 되찾은 삶이니 더 집착이 큰 법이다.
한동안 엔지를 지배했던 체념이 사라지자, 그의 본심이 드러났다.
“…아렌. 난 살고 싶다.”
“네.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살아만 있을 뿐, 영영 권력에서 멀어지는 길일 텐데 그건 괜찮습니까?”
엔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게 처한 상황 안에서, 적어도 난 황제가 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 무모했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오히려 후련해. 미련은 없다.”
‘사실은, 거의 성공할 뻔했지.’
비록 황제의 암살이 곧바로 엔지의 즉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황제가 죽었다면 어떻게든 엔지가 원하는 결말로 연결되었을지도 모른다,
계획이 실패한 건 오직, 아렌의 점괘에 깃든 언령이 황제의 죽음을 막았기 때문.
이제 아렌은 자신의 점괘에 언령의 힘이 깃들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부작용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에,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하지만.
‘사실상 성공이었으니, 그렇게 무모했던 계획만은 아닐지도.’
아렌이 물었다.
“만약, 황제 폐하를 해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 뒤에는 어쩔 생각이었습니까?”
“…….”
“제대로 대답하시는 게 유리할 겁니다, 엔지 전하. 그건 황제 폐하의 뜻이기도 하니까요. 폐하께서는 전하를 사면하겠다 말씀하셨지만,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조사받는다는 데 한해서에요.”
“…없어.”
“이제 와서 숨겨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엔지 전하.”
“아니, 정말로 없다고!”
뜻밖의 대답. 아렌의 눈이 커졌다.
“어차피 이대로는 가망이 없기에 한번 위험한 다리를 건넌 것뿐이야! 치밀한 계획? 황제를 암살하는 데 치밀한 계획이 필요할 것 같나?”
“…필요 없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정원사 하나를 포섭해 금면병으로 위장시켰지만, 단상에 서기 전 마지막으로 가면만 벗겼어도 작전은 실패야!”
‘…그러니, 암살이 성공한 이후에도 치밀한 계획 따위는 없었다?’
아렌은 아까 했던 생각을 취소했다.
엔지의 작전은, 상상 이상으로 더 무모하고 얄팍했다.
어차피 망했으니 모 아니면 도의 작전.
이 정도로 충동적인 작자라면, 설령 살려주더라도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해 보였다.
“우선 정리해보죠. 황제 폐하께선 전하를 살려주시겠지만, 황궁 내에 정식으로 공표하지는 못하겠죠. 대역죄인을 그리 간단히 사면해서는 본보기가 되지 않으니.”
“그야 그렇겠지.”
“결국은 전하를 처형한 것으로 위장해야겠죠. 그러기 위해선 레온나토스 전하 외의 다른 황자가 즉위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즉위하든 이번 사면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과연.”
여기에서 엔지의 눈이 빛났다.
황제와 아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난 대목이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엔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살고 싶다고 마음먹은 이상, 엔지는 살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쓸 것이다.
“…나를 따르던 자들에게는 내 처형식이 있기 전 언질해 놓지. 황자 레온나토스를 지지해달라고. 물론, 그중 몇이나 따르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거면 충분합니다.”
엔지를 따르는 자들은, 라이안이나 가웨인을 섬길 만큼 유능하지는 않지만, 섬기는 자를 황제로 만들어 한 몫 두둑이 잡고는 싶은 부류였다.
가뜩이나 섬기는 자가 역모로 몰려 앞날이 불안한데, 처형장에서 사라질 자의 명령을 몇이나 들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상관없겠지.’
엔지가 마지막에 레온나토스를 지지해달라는 서신이 곧 대세의 방향을 설명한다.
힘은 힘을 부르고, 엔지의 마지막 서신을 받아든 자들 중 상당수는 지금 가장 세의 흐름이 좋은 아렌의 편에 설 것이다.
아렌이 말했다.
“다만… 황제 폐하의 뜻이야 그렇다 쳐도,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대역죄인인 당신을 숨겨주는 것은 지나친 모험입니다. 건너기 어려운 다리인 만큼, 조금 더 확실한 이득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엔지는 눈을 찌푸렸다.
“…설마, 돈이라도 달라는 거냐? 마침 은닉한 재산이라면 얼마 정도-”
“돈은 필요 없습니다.”
아렌은 간결하게 말했다.
“북부에 레온나토스 전하 소유의 은광이 있으니까요.”
“큭, 그래. 그것도 있었지.”
“네. 저희에게 돈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건, 믿을 만한 관리자지.”
“…뭐?”
아렌은 정식으로 요구했다.
“마침 선페일 영지에 있는 은광의 관리자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제국의 북부 끝 오지이니만큼 다른 이의 눈도 덜 미치겠지요.”
“…지금 날, 북부 끝 황량한 오지로 보내려는 건가? 그 춥고 척박한 땅에?”
“네. 워낙 거친 땅이라 밀정조차도 오고 가지 않겠죠.”
“…….”
북부의 끝, 선페일 영지.
평소의 엔지 황자라면 절대로 발을 들이지 않을 땅이었지만, 그렇기에 그곳이 가장 눈에 덜 띄는 장소라는 것을 엔지도 겨우 받아들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렌은 물소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뿌득뿌득 손에 꼈다.
“자, 그럼.”
“…아렌?”
“죄송합니다. 사심이 깃든 건 아닙니다.”
엔지가 불안하게 쳐다보는 사이.
아렌의 주먹이 엔지의 얼굴 한복판에 꽂혔다.
*****
제2 황자 엔지의 처형은 극비리에, 졸속으로 이뤄졌다.
보통 대역 죄인에 대한 형은 대대적으로 치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의 경우 범인은 황자.
직계 황족이니만큼 내부적으로 쉬쉬하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다.
아직 황궁 내에 타국의 위문단이 머무르고 있다면 더더욱.
물론, 눈치가 빠른 자들은 보이지 않는 이면에 무언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벌써 집행이 끝나 핏자국만 남아있는 형장을 보면서,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죽은 사람은 누구지?”
“수형도(受刑島)에서 데려온 흉악범입니다. 부녀자 네 명을 살해한 살인마죠. 엔지 황자와 체격이 가장 비슷했습니다.”
엔지 황자는 형 집행 직전까지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어느 위병에게도 얻어맞은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엔지는 의연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사이, 마찬가지로 얼굴을 곤죽으로 만든 대역이 들어왔다.
보는 눈이 극도로 적은 처형장에서 둘을 바꾸는 건 쉬웠다.
“엔지 전하는 그대로 선페일 지역으로 올라가는 중일 겁니다. 호위 겸 감시를 붙여뒀으니 신변엔 문제 없겠죠.”
“…하지만, 엔지 형님을 위해 다른 이가 죽었구나.”
“수형도에 있는 모두가 죽는 게 더 나은 흉악범입니다. 지금껏 살려둔 이유도 죽여선 안 되어서가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형벌을 주기 위해서이니,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엔지 형님이 북부에서 은광의 관리라니. 괜찮을까?”
외딴곳에서 큰돈을 만지는 일이다.
그곳에서 슬금슬금, 다시 야망을 가꿀지도 모른다.
“확실히, 엔지 전하께 은광의 관리를 맡기는 건 꽤 부담입니다. 북부에 있는 태양교 대주교 역시 꽤나 야망 있는 자이니까요. 하지만 태양교와 엔지, 둘 사이를 조금만 이간질하면 괜찮을 겁니다.”
북부 끝에 거점을 둔 태양교는 이전에 비해 훨씬 온건해졌지만, 태양교의 교주는 여전히 야망 넘치는 자였다.
그들에겐 그들이 온건해진다는 한에서 북부에서의 교세 확장을 허용하고 지지한다는 것이 레온나토스 공식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간이라면?”
“엔지 황자에겐 태양교 교단 한복판에서 고드프리 황자가 죽었다고 귀띔해줬습니다. 적당히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투로요.”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엄연히 사실이죠. 조금은 각색되었을지라도.”
고드프리의 죽음은 황궁 내에서도 쉬쉬하는 분위기다.
굳이 덧날까 봐 종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황실에서 고드프리에 대해 불편한 심기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고드프리가 죽었고, 그 책임으로 이전의 선페일 영주가 축출되었지만, 아렌이 엔지에게 알려준 건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말이었다.
“황자는 태양교 신전 한복판에서 죽었고, 그 직후 태양교는 저희와 신뢰 관계를 쌓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요. 여기까지 들었을 때, 엔지 황자가 무엇을 상상할까요?”
“태양교가 황실의 앓던 이를 뽑아 가져다 바쳤고, 그 대가로 태양교의 일들을 묵인해준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죠. 하지만 그 착각이 엔지 황자로 하여금 허튼짓을 못 하게 할 겁니다.”
반면 태양교에게도 같은 말을 전달할 것이다. 역모에 휘말린 자를 은광 관리자로 보내니 잘 살펴달라는 서신 한 장만 보내도, 태양교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황자를 지켜볼 것이다. 이전 비슷한 일에 휘말려 본 경험이 있는 만큼 다시금 같은 상황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테니.
선페일 영지로부터는 지금도 정기적인 보고를 받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엔지 황자가 남기고 간, 황자들 중 두 번째로 많은 가신들을 어떻게 온전히 흡수하느냐는 점입니다.”
“어렵겠나?”
“어느 정도는 흡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충성에도 어느 정도의 명분은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엔지 황자가 남긴 전언을 얼마나 충실히 따를지는 솔직히 미지수입니다.”
단지, 엔지가 두 번째 황자였기에.
오직 그 이유만으로 따랐던 자들이다.
라이안이 실각하고, 두 번째 황자라는 입장을 이용해 어부지리로 황제에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오직 이 상상만으로 엔지에게 붙은 기회주의자들
그들이 엔지보다 명백히 뛰어나지만, 열두 번째 황자라는 입장의 위태로운 배에 얼마나 올라탈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이쪽은 엔지 황자를 빼돌렸다는 정치적 부담도 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비슷한 비율로 받아들여선 손해인 장사죠.”
“그렇다고 해도, 이쪽에서 섣불리 움직일 순 없어.”
레온나토스가 지적했다.
자칫 레온나토스 측에서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간, 엔지와의 관계가 밖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만큼 조심스레 접근해야 했다.
드러나선 안될 진실을 품고 있는 만큼,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것이 못내 불쾌한 아렌이었다.
“…답답하군요. 차라리 다 밝힐 수도 없고.”
“그러게. 숨기는 게 있다는 건 꽤나 거추장스러운 일이야.”
“…?”
아렌의 말에 레온나토스도 맞장구쳤지만, 정작 말을 한 아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아렌?”
숨기려고만 하니 답답했다.
아렌이 떠올린 건, 발상의 전환이었다.
“숨겨야 하기에 운신이 어렵다면, 차라리 전부 드러내는 건 어떻습니까?”
*****
얼마 뒤.
황궁 안에 알음알음,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비공개로 처형당한 엔지 황자는 빈민가에서 데려온 대역이고, 실제 엔지 황자는 동쪽 국경을 넘어 옛 아티스 영토로 넘어갔다는 소문이었다.
엔지 황자는 결백함에도 황제와 라이안의 술수에 놀아났고, 그것을 레온나토스가 손을 써 구해줬다는 묘하게 구체적인 정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허구와 진실이 뒤섞인 소문은 아렌이 퍼트린 것이었다.
일말의 진실이 섞여 있기에 소문은 현실감을 띄고 있었고, 황제와 황자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만큼 그들은 음지에서만 그 소문을 향유했다.
음모론은 음지에서만 소비되었고, 황궁의 그늘에서 실컷 소문을 탐닉한 궁인들은 만족하고 다시 자신의 일을 하러 갔다.
누구도, 소문의 진상을 알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