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황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이안 황자는, 지금까지 엔지를 이용하고 있었다. 엔지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조차 자각을 못 했겠지만.”
엔지의 불행이 있다면, 그건 라이안 바로 다음, 두 번째 황자로 태어난 점이었다.
황자들 중 라이안을 가장 오래 보고 겪은 자. 은연중에 라이안의 대항마는 자신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자라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라이안은 결코 한 분야에서 수석을 차지할 재능은 없었지만, 모든 분야에 두루 차석을 차지할 역량은 충분한 자였다.
반면 엔지는 문무, 어느 쪽으로도 범용한 자. 동생들마저 점점 자신을 추월하자 조바심에 사로잡힌 것도 당연했다.
‘…원래 엔지는 이딴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엔지 황자의 역모 따위,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역사다.
지금까지 바뀐 역사는 무수히 많고, 그 분기점이 어디서부터인지는 가늠조차 못 하는 일들이 많지만, 이번 엔지의 역모만큼은 제법 확실하게 유추 가능했다.
‘레온나토스가 자신조차 추월하고 유력한 황권주자가 되니, 조바심이 난 거겠지.’
수확제에서 있었던 모의전에서, 모든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레온나토스에게 패배한 것 또한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제3 황자 루카스 또한 엔지의 돌발 행동을 주의했던 바.
아렌은 레온나토스에 대한 호위를 더욱 강화했지만, 설마하니 표적이 레온이 아니라 황제일 줄은 몰랐다.
수확제 이후에도 아렌이 계속 황궁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엔지의 폭주하는 열등감을 미리 간파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시기 아렌은 도국으로 유학을 간 직후였다.
물론, 이 사실들로 엔지 황자의 죄를 무마할 수는 없다.
한번 어긋난 톱니바퀴는 점점 간극을 벌려 나가, 이제는 먼젓번의 삶을 통해 앞으로의 일을 유추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까지 되었다.
아렌은 방금 황제가 한 말을 다시 곱씹었다.
‘…엔지를 용서하고, 그를 포섭해라? 그 휘하의 부하들까지 전부?’
마치, 지금 아렌과 테오드릭의 관계 같았다.
‘설마하니, 그것까지 알고 있지는 않겠지?’
그것도 모를 일이다.
테오드릭과의 비밀 연합은, 아렌의 주인인 레온나토스조차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아렌으로선 가장 숨기고픈 사안이지만, 황제는 황궁의 주인이다.
황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황제보다 더 잘 아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렌은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특정 황자의 편을 들어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황궁의 법도에 위배됩니다.”
“그런가? 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는데. 단지 날 죽이려 한 아들을 일단 용서하고, 그를 따랐던 자들 역시 용서해주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야.”
“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황권에 가장 가까운 황자는 단숨에 레온나토스 전하가 되겠죠. 라이안 전하가 아니라.”
아렌은 다시금 생경한 눈으로 병상 위 초로의 노인을 바라봤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생환해온 황제의 안색은 여전히 거무죽죽했지만, 아렌으로선 도저히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생사의 문턱에서 이제 막 생환한 늙은이지만, 역시 제국의 황제라는 건가?’
황제의 진의를 알기 위해, 아렌은 그의 표정에 집중했다.
사경을 헤맨 자의 표정을 기를 쓰고 읽으려 드는 것이 묘했지만, 지금 황제가 저런 말을 하는 의도가 분명 있을 터였다.
“…여기엔, 저희뿐입니까?”
“짐이 아는 바로는 그렇다네.”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을 물린 황궁 내원 안 병실은, 황궁 안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뜻이다.
아렌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는, 라이안 황자가 황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까?”
“…….”
황제는 말없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아렌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차고 넘친다.
잠시 뒤, 아렌의 질문에 황제는 역으로 질문했다.
“…만약, 누가 보아도 황제감인 자가 현 황제를 죽이고 즉위하려 한다면, 그는 황제의 재목이 될 수 있는가?”
“…….”
병상에 있는 황제가, 그 신하에게 할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한 아렌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게 봐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렌이 한 대답 역시 신하가 황제에게 할 대답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심기는 그리 나쁘지 않은 듯했다.
신하된 자가 황제를 죽이려는 행동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하로서의 일.
황제는 제국법 위에 군림하고, 이전 황제에 충성해야 할 의무 또한 없다.
신생 황제가 이전 황제를 죽인 것 자체를 문책할 사람은 법률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 성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황제 암살의 죄 또한 없없던 것이 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엔지가 진범이라 해도, 짐을 죽이는 데 성공하고 황제가 된다면 그 죄는 없는 것이 되지.”
“하지만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엔지 황자는 제국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것을 용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진 않지 않습니까?”
역모에 가담한 자의 죗값이 변변치 않다면, 그건 황궁 안 숱하게 있을 불온분자들을 부추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 엔지를 공식적으로 사면했다간, 신료들과 황자들의 반발을 공식적으로 사게 되겠지.”
‘지금 그걸 아는 양반이-’
“그러니, 엔지 황자의 사면과 포섭은 극비여야만 하네.”
“…….”
너무 달콤한 제안이다.
그리고, 너무 입에 단 것은 대부분 독이다.
아렌은 상황을 정리했다.
‘…황제의 제안은 어디까지나 구두(口頭)일 뿐, 언제든지 부인할 수 있어. 게다가 역모자인 엔지의 세력까지 모두 포섭하라고? 자칫하다간 엔지의 역모에 다시금 휘말릴 수도 있어.’
“…….”
지금껏 선조치 후보고로 수많은 결정을 내려온 아렌이지만, 이번만큼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비공식적이라도, 분명한 황제의 지지 선언이야. 약간 흘리는 것만으로도 라이안 못지않은 조력자들이 몰려들 테지.’
아렌은 답했다.
“…방금 말씀은, 저 혼자 경솔히 답할 수 없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역시 레온나토스와도 이야기해봐야겠나?”
“지금은 아닙니다.”
레온나토스와도 이야기가 되어야겠지만, 그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다.
“…엔지를 만날 건가?”
“어떤 논의도 그의 동의 없이는 무용하니까요.”
황제가 거절할까 마음이 조마조마한 아렌이었지만, 황제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마침 잘 됐군.”
*****
“…왜 온거냐.”
아렌을 마주한 제2 황자, 엔지는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창살이 있고 살풍경한 방. 하지만 그 안에는 탁자도 있고 모피로 된 발깔개도 있었다.
분명 감옥 안이었지만, 감옥 가장 깊은 방 안은 단출하지만 살 수 있는 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고위 귀족이나 황족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으니, 그들을 가둘 장소 역시 필요하다.
자신을 가둔 방 안까지 들어온 아렌을 보면서도, 엔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반감을 겉으로 표출만 할 뿐.
의외로 자신의 최후를 담담히 받아들인 모습이었다.
비록 만들어진 증거라지만, 엔지는 황제 시해범이 맞았고 그 최후를 담담히 맞이할 뿐.
곧 눈앞으로 다가올 극형보다, 엔지는 아렌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더욱 불쾌한 모양이었다.
일개 가신인 아렌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건, 아렌보다도 훨씬 윗급의 윤허가 있어야만 가능하기에.
“…누가 보냈지? 레온나토스에게 아직은 이런 더러운 일의 역량은 없을 텐데. 가웨인? 아니면 라이안 형님인가?”
아렌은 대답했다.
“황제 폐하십니다.”
“…뭐라고?”
아렌의 지목으로 범인으로 몰린 엔지이지만, 정말 억울한 누명을 썼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기도 하지만, 정작 엔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아렌이 물었다.
“왜 역모를 꾸민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렌의 물음에 엔지는 기가 차 혀를 쯧, 찼지만 곧 선심 쓰듯 대답했다.
“어리석은 질문이군. 아사(餓死)하기 직전의 사람을 만찬장에 데려다 놓고, 빵 한 조각조차 들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나. 그 후 몰래 빵을 집어 든 자에게 ‘왜 음식을 훔친 거냐’고 천연덕스레 묻는 건가?”
“그 비유는 바르지 않습니다. 황제가 되지 못하는 것뿐, 굶어 죽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마찬가지다.”
엔지는 단언했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가 되어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면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나? 그럼 떠올려 봐라. 현 황제, 아버님 주변에 남은 형제들을. 누가, 얼마나 남아있지?”
“…….”
황도에 남은 황제의 형제들은, 모두 통틀어 내원 시종장만이 유일했다.
하지만 내원 시종장은 후계를 남기지 않겠다는 약속하에 거세해야만 했고, 거세하지 않은 다른 황자들은 황권 경쟁 통에 죽거나, 모든 것이 끝난 후 제국 외곽 한적한 땅으로 가 이름뿐인 직책을 얻어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었다.
그 삶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도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그 저의를 의심받기에,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선 사실상의 유폐나 다름없는 처사이기도 하다.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인생은 내 쪽에서 단호히 거부하겠다. 그런 조처를 달게 받아들인 놈들이 제정신이 아닌 게지.”
“…이해는 했습니다만, 그 방법이 역모라니요. 그 방법뿐이었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황제가 되지?”
이미 삶을 내려놓은 엔지는 알렌을 향해 조용히 반문했다.
“일평생 라이안을 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격차는 더욱 늘어나기만 했지. 루카스 자식은 능력에 비해 벽창호라 그나마 나았지만, 신은 가웨인에게 병신같은 재능을 내렸다.”
형인 라이안에게 뒤지는 것만이었다면 엔지는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3, 제4 황자에까지 경쟁당하고, 추월당하는 엔지의 자존감은 점점 깎여나가고 있었다.
결정타는 레온나토스였다.
“거기에 이젠, 나보다 한 참이나 어린 레온나토스? 심지어 그놈은 여기에도 없지 않나! 감히 황제 폐하를 등에 업고, 대리인 보내?!”
“레온나토스 전하는 제가 여기 온 것을 모릅니다. 여기 온 건, 오직 저와 황제 폐하의 독단입니다.”
“허! 그놈은 복이 하늘을 찌르는 군. 놈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코를 풀어주는구나!”
“…….”
레온나토스가 황권에 관심가지지 않은 채, 동년배의 다른 형제들처럼 가만히 숨죽인 세계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때에도, 레온나토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죽임을 당했다.
‘…황제가 되지 않는 한,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엔지의 말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몰라.’
“-돌아가라.”
엔지는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이미 내 길은 여기까지야. 이후 그 누구의 발판도 되어주지 않겠다. 비록 그것이, 내가 죽이려 한 아버지의 명령이라 해도.”
“…당신은 이대로 죽겠지만, 당신을 따르는 부하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이야말로 동정할 필요 없지.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나’를 선택한 것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달게 받아야지.”
자신을 믿고 따른 가신들이지만 그들에 대한 책임감은 없었다.
엔지에 붙은 가신들 역시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따라온 자들이 대부분이니, 어쩌면 어울리는 주종관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쪽은 그런 자들의 손조차도 고프거든?’
“하지만, 황제 폐하의 전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의?”
아렌이 갑자기 ‘황제’를 입에 담자 엔지는 긴장했다.
자신이 죽이려던 사람이지만, 그건 목적에 의해서일 뿐.
황제는 여전히 자신의 주인이자, 아버지였다.
아렌은 황제의 전언을 천천히 읊조렸다. 말이 진행되면 될수록, 엔지의 얼굴 역시 일그러졌다.
“‘내가 죽었더라면, 그건 라이안이 가장 원하는 바였겠지. 제 목숨 바쳐가며 경쟁자에게 황위를 갖다 바쳐? 멍청한 놈.’”
“…아버지!”
엔지는 허물어졌다.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황제의 전언에 그 분노는 들어있지 않았으므로.
아들에게 죽을 뻔했지만 화내지 않는 어버지와, 죽이려 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 황제의 가족관계는, 심각하게 일그러졌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