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다음날.
아렌은 낙일관에서 뜻밖의 소식을 보고받았다.
도국의 두 유력자 중 빨랐던 건 헬데움의 세밀 메렌치였다.
“…황자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요?”
“그래. 2년이나 잠입시켰던 밀정이 들키기 직전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얻어낸 정보야. 황자는 목욕할 때 어떤 장신구도 지니고 있지 않았어.”
듀란 우피치도 이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간발의 차이로 세밀보다 늦게 조사해온 듀란은 심기 사나워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라이안이 셀린츠 인근에 있을 때, 그 주변의 온천을 자주 즐겼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의 보고서가 당국에 꽤 많이 남아있어요.”
1년 전까지만 해도 라이안 황자의 몸에 지닌 장신구 따위는 없었다는 말.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욕탕에 들어갈 때는 운명석을 빼놓는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아렌은 막 떠올린 생각을 스스로 부정했다.
자신에게 대입해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자신의 흑옥 반지를 옷과 함께 두고 욕실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자문한다면 아렌 역시 고개를 저을 테니까.
운명석 계약자는 자신의 운명석을 몸에서 함부로 떼어놓지 못한다. 이것은 확실한 대전제라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라이안은 계약자가 맞겠지.’
아르테가 마음을 읽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확실한 증거다.
물론, 아르테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가능성 역시 염두에 둬야만 한다.
하지만, 아렌이기에 그 가능성을 배제해도 되었다.
‘아르테가 하는 말은, 에누리 하나 없는 진실이었어.’
사람의 표정만 보고 그가 하려는 말을 알 수 있는 아렌이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우려만큼은 옆으로 치워놔도 괜찮았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역시 몸 어딘가에 숨겼나?’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그럴듯한 수였다.
머리핀처럼 크기가 작거나, 입 안이나 몸속에 숨기기 좋은 물건이라면 욕탕에서 막 나온 나체로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음… 역시 어딘가에 장신구나 물건을 지니고 있을 거예요. 짐작 가는 곳 없나요?”
“그렇게 말해도, 작은 물건 작정하고 숨기려면 숨길 곳은 많겠지. 피부를 갈라 그 안에 숨기고, 상처를 아물게라도 했으면 찾아내는 건 무리야.”
세밀은 난색을 표했고, 듀란의 태도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운명석은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져있고, 아렌 또한 우연과 백방으로 찾아 헤맨 정보를 통해 겨우 접근할 수 있었을 뿐이다.
아렌은, 자신이 운명석 계약자임을 숨기고 싶다는 라이안의 강한 열망이 느껴졌다.
“…흐음.”
아렌의 앞에서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둘.
아렌은 둘에게 말했다.
“그래서, 둘은 정식으로 레온나토스 전하를 지원하는 입장인거죠?”
“…역시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 여러모로 저쪽 말이 더 빨라 보이는 게 사실이거든요.”
듀란은 황자에 대한 지지를 경마에 빗대 말했다.
아렌도 그 은유에 동참했다.
“돈을 걸든 안 걸든 승패에 관련 없다면 모를까, 걸면 걸수록 이길 가능성이 더 커져요. 어차피 승부할 생각이라면 이긴다고 믿고, 확실하게 걸어야죠.”
아렌의 예시는 노름이라면 정확히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비유만 그럴 뿐 노름이 아니다.
실제로 둘의 태도 역시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망설임이 남았을 뿐, 레온나토스에 충분히 걸어볼만 하다 느끼고 있었다.
먼저 결단을 내린 건 이번 레데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헬데움의 세밀 메렌치.
“…후우, 하는 수 없지. 이미 지원해준 거, 이제와서 아니라고 발뺌하기도 뭣하고 말야.”
처음부터 중립이었다면 모를까, 한번 아렌 측을 지원한 이상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것을 택했다.
물론 레온나토스 측이 더 열세인 말이기에, 이겼을 때의 보상이 크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확실히, 레온나토스 측의 최측근인 아렌과는 친분이 있죠. 아직은 라이안으로 갈아탔을 때의 매몰비용이 그리 크지 않지만, 헬데움이 레온나토스를 지원한다면 이야기는 다르죠.”
“…뭐야, 우리가 아렌을 지지하니까 카르도나도 따라한다고?”
“물론이죠.”
듀란은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 헬데움은 큰 타격을 입었고, 지금 당장 도시 역량은 카르도나가 더 우위죠. 괜히 헬데움과 다른 선택을 해 역전의 빌미를 줄 필요는 없어요. 헬데움만 의식한다면 같은 선택을 해서 모든 변수를 없애는 것도 방법이죠.”
“…그걸,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말하네?”
둘의 태도야 어떻든, 둘이 레온나토스를 지원한다면 아렌으로선 바라마지 않은 일이다.
“속도로 보나, 정보의 질로 보나 이번에는 헬데움이 우세했어요. 기억해둘게요. 그런데 그 밀정은 괜찮아요?”
실수를 가장하고 황자의 알몸을 훔쳐본 밀정의 이후가 걱정인 아렌이었다.
“다행히 당장 들키지는 않았지만. 밀정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밖에 드러나지 않는 거야. 이번에 대차게 눈에 띈 이상 적어도 1년은 무리하지 않고 얌전히 있어야만 하지. 괜히 임무를 줘 또 눈에 띄었다간, 아주 실낱같았던 의혹조차도 확신으로 바뀔 테니까.”
“고마워요. 무리를 하게 했지만, 덕분에 얻은 정보는 아주 유용했어요.”
“사실상 아무 내용도 없는데도?”
“황자가 장신구를 교묘히 감추고 있다, 혹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니까요.”
라이안 그 자신도 상대가 가진 운명석을 보고 상대가 계약자인지 아닌지 가늠했다.
‘자신은 운명석을 실컷 이정표로 삼는 주제에, 자신의 돌은 다른 데 숨겨?’
그런 꼴을 아렌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만약 황자가 어딘가에 장신구를 감추고 있었다면, 그건 어디일까요?”
“음… 가령 범죄자들이나 암살자들은 검색을 피하기 위해 무기나 도구를 그, 거기 숨긴다고는 하는데.”
설명하덴 세밀의 목소리가 갑자기 기어들어갔다.
“거기? 그게 어디인데요?”
“그게, 그러니까… 뒤에 있는 구멍-”
“뒤에 있는 구멍?”
세밀은 옆을 돌아봤다.
듀란은 설명을 도와주고 싶지 않은지 두 눈을 질끈 감고만 있었다.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걸 꼭 숙녀 입으로 말하게 해야 해?”
“아, 거기 말이에요?”
“도중에 알고 있었지! 알고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하게 했던 거야!”
“에이, 설마요.”
아렌은 딴청을 피웠다.
설마 아니겠지만, 만약 세밀이 말한 대로라면 라이안의 운명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점괘를 봐, 그 속내를 떠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리 자신있지는 않았다.
‘라이안은, 묘하게 속마음을 알기 어렵단 말이야.’
아르테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렌 역시 라이안의 마음을 읽는 것이 꽤 버거웠다.
흔히들 눈이 얼굴의 반이라고 하지만, 라이안의 눈빛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형언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여하튼, 라이안 황자는 운명석 계약자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나을 거에요. 사람을 대상으로 즉각적으로 효과를 보는 종류의 능력은 아니겠지만.”
“그걸 아렌은 어떻게 아는 거죠?”
‘그야, 나나 아르테가 계약자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라이안의 능력이 대단했다면 이렇게 모여 작당 모의할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요.”
정말 라이안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면, 그와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 소문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안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질리도록 들었지만, ‘비범하다’는 소문은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과거로 되돌아온 것만으로 첫번째 삶 이상의 명성을 쌓은 아렌, 교국의 차기 대주교로 불리는 아르테와는 달리.
‘하지만, 계약자인 이상 어떤 식으로든 능력을 지니고 있을 거야.’
라이안, 제국의 제1 황자는 지금 레온나토스 세력이 감당하기 지나치게 큰 적일지도 모른다.
‘라이안이 계약자라면, 그건 오히려 기회야.’
어떤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건, 그것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차라리 라이안이 운명석 계약자가 아니었다면 더 힘들었을 싸움.
‘-이제야, 해볼 만 해졌어.’
*****
도국연합의 두 구심점, 헬데움과 카르도나의 유력자인 세밀 메렌치와 듀란 우피치가 레온나토스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공화정인 도국 특성상 한두 명의 의견만으로 국론이 움직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도국에게 어려운 시기이고,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외부의 지원을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이안이 아니라 레온나토스를 선택한 이유는 각자 설명해야 되겠지만.’
그건 그녀들이 맡을 일.
더 이상은 아렌의 주관이 아니었다.
아렌은 이대로 그녀들을 레온나토스에게 소개해주려고 했지만,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황궁 내원, 그곳에서도 최심부에서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은면병과 두 명의 금면병이 철통처럼 지키는 방 안은,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병실이었다.
“황제 폐하. 12황자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아렌입니다.”
아렌은 허리를 조아렸다.
병상 위에는, 상처입은 사슴처럼 헐떡이는 제국의 황제, 브륀할트 8세가 누워있었다.
빈말로도 좋아보이는 병세는 아니지만, 복부를 관통당한 상처에 비하면 의식이 있는 것부터가 기적에 가까웠다.
‘…왜 날 부른 거지?’
레온나토스 황자도 동행하지 않은 채, 아렌 단독으로만 불러들인 이유가 궁금했다.
병상 위 누운 황제는 가면을 벗고 있었다.
가면을 벗은 황제는, 그저 약해진 중년의 얼굴일 뿐.
“…내가 왜 불렀는지 의아하겠군. 아렌.”
“제게 의문은 허락되어있지 않습니다, 폐하.”
“다름 아니라, 네가 이번 일에서 제법 애써줬다는 말을 들어서 말이다. 직접 치하해야 할 것 같았다.”
황제의 말이었지만, 아렌은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렌이 내원 시종장의 의뢰로 황제가 위중하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을 떄, 의도와 달리 그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그 뒤 라이안 황자와 공모해 어느 황자가 진범인지 반응을 살펴보려 했지만, 가장 중요할 때에 기절해버리고 말아 물증을 확보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미 물증따위 다 없애버렸을 제2 황자 엔지를, 라이안은 그저 심증과 추측만으로 잡아 가둔 상태.
대체 어떤 점에서 도움을 줬는지, 아렌은 알 수 없었다.
“…마치, 솔티르 같구나.”
‘…대현자 솔티르?’
건국왕을 바로 옆에서 보좌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자, 그 또한 운명석 계약자로 추측되는 인물이었다.
무슨 의도로 말한 건지 아렌이 고민하는 동안, 황제는 병상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물렸다.
의원과 금면병까지도.
병상 주변에는 누워있는 황제와 아렌뿐이었다.
지금이라면 아렌조차 맨손으로 손쉽게 무방비한 황제를 죽일 수 있다.
주변 사람이 없어지자 한결 홀가분해진 듯 황제가 말했다.
“대현자 솔티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제국의 기초를 세우고, 가장 먼저 북방을 정벌해 지금의 북방 국경을 정립했습니다.”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인가?”
“…정확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얼어붙은 산맥 너머에 있는, 특별한 힘을 가진 돌에 대해서도 모르나?”
“…”
황제, 혹은 황태자가 되면 대현자 솔티르와 그가 가진 힘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고 하니 황제가 솔티르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왜 아렌에게 하느냐다.
‘내가 계약자인 것을 눈치챘나? 하지만-’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진 아렌이지만,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단순히 경고를 하거나 잡아 가두려 한다면, 굳이 무방비 상태의 자신 앞에 둘 리 없다.
“…네가 무슨 힘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그 능력으로 황자를 보필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겠지. 네가 폭주한다면 다른 황자들이 견제할 테고. 그리고 내가 보건대 넌 폭주하더라도 자기 자신만 파멸시키고 말겠지.”
기력이 쇠한 황제의 눈은 거친 병상 생활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지만, 여전히 눈빛만큼은 형형히 빛났다.
“…레온나토스에 충성하지는 않는군. 하지만 배신할 생각도 없어. 네 목적과 레온 녀석의 뜻이 일치하니 기꺼이 돕고, 갈라지더라도 뒤끝은 없지. 이상적인 가신이로군.”
‘이상적? 내가?’
역시 판단력이 흐려진 건가, 아렌은 황제를 의심했다.
황제는 힘들어하면서도 뛰엄뛰엄 말했다.
“엔지, 제2 황자는, 날 노린 범인이 맞나?”
“…제가 본 바는 그렇습니다. 나온 물증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설령 그놈이 범인이라도, 용서해줘라.”
“…?”
“그리고 오갈 데 없는 그의 세력을 흡수해라.”
아렌은 황제의 눈을 살폈다.
통증과 고열로 정신이 혼미한 것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하지만 황제는 지극히 제정신이었다.
“…방금 말씀은 곧-”
사실상 황제의, 지지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렌은 귀 기울여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