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라이안이 운명석 계약자임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그의 운명석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상시 황자의 몸에서 장신구는 확인하지 못했다.
‘보통 장신구도 아니야. 매일 차고 다니고, 어쩌면 목욕할 때조차 지니고 들어갈지 모르는 물건.’
지금 당장 라이안을 적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라이안은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되기 위해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벽이다.
언젠가 마주해야 할 상대라면, 그에 대한 카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아렌은 황궁 안을 안내해주기로 약속한 듀란과 세밀을 불렀다.
아무리 타국의 사절이라지만, 단독으로 황궁 안 이곳저곳을 다니는 건 결례일 수 있다.
특히 황제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최근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미 황궁 안에서도 아렌의 지위는 그리 낮지 않다.
듀란과 세밀은 황궁 내원을 제외한 황궁의 거의 모든 곳을 다 방문해볼 수 있었다.
최근 암살이 있었던 대회견장과 황궁 주변의 열두 정원, 각 황자들이 기거하는 별궁과 연회장까지.
“…대체 황궁이 이렇게나 클 필요가 있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역시 천년궁이라고 불릴 만하네요. 확실히 위압감이 느껴질 만한 크기에요.”
곳곳을 둘러본 후 간단한 감상을 남긴 둘.
거의 반나절을 써 황궁 곳곳을 둘러본 둘은, 종국엔 레온나토스의 별궁 안, 아렌의 낙일관 안에서 한숨 돌렸다.
“이게, 소문이 자자하던 그 낙일관인가?”
“제국 밖에선 황궁 전체가 점술에 빠진 형국을 비웃기도 해요. 고작 미신에 황궁 전체가 들썩인다지만, 카르도나에서 본 것이 있으니 할 말 없네요.”
둘은 단순히 관광을 위해 황궁 구석구석을 구경시켜달라 말한 건 아닐 것이다.
곳곳에 파견한 밀정으로부터 보고를 받더라도, 황궁 안의 대략적인 구도를 알고 받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는 꽤나 클 테니까.
어두운 실내 안에서 한숨 돌리던 세밀 메렌치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너 제국에선 제법 바쁜 사람 아냐? 부탁해놓고 이런 말은 뭣하지만, 하루 종일 딴짓해서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그냥 놀기만 한 건 아니니까.”
“…네?”
“둘에게 부탁이 있어요.”
둘에게 황궁 안내를 시켜준 건 단순히 약속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렌은 본론을 꺼냈다.
“카르도나와 헬데움이라면, 황궁 안에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밀정이 있겠죠. 그들을 통해 얻고 싶은 정보가 있어요.”
“…….”
타국에서의 반쯤 관광이었던 일정이, 한순간에 업무로 바뀌었다.
그녀들의 표정도 단숨에 진지해졌다.
“…지금 같이 경비가 삼엄한 시기에 밀정을 움직이라고? 황궁에 밀정 한 명 숨겨두기 위해 얼마가 쓰이는지 알기나 해?”
“애초에 황궁 안의 정보원은 저희보다 아렌이 훨씬 더 많겠죠. 특히나 굳이 지금, 우리를 통해 알아볼 필요 있을까요?”
둘의 말은 타당했지만, 아렌은 이럴수록 더 밀어붙여야 했다.
“글쎄요. 오히려 이런 시기일수록,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한쪽을, 선택해?”
“이미 이긴 말을 고르는 것과 시합이 끝나기 전부터 응원하는 것. 두 경우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잖아요?”
“그 말은 맞아. 하지만, 내가 고른 말이 진다면?”
“그때는 입 닦으면 그만이죠. 한쪽 말에 대한 응원은 몰래 하고, 다른 말이 이겼다면 그 사실만 숨기면 적어도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그쪽의 특기기도 한 것 아니에요?”
“…여기, 보안 괜찮아?”
“그러니까 여기로 데려왔죠.”
세밀은 낙일관 내부를 한번 둘러본 후 아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만약 레온나토스가 황권을 잡으면 대박, 설령 라이안이나 다른 황자가 이기더라도 우리에게 손해는 아니라는 말이지?”
“풀어서 말하면 그렇게 되겠죠. 황권 경쟁에서 나가떨어진 마당에, 무슨 억하심정으로 몰래 도와준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리겠어요?”
“-확실히.”
황궁 내부에 잠입한 밀정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부담이지만, 그 외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확실히 괜찮은 듯한 방법이다.
수긍하는 듯한 둘의 분위기를 확인한 아렌이 이어 말했다.
“물론, 당신들이 제가 원하는 정보를 알아봐 줄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요.”
“-그 말은 그냥 넘어가 줄 수 없겠네요.”
조금 발끈한 듀란 우피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카르도나 밀정의 보고서는 세계 제일이에요. 땅 위, 태양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전부 한 번씩은 카르도나 밀정에 의해 기록되었을 정도니까.”
듀란의 자부심. 그리고 옆의 세밀은 조금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밀정 자체의 숫자와 기술만큼은 카르도나조차 범접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헬데움의 밀정이니까.
“믿음직하네요.”
아렌은, 곧바로 둘에게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말해줬다.
어떤 심각한 사안이 나올지 조금 긴장한 둘은, 금세 맥 빠진 얼굴이 되었다.
“…장신구?”
“네. 라이안 황자가 언제나 몸 어딘가에 지닌 장신구가 있는지, 있다면 형태가 어떤지 조사해보고 싶어요.”
“…고작 장신구 아냐? 그걸 왜 확인하려고 하는 거야?”
“라이안 황자가 한 장신구에 집착한다는 첩보를 들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하나 선물할 때도 맘에 드는 걸 할 수 있을 테고 관계 개선도 더 유리하겠죠?”
아렌은 둘러댔지만, 아렌조차도 그녀들이 속아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녀들에게 운명석에 관한 보고서를 받은 이후다. 그 직후 라리안이 항상 지니고 있다는 장신구를 조사해달라고 한다.
그 둘 사이의 연관성을 모른다면 도국연합 패권도시의 유력가 자재라고 할 수 없다.
“물론, 그 장신구 색깔은 검은색이겠지?”
“글쎄요. 무슨 색인지는 조사해봐야 알겠죠.”
“…….”
아렌의 딴청에 세밀은 눈을 흘겼다.
“그래서, 알 수단이 있긴 한 거예요?”
“…으음.”
둘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황궁 안에 잠입시킨 밀정이 없다고 말하면 말도 안 될 뿐더러 믿지도 않겠지. 자세한 건 못 말해주지만. 그런데 제1 황자의 최측근이라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라이안은 도국 연합과 제국의 국경 근처에 머무르며 도국과 교류를 해왔어요. 카르도나에도 그에 대한 여러 보고서가 남아있죠. 관찰기록은 머리의 삐침 정도나 작은 뾰루지까지 기록하니, 장신구에 대한 정보도 남아있을지 몰라요.”
결국,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녀들이 수락했을 때의 일이지만.
하지만 아렌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럼, 의뢰를 받아줄 거죠?”
“…글쎄요. 어째서 벌써 단호하게 확신하는 거죠?”
“왜냐면, 당신들은 뼛속 깊이 장사치니까.”
“…….”
어감은 좀 이상하지만, 아렌의 말은 도국 시민에겐 최고의 찬사다.
“제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얻을 이득도, 손해도 없어요. 제안을 받으면 이득만 있고, 마찬가지로 손해는 없고요.”
“그리고, 다른 방법도 있지. 처음부터 라이안의 손을 잡는 방법. 이길 가능성이 가장 큰 말이라면 응당 거기 올라타야지?”
“그게 의미 없다는 건 세밀이 가장 잘 알잖아요?”
“…….”
“이미 라이안 황자 주변엔 그를 지지하는 인파로 구름을 이뤘어요. 거기에 타국 사람 한둘 늘어봤자, 황자는 기억조차 못 할 거고요.”
그러니 비밀 지원은 불리한 쪽, 언더독에 지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불리할수록 외부의 지원이 절실하고, 고마움도 더 클 테니까.
듀란 우피치가 물었다.
“아렌의 점괘에는 뭐라고 나왔어요? 우리에게 묻기 전에, 미리 점도 쳐봤겠죠? 라이안은 아렌이 말하는 장신구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나요?”
“그건, 말 못 해주겠네요. 애초에 점괘에 무작정 의지할 수도 없고, 의지해서도 안 돼요.”
“아직도 그 소리야? 내가 보기엔 의지해도 충분한 것 같은데.”
“하나의 노에만 의지하면, 그 노를 잃으면 영영 바다 위를 떠도는 법이죠.”
그건 비단 점술뿐 아니라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세밀과 듀란,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에게 제안하는 이유기도 했다.
“제 제안을 받을지 말지는 그쪽에서 선택하세요. 다만, 둘 중 먼저 정보를 가져온 쪽과 거래할 거예요.”
한쪽 우선, 그것도 선착순이라는 말에 세밀과 듀란의 몸이 달았다.
“자, 잠깐. 그럼 늦게 찾아온 나머지는-”
“물론 그쪽과도 거래하죠. 하지만 첫 번째보다는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겠죠. 당연한 말이지만 정보의 속도뿐 아니라 질 또한 반영할 겁니다. 아무리 빨라도 그 정보가 쓰레기면 의미 없어요.”
“지금 그런 말을 한들, 레온나토스는 아직 황제도 황태자도 아니에요.”
“물론 전 레온나토스 전하가 황제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점을 봤다거나 팔이 안으로 굽는다거나 해서는 아니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
“제 말을 믿고 안 믿고, 선택하고 안하고는 여러분 자유예요. 절대 강요는 못 하죠.”
아렌의 말에, 그녀들은 아무 말 않고 지금 상황을 주시했다.
하지만 황궁 안을 돌아보던 때의 돈독함은 어디 가고, 예전 도국 패권을 두고 경쟁했던 시기처럼 서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둘은 더 빠른, 더 양질의 정보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리라.
‘그래, 빠른 쪽이 임자니까 아무나 오라고.’
아렌은 속으로 웃었다.
*****
‘…이걸 조사하라고? 설마.’
제1 황자의 시녀 시란은 지령서를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
황궁 안은 계엄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라 당분간 보고도 삼가는 상황이었는데, 헬데움 본국으로부터 날아온 지령서 내용은 심지어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다.
‘제1 황자가, 항상 하고 다니는 장식이라니… 그런 게 있나?’
곁에서 2년이나 보필한 시란이지만, 라이안은 복식이 화려할지언정 몸에 차는 장신구는 극도로 꺼렸다.
어쩌면 지령서 내용대로 장신구를 찬 채 욕실에까지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라이안은 다른 황자와 다르게 시녀들에게 목욕시중을 들이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욕탕을 엿봐서라도 장신구의 형태를 조사하라니… 차라리 유혹하라는 명령이 이해하기 쉽겠어.’
황자라면, 욕실 안에도 별도로 시중하는 시녀를 두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목욕의 수발뿐 아니라, 그 이상까지 요구하는 황자도 적지 않다.
라이안의 나이는 이미 결혼하고 애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지금 황자가 결혼하지 않은 건, 아직 황태자 자리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황태자 자리에 오르면 황태자비 자리의 정략성 역시 어마어마해진다.
완전히 같은 조건의 두 황자가 있고, 한쪽이 기혼이라면 결국은 미혼인 황태자가 선택될 것이다.
‘차라리 라이안이 시녀들을 마구 건드리는 남자였다면 확인하기 쉬웠을 텐데.’
그때.
욕실 바깥의 입구에서 안쪽을 아쉽다는 듯 바라본 시란에게, 탈의실 바닥의 옷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시녀 손이 닿지 않아 아무렇게나 벗어진 옷가지는, 바구니 안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들어가 있었다.
“…저 안에, 어쩌면.”
라이안이 평소에 무슨 장신구를 차는지는 바로 옆에서 수행하는 그녀조차도 모르는 일이다.
장신구 건이 사실이라면, 지금 옷 바구니 안에 없는 이상 몸에 차고 있을 것이다.
시란은 몰래 들어가 황자의 옷바구니를 조심스레 뒤집었다.
-거기는, 속옷과 평소에 보던 옷밖에 없었다.
‘…지령이 사실이라면, 정말 목욕할 때도 차고 있었던 거야?’
지령의 신빙성은 한층 더 올라갔다.
여기까지 온 이상 시란은 다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소 무리해서라도 확인해주겠어.’
시란은 욕탕 밖에 마련된 새 옷과 수건 바구니를 바닥에 엎었다.
잠시 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는 물소리가 들렸다.
시란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
“소, 송구합니다! 새 옷바구니를 정리하다가, 그만 엎는 바람에.”
제4 황자에게였다면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하지 못했을 짓.
그녀가 가까이서 지켜본 자, 이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허용 범위였다.
“하는 수 없지. 바닥이 그리 더럽지 않으니 괜찮다. 방에 돌아간 뒤 얼른 새 옷이나 준비하도록.”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는 머리를 연신 조아리는 척하면서도, 눈을 들어 황자의 몸을 살폈다.
온수로 붉게 달아오른 사내의 나체.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도, 시녀는 황자의 몸을 구석구석 확인했다.
곧 시녀의 눈엔 실망의 기색이 서렸다.
‘…뭐야, 장신구 따위, 어디에도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