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라이안은 아르테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기세에 눌려, 아르테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무,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만-”
“움직이지 마라.”
멈칫.
저도 모르게 뒤로 움직이던 아르테의 발이 절로 멈췄다.
라이안의 말에는,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막아서는 타고난 위압감이 있었다.
“황궁에 어렵게 온 손님인데, 황자 된 자로서 돕지 않을 수 없지. 안내라도 해줄 테니 괘념치 않아도 된다.”
라이안의 행동이 순전히 친절에서만 우러났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아르테는 라이안에게서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아르테의 말에도 라이안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적의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
아르테는 뱀의 방울소리를 들은 개구리처럼 몸이 굳었다.
그때.
“아, 아르테. 여기 있었군요.”
뒤에서 들려온 말소리.
그와 동시에 라이안이 풍기던 위압감도 사라졌다.
“…아렌? 네가 아는 자인가?”
뒤의 발소리 주인은 아렌이었다.
아렌은 태연하게 예를 표한 뒤 말했다.
“전에도 황궁에 들렀던 신하입니다. 저와는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죠.”
아렌의 뜻 모를 모호한 말에, 라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뭐냐. 숨기지 않는 거냐?”
“전하께 굳이 숨겨서 득 볼 것도 없지요. 그리고, 이 정도는 모두 하는 짓 아닙니까?”
“…?”
아르테는 라이안과 아렌 사이에서 머리에 물음표만 동동 띄웠다.
자신이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두 사람이 하는 얘기에, 더더욱 뜻 모를 이야기까지 겹치니 대화를 따라가기 벅찼던 것.
“…교국의 시녀께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군. 그럼 이만 물러가주지. 단, 교국의 아가씨. 밀정 짓을 너무 자주 했다간 좋을 게 없을 거요.”
“…….”
라이안은 아렌의 태도에서 곧바로 상황을 유추했다.
아르테는, 아렌이 포섭한 교국 측의 밀정이라는 사실에 기반한 거짓 정보를.
자신의 경쟁자 측의 밀정이지만, 그녀가 활동하는 곳은 교국이다. 그녀의 활약은 곧 제국의 이득이니 라이안도 굳이 저지하지 않을 터.
라이안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아르테에 가졌던 일말의 수상함이 아렌의 말을 통해 해소되었기 때문일까.
라이안이 물러가고, 주위에는 눈을 번뜩이는 위병만이 남았다.
그들조차 라이안의 입김이 들어간 자들일 테니, 아렌은 그대로 아르테를 데리고 자리를 이동했다.
한참을 걸어 아렌의 집무실로 온 다음에야 아르테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십 년 감수했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멋대로 움직여선,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기나 하냐고요.”
“그건-”
“황궁 안에선 한낱 농담조차 조심해야 한다고요. 특히나 최근 큰일이 있었던 요즘은 더더욱. 그런데, 조심하라던 라이안 황자를 무턱대고-”
“그러니까, 조심한다고 했잖아. 그보다, 알고 있었다면 말해주지 그랬어!”
“…무슨 말이죠?”
“시치미 떼는 거야? 어째서, 황자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거냐고!”
“…….”
“너도 알고 있었지?”
“…이미 들켜버린 이상, 하는 수 없네요.”
“-역시.”
아렌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아르테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속으로 동요한 건 아렌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안이, 계약자였어?’
*****
아르테는, 계약자로서 아렌의 능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명성이 자자한 아렌의 점술이 운명석 계약으로 얻은 능력과 관계가 있으리라,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
그리고 모든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아르테지만, 오직 아렌의 마음만은 읽을 수 없는 아르테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아렌도 마찬가지로 운명석 계약자이기 때문에.
그런데 방금, 아르테는 마음을 읽을 수 없었던 두 번째 인물을 말했다.
“…그래서 최대한 둘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가 정말 계약자라면 당신의 능력이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괜히 라이안 황자의 의심만 살 수도 있으니까.”
아렌은 라이안 황자에 대해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렌의 능력이 무엇이든, 그 능력을 라이안에게 사용했다면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라이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건, 어색해.’
한순간 생각이 거기까지 마친 아렌.
다행히, 아르테는 아렌의 능숙한 거짓말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야 이해는 하지만… 귀띔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았어?”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라이안에 대해 제대로 안 것도 도국에서 돌아온 직후에요.”
“정말? 지금까지 라이안에 대해 점쳐보지 않은 거야?”
“최근에야 황궁에 돌아왔으니까요.”
아렌은 계속 생각해왔던 것처럼, 실은 방금 떠올린 가설들을 꼽았다.
“우선 라이안에 대해 정리해보죠. 지금 당장 말할 수 있는 건, 라이안이 계약자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라이안에게 둘의 능력이 다 통하지 않았다.”
“역시, 네 능력도 통하지 않은 거야?”
“네. 그리고 라이안도 우리를 운명석 계약자로 특정하지 못했죠. 그건 라이안이 가진 능력이 없거나, 자주 쓸 수 없거나, 혹은 능력이 있어도 사람을 대상으로 적용되지 않는 종류라서, 셋 중 하나일 거예요.”
가령 비나그네라는 계약자는 축제 기간의 황도에 종일 비를 뿌렸다. 황도에는 아렌도 있었고, 라이안의 칼에 맞기 전에도 아렌과 충분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황궁 바깥 하늘은 여전히 비를 뿌려대고 있었고, 그가 죽자마자 비는 멈췄다.
‘라이안에게 운명석 계약자를 알아볼 수단은 없다, 그렇게 판단해도 될 거야. 아무리 속내를 숨긴다 해도 그만한 감정 변화를 못 알아볼 리 없으니까.’
그건 황자가 아르테를 직접 눈앞에 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테는 아렌과 라이안을 만나자마자 그들이 계약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말 라이안이 계약자라면, 그가 아르테와 같은 종류의 능력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라이안이 계약자였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라이안이 왜 그렇게 계약자에 적대감을 보이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능력을 얻었는데, 그건 상대가 계약자인지 아닌지 확인 못 할 종류의 능력이라면.
그 상태로 계약자에 대해 알고 있고, 상대 계약자는 이쪽을 훤히 눈치챌 수 있다고 여긴다면.
굳이 운명석 능력이 아니더라도 라이안에겐 차고 넘칠 만큼의 권력이 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운명석 능력이 알려지면, 그건 지지 않아도 될 짐을 괜히 지게 되는 것일 뿐이다.
“…아르테. 아까 반응으로 황자의 의심을 산 건 아니겠죠?”
“그야, 조금 놀라긴 했지만 설마 그 정도야…”
아르테는 발각되었을 가능성을 낮게 잡았지만, 위험은 최소화하는 게 낫다.
“그래도 당분간은 사절단의 다른 사람들과만 같이 다녀요. 교국 사절단 사이에 있다면, 라이안 황자조차도 다짜고짜 험한 행동을 하진 않을 테니까.”
“…그래. 네 말대로 할게.”
아르테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꼭 필요한 순간에, 상대의 마음을 못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알았으니까.”
“당분간 라이안을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거예요. 약간은 있었을지도 모를 의혹을, 밀정 쪽으로 돌려놨으니까. 라이안이 그걸로 내 약점을 잡을지는 모르지만요.”
“…역시, 들킨다면 위험할까?”
물어보는 아르테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렌은 조금 웃었다.
“-뭐가 그리 웃겨!”
“아, 미안해요.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모르니 불안하고 힘들죠?”
“…….”
“그게 바로 보통 사람들이 평소에 느끼는 감정이에요.”
아렌의 말을 들은 아르테는 눈을 흘겼다.
“넌 아닌 것처럼 말하네. 실은 너도 마찬가지잖아!”
“…….”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걸 밝힐 수 없는 한, 아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아르테를 교국 사절단 무리로 돌려보낸 후 아렌은 생각에 잠겼다.
‘…라이안이 계약자라. 그렇다면 분명 운명석 물건이 있을 텐데.’
아렌의 반지, 혹은 아르테의 팔찌처럼.
알려진 바로는 계약자가 죽거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 상태가 되면 운명석은 깨지며 능력을 회수한다.
라이안은 흑옥 물건이 깨진 것을 보고 곧바로 의혹을 거둬들였다.
그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계약자의 운명석을 깨면 똑같이 능력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안의 운명석을 특정할 수 있고, 그것이 비교적 최근에 얻은 물건이라면 그가 운명석과 계약한 시기마저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아마, 지금도 지니고 있겠지.’
아렌 역시 흑옥 반지를 끼고 있다.
빼고 다녀도 별 지장 없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부모가 물려준 소중한 물건이니까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지금까지는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아티스의 왕자나 아르테는 어떻지?’
아티스의 왕자는 항상 피리를 허리춤에 두고 다녔고, 아르테 역시 팔찌를 벗은 모습을 본 적 없다.
거기에 비 나그네까지. 모두 운명석을 몸 가까이에 소중히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도 아렌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이유를 들어가며 운명석을 가까이 두고 있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라이안 또한 자신의 운명석을 몸 가까이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운명석 계약자를 만나면 반지가 욱신거렸는데.’
라이안을 앞에 뒀을 때, 반지는 그대로였다.
아르테를 마주했을 때도 마찬가지.
‘예전과 달라진 거라면-’
5년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환각이, 지금은 때때로 보이게 된 점. 그리고 점괘가 언령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 이 두 가지였다.
지금 당장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니, 아렌은 그 사실을 머릿속 한 구석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리곤, 최근에 본 라이안 황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렌의 가설이 맞다면, 어딘가에 분명 흑옥으로 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게 있었나?’
팔찌나 목걸이, 반지나 귀걸이. 어떤 장신구라도 흑옥으로 되어있었다면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가 운명석 계약자에 광적으로 집착하니만큼, 더더욱.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결국 옷 속,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고 있다는 뜻이다.
“…….”
아렌은 교국 사절단 무리에 숨죽이고 있던 아르테를 찾아갔다.
“…뭐야? 방금 돌려보내 놓고선, 곧바로 찾아왔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묻고 싶은 것?”
“목욕할 때, 장신구는 모두 벗어놓고 해요?”
“…….”
아르테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는 질문이지만, 다행히 아르테는 아렌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팔찌 얘기라면, 맞아. 한순간도 빼놓지 않아.”
“역시 그렇군요.”
아렌도 마찬가지였다.
목욕할 때도 아렌은 반지를 빼놓지 않고 낀 채 목욕했다.
반지까지는 그리 어색하지 않지만, 팔찌조차도 그렇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운명석이라서, 한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강박감이 작용한 거야.’
그리고, 그건 라이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