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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33화 (133/227)

#133화

“…아르테?”

“뭐야, 아렌. 아는 사람이야?”

세밀 메렌치는 갑자기 나타난 교국 사절단의 수행원을 경계했다.

“사절단? 수행원인가?”

“교국이 제국 측에 제출한 명단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거기에 교국의 고위급 여성은 없었어요.”

“…단순한 시종 치고는, 묘하게 당당하지 않아?”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세밀과 듀란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아렌의 뒤에서 소곤거렸다.

도국 연합의 구심축인 두 도국이 각자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서로 손을 잡았고, 자연히 세밀과 듀란도 친해진 모양이었다.

‘역시 헬데움과 카르도나 사람 아니랄까 봐. 예리하잖아?’

아르테는 여전히 수행원으로 위장한 채 따라왔지만, 매사에 거리낌 없어 보이는 묘한 분위기가 그녀의 지위를 몇 단계는 더 높아 보이게 만들었다.

아르테는 아렌이 운명석 계약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협력관계인 인물이다.

평소라면 그럭저럭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 이럴 때!’

지금 황궁 안에는 운명석 계약자를 해충보다도 황자가 있다.

아직 황제가 쾌차하지 않았으니 황궁 안에서의 발언권은 내원 시종장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라이안에 대해 경고해줘야 했다.

‘…아르테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면 간단한데.’

아르테는 세상 모든 사람의 속마음을 눈으로 보듯 훤히 들여다볼 수 있지만, 단 하나 아렌의 마음만은 엿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아렌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운명석 계약자라서.

거리낌 없이 독심술을 사용하는 아르테에게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렌은, 이 세상의 유일한 미지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평소에는 좋았지만, 이런 식으로 은밀히 정보를 전달해야 할 때는 오히려 방해였다.

“…흐음.”

아렌 뒤에 있는 세밀과 듀란을 보면서 히죽 웃는 아르테.

‘벌써, 둘의 마음을 읽은 건가?’

아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도 그녀들의 마음을 읽으면, 아렌이 운명석에 대해 꽤나 상세한 보고서를 받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가 방해하면 안 되겠지? 이만 가볼게.”

“안내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둘은 자리를 비켜주며 세밀과 듀란은 다시 도국의 사절단 무리에 합류했다.

조금은 신경이 쓰인 모양이지만, 결국은 교국 사절단의 수행원 신분.

교국 평신도 정도의 인물에 굳이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겠지.

떠나가는 둘을, 아르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못 본 사이에, 꽤 즐겁게 지낸 모양인데? 그 사이 도국에 가 있었다면서?”

“즐겁긴 무슨. 암살자가 오질 않나, 전쟁에 휘말리지 않나. 이쪽은 고생뿐이었다고요.”

“거기에 연애질까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용케 그런 말을 하네?”

“두 사람을 봤잖아요? 둘을 보고도 용케 그런 말을 하네요.”

‘이미 둘의 속마음을 읽어보지 않았냐’라는, 완곡한 표현.

아르테는 웃어넘겼다.

“…그것보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요.”

“그럴 때가 아니라니, 뭐가?”

아렌은 지금 황궁의 사정을 아르테에게 설명했다.

황제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한 초청이지만, 여전히 황궁 안은 황제 암살시도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거기에, 자신의 형제조차 역모로 지목하는데 거리낌 없는 제1 황자.

이미 운명석 사용자라 의심되는 것만으로 비나그네를 황궁 한복판에서 죽인 이력이 있다.

그녀는 지금,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제발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렌의 설명을 다 들은 아르테는 턱을 괴고 방금 말들을 곰곰이 곱씹었다.

“…흠. 내가 남의 설명을 이렇게 공들여 들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요?”

“그렇다고 허둥대봤자 소용없잖아? 라이안 황자가 운명석 계약자를 노린다, 라. 대체 왜?”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본인 말로는, 단독으로도 제국에 위협이 될 수 있어서라고 했지만-”

“그러니, 들키면 위험하다?”

“황자들 중 가장 황권에 가까운 자고, 이미 형제 하나를 역모로 몰아 제거했어요.”

이 정도만으로도 라이안의 위험함은 차고도 남는다.

“…흐음. 아렌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한번 그 사람 속내를 살펴볼까?”

“최대한 접근조차 안 했으면 하는데요.”

“멀리서 잠깐 보는 것 정도야. 그 정도는 괜찮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아렌은 아르테의 행동을 철저히 말린다.

“절대, 절대, 절대 가까이 다가가면 안 돼요. 알겠죠?”

“어머, 그렇게까지 날 걱정해줄 줄은 몰랐는데?”

“당신이 붙잡혀서, 나에 대해 지껄일까 봐 그러잖아요.”

아르테는 그대로 곱게 눈을 흘겼다.

“…귀염성 없긴.”

*****

아렌이 도국의 두 사람으로부터 받아든 보고서는 꽤나 두꺼웠다.

하지만 방에 가져와 찬찬히 살펴보니, 결국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책들의 내용을 간추려 수록한 것일 뿐이었다.

중복되는 내용도 많았고, 대다수는 아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말 그대로 운명석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담아 넣었군.’

도국에서 취사선택한 정보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다 담은 이 보고서가 더 신뢰가 간다.

아렌은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운명석 대부분은 얼어붙은 산맥 너머, 북방에서 온다.’

‘운명석에 진심으로 기원하면, 그 기원에 걸맞은 능력이 주어진다.’

‘운명석과 일반 흑옥을 구분하는 방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금이 가지 않은 오래된 흑옥 골동품으로 도국에선 이따금 시험해보기도 하고, 30년 전 카르도나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운명석 계약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보고서 안에는, 레데가 만들고 운용한 운명석 계약자, 속칭 ‘비 나그네’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아렌은 보고서를 중반까지 읽은 후, 잠시 덮으며 자신의 흑옥 반지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왜 금이 가지 않은 흑옥이어야 하지?”

두 번째 삶에서 아렌을 처음 본 라이안은, 라이안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도 라이안은 아렌의 반지를 가장 먼저 확인했지만, 반지에 실금이 가 있음을 확인한 후 곧바로 의심을 거뒀다.

“그러고 보면, 아티스의 왕자도 피리가 깨지면서 죽었지. 비 나그네도. 하지만 난 지금 살아있는데?”

계약자가 죽으면 반지가 깨지는 것인가, 아렌은 추측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보고서 뒤쪽에 있었다.

아렌은 내용을 확인했다.

‘계약을 이룬 운명석이 깨지는 경우 첫 번째. 계약자가 진심을 다한 소원이 이뤄진 경우.’

이 경우는, 아렌에게 해당 사항이 없었다.

‘두 번째. 혹은, 그 소원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뤄지지 않을 경우.’

아티스의 왕자나 비나그네가 죽자 운명석이 깨진 것도 두 번째 경우인 듯했다.

그리고 운명석이 깨지면 계약하면서 얻게 된 능력도 없어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금이 간 운명석을 가진 사람은 경계할 필요가 없다?’

과거 누군가와 계약한 운명석이었다가, 그 목적을 다 해 깨진 다음 고물상을 전전하는 물건도 분명 존재할 테니, 금이 간 운명석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그가 계약자인지 확인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다.

‘-잠깐만.’

아렌은 실금이 간 자신의 운명석 반지를 쳐다봤다.

“실금이 갔다는 건, 능력이 없어졌다는 뜻이잖아.”

‘목적이 이뤄진 경우’라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아렌 자신도 운명석에 뭐라고 소원을 빌었는지 알지 못하니까. 단순히 ‘다시 시작하고 싶다’라는 소원이었다면 돌이 깨져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미래를 암시하는 환각은?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언령은?”

아렌은 이미, 자신의 점괘가 언령과 꽤나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른 운명석 계약자처럼, 아렌도 뒤늦게 특별한 능력을 얻은 것인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반지에 금이 가 있다면 아렌의 능력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도국으로부터 받은 보고서의 내용은 끝났다.

아렌은 곧바로 방의 중앙에 놓인 화로에 보고서를 던져넣었다.

화롯불은 일시에 솟구치며 보고서를 집어삼켜, 활활 타올랐다.

아렌은 생각했다.

“운명석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아니었나?”

*****

교국의 주교 아르테는 황궁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위로 방문한 적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결이 달랐다.

황제가 직접 흉수의 손에 습격당하고, 부상까지 입었다.

그럼에도 인접한 국가의 사절들의 방문을 허용한 건, 인접국에 대한 우호를 보여줌과 동시에 헛된 마음을 품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과시.

그런 목적으로 부른 이상, 교국의 사절단 수행원 신분인 아르테를 섣불리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교님. 슬슬 정체를 밝히시고 실제로 나서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런 그녀에게 진언한 건, 명목상 사절단의 대표로 나서고 있는 가짜 인솔관, 퀴레스였다.

“제국의 정보력이 도국만은 못하더라도, 제국은 제국입니다. 언젠가는 들통날 거짓말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제 생각은 달라요, 퀴레스. 이미 시녀 역으로 몇 번이나 들른 곳이에요. 이제와서 옷을 바꿔입고 사실은 나 주교요, 하면 인정해줄 것 같아요?”

“하지만, 외교적 결례가 점점 쌓이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걱정 마세요. 결례가 되지 않게 하면 되니까.”

“…?”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아렌과 아르테.

아렌의 황자인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된다면, 아르테의 외교적 결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교국이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르테는 레온나토스를 황제로 지지해야만 했다.

‘…썩 내키진 않지만. 조금 도와줘볼까?’

아르테는 황궁 안을 거닐었다.

언뜻 정처 없어 보이는 걸음이었지만,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찾았다.’

복도 끝에 있는 건, 황궁 경비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제국 제1 황자 라이안.

아르테는 모른 척 그에게 다가갔다.

아렌은 그에게 절대 다가가지 말라고 말했지만, 아르테는 그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속마음을 전혀 볼 수 없는 아렌 외에, 아르테는 누군가를 경계해본 기억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조차 훤히 알고 있는 상대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법이니까.

라이안과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시침 뚝 뗀 표정으로 다가가는 아르테.

라이안 주변에 있는 위병들의 속마음은 이미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황자 라이안 뿐.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째서지?’

이미 라이안과의 거리는 열 발자국 내외.

차고 남을 만큼 가까워졌는데도, 아르테는 라이안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운명석 계약자인 아렌처럼.

라이안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걸 알자 아르테의 숨은 가빠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속내가 없으면서, 운명석 사용자에 강한 적대감을 보이는 대상.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대상은, 아르테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어, 어서 이걸 알려줘야-’

“거기, 뭐냐.”

“-네?!”

위병들의 보고를 받던 라이안의 눈이, 어느새 아르테를 직시하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군. 무슨 일이지? 길이라도 잃은 건가?”

“아, 저… 그것이…”

아르테는 자신을 찌르는 듯한 시선을 회피하며, 가까스로 둘러댈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라이안은 저도 몰래 뒷걸음치는 아르테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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